소설가 정지돈이 그린 '싱글이 불법인 사회'

소설가 정지돈이 그린 ‘싱글이 불법인 사회’

2018-10-18T14:49:54+00:00 |relationship|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창세기 2장 18절
독신 여성의 가장 큰 고충은 자신을 시집 보내려는 사람들과 맞서는 것이다. 헬렌 걸리 브라운

1. 비혼 유예기간이 일주일 남았음을 알려드립니다. 장다름 Gendarme은 메시지를 확인하고 곧장 팸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팸은 받지 않았다. 더 이상 미룰 순 없었다. 두 번이나 기간을 연장했고 그것만으로 리스트에 올랐을 것이다. 이 말인즉 앞으로 혼자 살 일은 없다는 뜻이다. 감옥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말이다.

혼자 살기 위해선 도망쳐야 했다. 신분을 위조하든가, 불법체류자처럼 숨어 살아야 했다. 혼자 살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해야 돼? 상근이 말했다. 다들 결혼하는데 너도 좀 해. 국가도 위하고 부모도 위하고. 이기적으로 혼자 살 생각 그만하고.

2. 비혼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급증하는 1인 가구와 사상 최악의 인구 절벽을 겪은 나라들은 적극적으로 결혼과 출산을 권장하는 걸 넘어 혼자 사는 사람을 ‘악’으로 규정했다. 조짐은 한참 전부터 있었다. 경기가 침체되고 범죄율이 상승하면서 반동적인 의견이 고개를 들었다. 독신은 무책임, 방기 등 이기적인 현대인의 속성과 연결되었고 부적응, 비정상, 범죄, 부패의 온상으로 거론되었다. 통계적으로 기혼자보다 미혼자의 범죄율이 훨씬 높다. 기혼자의 수명이 더 길고 행복도가 높다는 통계도 있었다. 이러한 통계를 두고 말이 많았다. 이혼율이 절반이 넘는데 이 사람들은 어느 쪽에 포함시킨 건가, 개인의 행복을 통계로 치환할 수 있나. 사람들은 반발했지만 한번 타기 시작한 바람을 막을 순 없었다.

스테판 라딜의 말이 맞았어. 팸이 말했다. 스테판 라딜은 사회학자로 1995년 연방 독일 총리실의 청탁을 받아 <독신자 사회 Die Single-Gesellschaft>라는 논문을 썼다. 독신 사회는 21세기 인류가 맞이할 가장 큰 변화다. 역사상 최초의 일이며 충격적인 사회적 실험이다. 스테판 라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독신 인구의 대부분은 특정 문화 경향, 정치 성향에 편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녹색당에 투표하고 일회용품을 멀리하는 중산층 출신의 인텔리입니다. 극우정당에 투표하는 독신자는 없습니다.

팸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그러니까 비혼과 기혼의 문제는 사실 정치, 문화의 영역이라는 거야. 사람들은 이걸 생활의 영역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아. 세계 경제가 추락하면서 파시즘, 극우, 보수적인 경향이 득세했고 비혼을 법으로 금지하는 결과에 이른 거지.

극단적인 생각 아니야? 장다름이 반대 의견을 냈다.

전혀. 팸이 말했다.

3. 법은 합리적인 사회의 테두리인 동시에 광기의 대변자다. 동성애 금지법, 금주법, 낙태 금지법, 흡연권 박탈, 테러 방지법, 이민법, 병역법, 임대차 보호법, 재산권…. 한 시대나 사회에서 당연하게 권장되거나 금지되는 것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보라. 법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선택과 배제다.

4. 물론 이건 팸의 의견이다. 그는 스물네 살에 결혼해 두 자녀를 두었으나 서른에 이혼하고 여성으로 성별을 바꿨다. 여자가 되고 난 뒤에는 싱글로 사는 삶을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성기 때문이야.

무슨 말이야?

성기는 세로형, 수직 구조물이지. 이성, 신앙, 위계, 질서. 인간이 왜 이렇게 생겨먹은 줄 알아? 직립보행 때문이야. 네 발로 걷기 시작하면 지금의 사회문제 대부분이 해결될 거야.
헛소리였지만 아주 생뚱맞은 소리는 아니었다. 토머스 트웨이츠 Thomas Thwaites의 장난스런 염소 실험 이후 인간의 동물화를 위한 운동은 트랜스휴머니즘의 한 축을 이루며 큰 바람을 탔다.

