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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천적이고 지독하게 탐미적인 도시 뉴올리언스

2019.12.29GQ

대책 없이 낙천적이고 지독하게 탐미적인 도시 뉴올리언스. 그곳에선 쉴 새 없이 음악이 흐르고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다.

도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재즈 밴드.

프렌치 쿼터에 있는 건물의 발코니.

프렌치맨 스트리트의 행인.

피터 앤 폴 호텔의 객실.

바이워터 아메리칸 비스트로의 리소토와 구운 당근.

피터 앤 폴 호텔에 전시된 종교 회화.

메종 데 라 루즈 호텔에 있는 바 마릴루의 칵테일.

브랜든 오덤스의 벽화.

프렌치 쿼터의 유럽풍 주택.

툽스 사우스의 프라이드 치킨, 새우와 푸아그라 토스트, 문어 바비큐.

동남아시아 퓨전 레스토랑 메이팝의 피클 병조림.

앨리자 제인 호텔.

Travel feature on New Orleans, portrait of to musicians playing instruments, trumpet, bass, music, jazz band, blues band, drums, dark room, performance, performing

Travel feature on New Orleans, bar behind a bookcase doorway, secret bar, red bookcases

Travel feature on New Orleans, interior of a restaurant, converted fireplace, chairs and tables, brown

Travel feature on New Orleans, people riding in a tram

에이스 호텔 프리다숍의 수잔나 립시.

뮤직 박스 빌리지의 제이 페닝턴.

이른 아침이었다. 세인트 클로드 거리에서 제이 페닝턴이 첫 번째 컬렉션을 전시한다는 곳을 찾고 있었다. 뉴올리언스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 많다. 거리 이름도 그렇다. 내가 걸은 세인트 클로드 거리는 프랑스 예수회에서 그 명칭이 유래했다고 한다. 하지만 종교와는 전혀 관계없는 인물 클로드 트레메가 이름을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8세기 프랑스 출신 도시 개발자였던 그가 자신의 이름인 ‘클로드’를 지명으로 붙였다고 한다. 한편 버나드 드 마리니라는 부유한 인물은 어번던스(풍요), 트레저(보물), 루다무르(사랑의 거리), 그리고 호프(희망)라는 거리명을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뉴올리언스가 환희에 찬 이름의 도로로만 직조된 것은 아니다. ‘상실의 거리’라는 뜻의 페르디도 스트리트처럼 정반대의 뉘앙스를 지닌 도로도 존재한다. 사람의 감정처럼 기쁨과 슬픔이 뒤죽박죽 섞인 도시. 뉴올리언스는 꽤나 변덕스럽고 인간적인 도시로 보였다.

한때 드러머였던 제이는 음악에 대한 갈증을 충족하기 위해 오스틴을 떠나 미국 전역을 떠돌았다. 재즈, 펑크, 컨트리, 록, 힙합 등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며 여정을 이어갔다. 방황을 멈추게 한 곳은 뉴올리언스였다. “음악 산업에 종사하고 싶으면 뉴욕이나 로스앤젤레스가 좋겠죠.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 음악과 함께하고 싶다면 뉴올리언스로 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너그럽고 열려 있어요. 상업적 성취는 뮤지션으로서의 성공을 판가름하는 잣대가 아니죠. 뉴올리언스는 미국에서 보헤미안으로 살 수 있는 마지막 도시예요.” 제이는 ‘러스티 레이저’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파스텔 가발을 쓰고 손톱을 칠한 채 공연하는 ‘빅 프리디아 Big Freedia’를 위해 디제잉을 한다. “그녀는 바운스(뉴올리언스의 힙합 장르 중 하나)의 여왕이에요. 멧 갈라의 레드 카펫에도 오른 아티스트죠.” 제이는 뉴올리언스에 관해 이야기하며 말을 이어갔다. “어떤 부분에서는 10년 앞서 있지만, 또 어떤 부분에선 10년 뒤처져 있어요. 교육이나 정치 같은 문제요.”