미래의 인간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해. 동물이냐 기계냐.

너는 상황을 과장하는 경향이 있어. 장다름이 말했다.

팸은 고개를 저었다. 멍청아. 그건 니가 기득권이라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기득권인가? 그럴지도 모른다. 장다름은 서울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남성이성애자, 게다가 외동아들이다. 중요한 건 싱글을 선택하는 순간 한 줌에 불과한 기득권의 위치조차 박살 날 거라는 사실이다. 범법자가 되고 낙인이 찍힌다.

그런데 이걸 어쩌지. 장다름은 생각했다. 혼자 사는 게 너무 좋다.

4. 제일 좋은 건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집에 아무도 없다는 거야. 완전한 고요. 신경 쓸 사람이 없다는 거. 천천히 일어나도 되고 음악을 플레이해도 돼. 장다름의 경우는 나탄 밀슈타인을 듣는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파르티타. 모든 걸 내 리듬에 맞출 수 있어. 장다름은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을 보며 한숨을 길게 내쉰다. 한숨은 순간의 무한한 자유를 의미한다. 누구도 나를 터치하지 않고 나도 누군가를 터치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

5. 그런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안 그래?

6. 악성 자기애 Malignant Self-Love. 상근이 장다름을 지칭하는 말이다.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사람, 사회에 관심이 없는 사람, 더불어 함께 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람.

감정 없지? 사랑하는 사람하고 연대감 못 느끼지? 어릴 때 길고양이 막 잡아서 죽이고 그랬지?

오버 좀 하지 마.

장다름이 말했지만 그가 일반적인 사람에 비해 감정이 메마른 건 사실이다. 1인 가구 수가 급증하는 시기 싱글 옹호론자나 연구자들은 혼자 사는 이들이 감정적으로 더 풍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혼자 사는 이들이 사회생활, 유대에 더 적극적이며 관계 지향적이다. 그러니 초솔로 사회가 도래해도 걱정할 거 없다. 사람들은 혼자 살면서 연애도 하고 애도 낳고 친교도 쌓는다. 그게 21세기 사회의 특징이다.

그러나 장다름이 생각하기에 이러한 주장은 오류였다. 혼자 사는 이들을 옹호하기 위해 그들을 더 인간적으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점은 이해하지만 일종의 정신적 퇴행이다. 인간의 감정이 과거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고 해서 꼭 비인간적인 건 아니야. 신체적 관계, 물리적 유대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인간이 늘어나고 있다면? 이게 새로운 시대의 종특이라면?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두려워했다. 인간성 상실 같은 단어를 들먹이면서. 그들은 지구가 멸망이라도 할 것처럼 굴었다.

장다름이 결혼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꽤 오랜 시간 결혼 생활을 유지했고 특별한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특별함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산정하느냐에 따라 다르지만 말이다. 문제는 장다름이 특별하지 않은 문제도 참을 수 없었다는 거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 그냥 혼자 살면 안 되나.

그러니까 니가 소시오패스라는 거야. 눈을 보면 알 수 있어. 소시오패스 새끼.

상근이 말했다. 그는 경찰이다. 장다름과는 30년 된 친구로 호시탐탐 장다름을 체포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8. 다큐멘터리 영화 <나, 소시오패스 I, sociopath>는 샘 바크닌 Sam Vaknin이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극복하는 이야기다. 그는 자신이 정서적 흡혈귀였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을 이용하는 겁니다. 그걸 토대로 제 배를 불리고 때가 되면 가차 없이 그들을 버리는 거죠. 그래야 혼자만의 삶을 영위할 수 있거든요.

<나, 소시오패스>는 샘이 셀프-러브 자가 진단 테스트에 체크를 하는 장면에서 끝난다. 철저히 혼자 남겨진 샘은 해변이 보이는 바하마의 바에서 밤을 새우고 테이블에 앉아 테스트에 임한다. 지평선 너머 해가 천천히 떠오르고(왜 이따위 배경인지 모르겠다) 항목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는 샘의 눈에 눈물이 맺힌다. 얼마나 잘못 살아왔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혔는지, 얼마나 교만했는지.

9.법으로 정해진 독신 조정기간은 6개월이다. 여러 사항을 고려해 3개월에 걸친 두 번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약혼자의 갑작스런 사망과 같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그렇다.
기간을 초과한 사람은 구금되고 재판에 넘겨진다. 정당한 사유 없이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한다.

국가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해 무담보 저금리 주택과 가계 대출 및 문화생활비 지원, 세금 감면 등 각종 복지를 마련해두었다. 출산까지 이어지는 것을 염두에 둔 복지로 출산을 하면 더 많은 혜택이 뒤따른다. 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파트너를 만나는 건 어렵지 않다. 국가와 사기업에서 주관하는 만남이 줄을 잇는다. 원하면 하루에 세 탕도 뛸 수 있다. 그런데 결혼을 안 한다고? 대체 왜?

10. 전 부인과 재결합을 염두에 둔 적도 있다. 선우와 장다름은 5년 간 함께 살았다. 둘은 꽤 잘 맞는 사이다. 대화, 섹스, 식습관, 남 욕하는 취미, 집 밖으로 나가는 걸 싫어하는 것과 반려동물에 관심이 없는 것까지. 그만한 사람 만나기도 힘들지.

선우는 장다름과 헤어지고 5개월 뒤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여자였고 한 달 뒤 기증 받은 정자로 임신했다.

얘길 하지 그랬어.

뭘?

애기 낳고 싶다고.

니 애기를 낳고 싶었던 건 아니야. 선우가 말했다.

11. 장다름은 커피를 내리고 현관 밖으로 나왔다. 눈부신 햇살 아래 커다란 오크나무들이 서 있었다. 아침 바람, 나뭇잎, 그림자, 다시 바람, 새소리. 장다름은 머그컵을 들고 나무 아래를 걸었다.

이 생활도 내일이면 끝이다. 장다름은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누군가를 만나 혼인신고를 하지 않으면 거처를 옮겨야 한다. 거부자들이 사는 쪽방으로 들어가거나 지하 생활을 해야 해. 그럴 가치가 있을까.

팸은 징역을 살고 난 뒤에도 지속적으로 거부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결혼은 군복무와 달라서 한번 징역을 살고 나온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의무는 다시 주어졌다. 당신이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트랜스젠더든 노인이든 가난뱅이든 부자든 상관없다. 결혼을 해라. 그 뒤의 문제는 국가가 해결해주겠다.

팸은 평생 쫓길 각오를 했다. 다시 결혼하라고? 차라리 죽음을 택할래. 팸은 일종의 혁명가이자 반체제 운동가가 되었는데, 주지했다시피 모든 게 너무 극단적이다.

결혼하기 싫다고 혁명까지 해야 돼?

역사는 투쟁을 통해 진보하는 거야.

팸의 말이다.

12. <이혼-이탈리안 스타일 Divorzio All’Italiana>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가 주인공인 고전 흑백영화다. 100년 전 작품으로 당시 이탈리아는 법적으로 이혼이 불가능한 나라였다. 당장 이혼을 하고 싶은 주인공은 아내를 죽이기 위해 총을 든다.

주인공의 첫 대사는 다음과 같다. 남쪽의 세레나데, 달콤하고 덥고 진빠지게 하는 시실리의 밤들. 그리고 흑백 화면에 이탈리아 시골 마을의 유지와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종소리가 울리는 광장을 피켓을 들고 천천히 전진한다. 남자는 생각한다. 이 진보는 정말이지 너무 느리고 답답해! 그는 총을 든다. 진보를 한발 앞당기기 위해, 이혼을 위해, 자유를 위해.
영화의 감독은 피에트로 제르미다. 이 영화의 장르는 코미디다.

13. 팸과 장다름은 개명에 관한 특별 조례에 의거해 스무 살에 이름을 바꿨다. 이름이라는 거 너무 이상하잖아. 애가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성격인지 모른 채 주어진다고. 아기일 때는 괜찮아. 그런데 자랄수록 이상하지. 내가 은미라고? 내가 영수같이 생겼어?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고를 권리가 있다. 특별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도 말이다.