파이어티가에서 제이를 만났을 때, 그는 “네가 사랑하는 뉴올리언스의 모든 게 흑인들이 만든 거야”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제이는 자택 뒷마당에 마련한 공연장이 자신의 음악을 듣고자 하는 사람 모두를 수용하기엔 좁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설치미술가 딜레이니 마틴, 테일러 셰퍼드와 함께 모금 활동을 벌여 운하 근처에 있는 폐 공장들을 매입했다. 공연장으로 개조된 이곳엔 ‘뮤직 박스 빌리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잡초가 우거진 주차장과 녹슨 철제 울타리 뒤에 숨어 있어 세상에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예술가, 방문객, 아이들, 이웃 모두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다. 새, 바람, 강물이 흐르는 소리와 화물열차의 소리가 모두 악기처럼 작용하며 리듬이 너울거리는 토대를 조성한다. 며칠 후, 제이는 스튜디오 비 Studio Be로 나를 안내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쟁 역사를 담은 브랜든 비마이크 오덤스의 벽화가 모여 있는 예술 단지다. 벽화의 웅장한 크기에 압도당하고, 미국 내 흑인들이 밟아온 어두운 시간과는 대조되는 밝은 색채에 매료될 즈음 비마이크가 남긴 말이 벽화 구석에서 눈에 띄었다. “빈 곳이 있다면, 페인트를 칠하라.”

1700년대 초반, 미시시피강 어귀 습지에 판잣집을 짓고 살던 프랑스 출신 개척자들은 뉴올리언스를 도시로 발전시켰다. 이후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는 1762년에 뉴올리언스가 있는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 있는 사촌 찰스 3세에게 넘겼다. 1800년,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의 영토로 되찾았지만, 전쟁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803년 미국에 매각했다. 얽히고설킨 역사를 거치는 동안 도시의 구성원도 다양해졌다. 프랑스 출신 귀족, 앵글로아메리칸, 아이티 혁명으로부터 도망쳐 온 자유민, 필리핀에서 온 아시아인, 노예 무역으로 끌려온 아프리카인, 유대인,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 밀수업자, 도박꾼…. 이따금 해적까지도 뉴올리언스 항구에 출몰하곤 했다. 그들 각자는 뉴올리언스에 언어, 요리, 여흥 거리를 갖고 와서 함께 어울렸다.

도시 곳곳에 솟은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에서 알 수 있듯, 뉴올리언스에서 가장 색체가 뚜렷한 종교는 카톨릭이다. 한때 이 도시에 살았던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는 모든 죄를 용서하려는 것처럼 팔을 벌리고 서 있는 세인트루이스 성당의 예수상을 언제나 시야에 두고 싶다고 했다. 그는 “뉴올리언스에서 자유를 찾은 동시에 충격을 마주했다. 청교도주의에 본능적으로 반발하며 떠올렸던 극의 주제 의식은 이 도시에 빠져든 후 변곡점을 맞이했다”라고 기록했다.

하지만 뉴올리언스는 방종하고 관능적인 도시다. 매주 파티와 축제가 쉴 새 없이 벌어진다. 이곳에서의 인생은 단조롭거나 일상적이지 않다. 매일 가면무도회가 벌어지는 듯하다. 약 25년 전 뉴올리언스에 처음 왔을 때, 화가이자 갤러리 관장인 조지 슈미트를 처음 만났다. 클래식 수트와 실크 보타이를 매고 있던 그는 도시 전체가 연극 무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툴루즈-로트렉처럼 분장을 해줬어요. 난쟁이 도련님 화가 말이에요. 파라오 복장을 한 채로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볼 수도 있죠. 모두 연극배우 같은 삶을 살아요. 뉴올리언스에선 가면을 벗으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가면 뒤에서,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 될 수 있어요.”

음악은 몸 구석구석을 흐르는 혈액처럼 도시를 타고 흐른다. 거리의 뮤지션, 장례식장, 블루스까지. 뉴올리언스의 음악은 슬픔을 표현하고, 이를 완화하는 치열한 과정을 겪으며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또한 음악가들은 종교적 뿌리에서 멀어지면 자기 자신을 잃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가수 로빈 반스는 일요일엔 반드시 교회에서 노래할 수 있도록 투어 일정을 짠다고 한다. 힙합 뮤지션이 복음서 구절을 가사에 넣는 경우도 흔하다. 뿌리는 종교가 아니라 음악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대화를 나눈 레스토랑의 직원 중 트럼본이나 클라리넷을 연주할 줄 모르거나 노래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음악을 4대째 가업으로 이어온 벤 자프는 가족사를 이야기했다. 그의 증조할아버지는 러시아군에서 프렌치 호른을 연주했고, 부모는 재즈 공연으로 생계를 꾸렸다. “부모님은 1961년에 처음 뉴올리언스에 왔어요. 마치 1920년대의 파리 같았다고 해요. 해방 그 자체였다고 하셨죠.” 뉴올리언스의 음악은 청각적으로 소비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공동체를 결속하고, 구성원을 독려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장례 행렬이 좋은 예다. 장례 행렬에서 맨 앞줄엔 흥겨운 스텝을 밟는 사람들과 가족, 그리고 밴드가 선다. 그 뒤엔 장례에 참여하고 싶은 모든 사람이 줄을 잇는다. 고인이 안장되면 드럼이 울린다. 박자가 빨라지며 음악은 더 달아오른다. 죽은 사람을 기리고, 산 사람을 위로하다 보면 누가 죽었는지 까먹을 정도로 한바탕 신나는 판이 벌어진다.