여론에 따라 개명신청 및 가정법원의 허가 절차는 폐지되었다. 사람들은 사람들이 이름 가지고 장난칠까 봐 걱정했지만 특별한 일은 없었다. 이름 가지고 장난친들. 자기 이름인데.

넌 원래 이름이 뭐였어? 팸이 물었다.

광수. 장다름이 말했다.

장다름은 무슨 뜻이야?

좋아하는 소설에서 따온 거야.

이름을 바꾼 사람일수록 싱글을 원할 확률이 높다는 거 알아? 팸이 말했다. 너도 이름을 바꿨잖아. 그러니까 넌 싱글로 지낼 팔자야.

14. 팸과 그 일행은 자정에 장다름의 집에 도착했다. 마스크를 쓰고 단체로 맞춘 점프 수트를 입은 모습이 영락없이 광신도 컬트 집단 같았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자율주의적 여성주의자라고 불렀다. 아우또노미아 페미니스따Autonomia Feminista.

뭔가 또 알아먹을 수 없는 소리를 하는군. 장다름은 잠자코 그들의 지시를 따랐다. 미리 싸둔 캐리어를 나르고 신분을 증명할 만한 것들, 사진이나 증명서, 각종 편지 등은 검은 봉지에 담았다. 왜 이것들을 정리해야 되는 거야?

시간을 벌어야 돼.

팸이 말했다. 아우또노미아 페미니스따 중 하나가 망치로 장다름의 컴퓨터 하드를 완전히 아작냈다. 맙소사.

내가 그렇게까지 해서 추적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가. 장다름은 자신이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인지 이들이 너무 심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팸의 말에 따르면 해커에 의해 장다름의 계정에 있는 정보도 삭제했으니 흔적을 찾는 데 꽤나 애를 먹을 거였다. 그들이 찾길 원한다면 말이다.

돈은?

장다름은 현금 다발을 내밀었다. 팸은 백팩에 돈을 쑤셔 넣었다. 좋아. 가자.

뭔가 신난 거 같은데. 장다름은 속는 느낌이 들었지만 따질 정신은 없었다.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현실감이 없었다. 그냥 확 결혼해버릴까. 그는 휴대 전화를 꺼내 선우의 번호를 검색했다. 최근 몇 번 만났던 다른 여자도. 어느 쪽이 진짜 미친 짓인지 판단이 안 섰다.

문을 나설 때 팸이 그의 등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제 진짜 도망자가 되는 거야.

15. 자율주의적 여성주의자는 개별적으로 행동한다.

16. 장다름은 자율주의자도 아니고 여성주의자도 아니다. 그는 단지 혼자 살기를 원했을 뿐이다.

그게 니가 자율주의적 여성주의자라는 뜻이야. 팸이 말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지 그 외에는 없어.

17. 장다름은 팸이 지정해준 셸터에서 살았다. 말이 좋아 셸터지 지하 십 층 규모의 공간에 개미굴처럼 작은 방을 수백 개 만든 공동주거 콤플렉스다. 불법체류자, 비혼자, 노숙자 등이 모여 사는 곳으로 최외법권이나 다름없다. 여기서 버티다가 바뀐 신분증을 들고 돌아와서 살면 돼.

확실히 알 수 있는 건 이렇게 사는 건 장다름이 원한 싱글의 삶이 아니라는 거였다. 우선 공간이 너무 좁았다. 집들 간의 간격은 지나치게 가까웠고 복도에서 늘 보는 이들과 마주쳤다. 그들은 장다름에게 말을 걸고 접근하기까지 했다. 이들 중에 자발적인 비혼자들이 있긴 한 걸까. 하루에 한 명씩 죽어나가는 듯했지만 발견되는 데 사나흘이 걸렸다. 시체 발견 및 수거를 담당하는 미화원이 있었고 주 2회 장다름이 살고 있는 콤플렉스에 방문했다. 수색은 대충 이루어졌지만 악취가 심해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경제적 여유가 없는 싱글은 장점이 없다. 국가에서 불법으로 지정한 건 어떤 의미에서 현명한 정책일지도 모른다.

저기요.

누군가 장다름의 방문을 두드렸다.

네?

옆방 사람인데요. 작은 목소리, 작은 체구의 남자였다. 장다름이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데요?

너무 시끄럽네요. 조용히 좀 해주세요.

남자가 지나치게 또박또박하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장다름이 황당한 표정으로 방 안을 둘러봤다. 그의 방에는 당연히 아무도 없었다. 시끄럽다니, 무슨 소리지?

남자는 때가 낀 검지 손톱으로 침대 위에 있는 이어폰을 가리켰다. 이어폰에서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음악소리가 들려서요. 도저히 더 이상 못 참겠네요.

아… 네.

장다름은 그가 돌아가고 난 뒤 이어폰을 한참 쳐다봤다. 못 참겠다고? 내가 못 참겠다.

18. 관계 맺기는 정말 인간의 본성일까.

19. 침대에 누워서 선우 생각을 자주 한다. 장다름은 그녀와 함께 지내던 시절 찍은 사진을 보며 그때의 날씨며 입었던 옷이며 나눴던 대화를 생각했다. 좋은 시절이었지. 연락할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sns로 보이는 선우의 결혼 생활은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육아에 정신이 없었고 파트너는 큰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다.

다시 시작하면 잘할 수 있을까. 이젠 애까지 봐야 하는데. 장다름은 생각했다.

20. 니콜라 테슬라는 1900년 6월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의 모든 생각과 행위를 통해 절대적으로 만족스럽게 입증했고 매일같이 입증하고 있는 사실은 내가 운동 능력을 갖춘 자동인형이라는 것이다. 나는 감각기관을 때리는 외부 자극에 반응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고 움직일 뿐이다. 이런 경험을 하고 보니, 오래전부터 나를 기계적으로 재현하고 외부의 영향에 대해 나처럼, 하지만 훨씬 원시적으로 반응하는 자동인형을 만든다는 발상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는 자신을 닮은 자동인형의 이름을 텔레오토마타Teleautomata라고 붙였다.

21.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지만 테슬라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22. 선우는 아이를 법관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나름 괜찮은 선택이지 않아? 그녀의 파트너인 마저리는 큰 관심이 없었지만 동의했다. 좋은 직업이지. 돈도 잘 벌고.

장다름에게 전화가 몇 번 오긴 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가 비혼자의 삶을 택해 어딘가로 도망쳤다는 소식은 상근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전화가 오는 걸까. 궁금하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마저리와 장다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떨까. 선우는 마저리가 썩 내키지 않았지만, 특히 그가 선호하는 옷차림은 눈꼴 사나웠지만 그래도 마저리와 함께 있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마저리는 선우를 필요로 했다. 장다름은 그렇지 않지. 아이에게 분명히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거야. 애정 결핍으로 크겠지.

선우는 자기도취적인 어머니 아래서 자랐다. 그녀는 유년기의 선우에겐 관심이 없었고 성인이 된 선우에게는 간섭을 하거나 질투를 했다. 마저리는 선우에게 ‘도터스 오브 나르시시스트 Daughters of Narcissist’라는 이름의 애플리케이션을 소개했다. 어머니와 통화 후 마음에 상처를 받고 힘들 때 앱을 누르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나온다.

신경 쓰지 마!

너는 그 자체로 소중한 사람이야.

스스로를 너무 구박하고 미워하지 마.

가끔은 남 탓을 해도 괜찮아.

내가 나를 지켜주고 돌봐주지 않으면 이 세상에 그 누가 나를 지켜주겠어.

정 견디기 힘들면 너를 위해줄 사람들과 만나서 대화를 나눠 → *클릭* 안티나르시시스트들을 위한 번개 모임 ‘겨울을 지나온 우리에게’

23. 장다름은 지하에서 사는 동안 점차 확신이 생기는 걸 알 수 있었다. 자신이나 팸과 같은 사람은 새로운 종이야. 팸이 동물이라면 자신은 기계였다. 인간이 왜 이런 방향으로 진화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이것을 퇴행 또는 진보라고 할 수 있을까.

24. 여러분, 결국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의식적인 타성이 가장 좋다! 그러니까 지하 생활 만세! 나는 울화통이 터질 만큼이나 정상적인 인간이 부러워 죽겠다고 말은 했지만, 그러나 현재 내 눈으로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상태에 그들이 있는 한, 그들 축에 끼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