뉴올리언스에 머무르는 동안 이곳이 미국이라고 자각하기 어려웠다. 외부인에게만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 시민은 ‘캐리비안의 최북단 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시내에는 프랑스, 스페인, 미국에 점령된 날짜를 연대별로 표기한 그라피티가 있다. 마치 언젠가는 다른 세력이 지배할 것처럼 타임라인의 마지막은 물음표로 표시돼 있었다. 조지 슈미트는 미국 시민임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 고 홈”이라고 쓴 스티커를 자동차 범퍼에 붙이고 다닌다.

하지만 2005년 들이닥친 시련은 자유분방하고 낙천적이던 뉴올리언스를 뒤엎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 때문에 뉴올리언스 전체가 종말을 맞이할 뻔했다. 도시 면적의 80퍼센트가 물에 잠겼고, 1천여 명이 사망했다. 인구 절반은 다른 도시로 피난을 떠났다. 당시 B라는 이름의 래퍼는 지나가던 보트를 잡아 휠체어를 탄 노인과 승선했다. 배에는 한 여자와 세 아이가 있었다. 여섯 명은 오염된 물 위에서 생존을 건 항해를 했다. 이미 오염된 물 위엔 시체와 쓰레기가 떠 있었다. 그들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버려진 식당이 있는 해변으로 향했다. 난리 통에 풀려난 핏불이 그들을 공격했다. 언론은 약탈자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고, 주 방위군이 배치됐다. 8일 후, 마침내 그들은 텍사스에서 날아온 봉사자들에 의해 구조됐다. 여섯 명 모두 살아남았다.
시 행정부는 그제야 뉴올리언스가 자연재해에 얼마나 취약한 구조인지 깨달았다. 또한 중앙 정부가 얼마나 무관심한지도 인지하기 시작했다. 한 흑인 해병은 카트리나로 인해 자국에 대한 믿음이 깨졌다고 말했다. 세상 어디에라도 군대를 보낼 수 있는 국가가 정작 자국민을 돌보지 않는다는 사실이 사람들을 낙담케 했다. 하지만 카트리나로 인해 뉴올리언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을 알게 됐다. 재건을 돕기 위한 기금이 쏟아졌고, 수천 명의 봉사자가 몰려들었다. 지역 사회는 결집했다. 제이는 폭풍이 몰아치자 그의 이웃이 정육점에 들어가 어차피 상했을 고기를 훔친 이야기를 들려줬다. “주 방위군이 그를 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그 남자는 TV와 스피커를 인도에 내놓더니 고기를 굽기 시작하더라고요. 암울한 상황에서 파티를 연 거죠. 음악도 있고 스포츠도 있고. 모두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바비큐를 즐겼어요.” 방대한 피해 지역을 재건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가는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았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든 카트리나를 원망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벤 자프는 “음악이 침묵하고 나서야 이곳이 얼마나 희귀하고 소중한 곳인지 알았어요”라고 말했다. 녹색 프로젝트가 시작됐고, 예술가들이 도착했다. 주택이 새롭게 지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문을 연 것은 카트리나였다.

다시금 밝아온 아침, 구시가지에 해당하는 프렌치 쿼터로 향했다. 프랑스식 도넛 베녜 Beignet와 치커리 향을 머금은 커피 냄새가 거리를 채웠다. 프렌치 쿼터의 건물 상당수는 아직 주거지로 남았다. 외벽의 철제 구조물은 오페라 디바의 치마처럼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다. 발코니엔 춤추는 해골과 카니발에 등장할 법한 인형이 걸린 채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에게 축제를 종용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바람에 흔들리는 인형과 길거리의 재즈 밴드에게서 자연재해로 인한 트라우마를 느낄 수는 없었다. 인종과 문화의 혼재, 대책 없는 낙관, 고상하게 보이려는 사람들이 사는 도시. 이곳은 다양성의 수용소이고, 유머이자 타락 그 자체다. 나는 아직 뉴올리언스와 비슷한 곳을 본 적이 없다.

    에디터
    Timothy O’grady
    포토그래퍼
    Squire F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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