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술의 미덕 | 지큐 코리아 (GQ Korea)

넘치는 술의 미덕

2021-05-20T16:35:39+00:00 |drink|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박완서 <그리움을 위하여> 중.

잔을 타고 미끄럽게 내려가는 버번의 흔적을 눈으로 추적할 때 윤형근의 그림을 자주 떠올린다. ‘Burnt Umber’, 진한 황갈색이란 표제는 그 자체로 버번의 형상을 닮은 것 같아 목구멍까지 후끈, 따끔거리는 기분이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 앞에 설 때도 당장 버번을 들이켜고 싶은 맹렬한 욕망이 든다. 통제 불가한 청춘의 한 신이 박제된 것 같은 붉은색의 ‘무제’라면 새 오크통의 터프함이 그대로 밴, 거친 캐릭터의 젊은 버번이 어울릴 것 같다. 미술관에서 술을 마시지 못하는 건 오랜 시간 유감인데, 언젠가 마크 로스코를 다시 목도하는 날엔 미술관 근처 바를 미리 예약해둘 참이다. 그러곤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말해야지. <영 어덜트>에서 옛 연인에게 보기 좋게 차인 샤를리즈 테론이 바에서 버번을 주문하는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메이커스 마크.”

라스베이거스에서 본 포스트 말론은 공연 도 중 자주 목을 축였다. 투명한 잔에 담긴 옅은 색 액체라 물인지 술인지 분명치 않았으나, 짧 게나마 입 안에서 음미하듯 액체를 굴리는 모 습이 왠지 후자일 것 같았다. 자신의 이름을 건 와인을 지닐 정도로 조예가 깊은 그였으므 로, 샴페인이 아닐까도 제멋대로 상상했다. 번 쩍이는 신기루 같은 도시, 라스베이거스에서 그는 어떤 술을 찾았을까? 룩 벨레어라면 소 박하고, 모엣 샹동이라면 어쩐지 지루했겠지. 아티스트가 사랑에 마지않는 돔 페리뇽을 볼 때면 타는 목마름으로 목놓아 부르던 그날의 무대가 떠오른다. 그리고 평소라면 간지러워 못 견딜 만치 낭만적인 건배사로 치어스. 그날 그 밤의 축제 이름처럼, ‘Life is Beautiful’.

“Smells Like Teen Spirit, Nirvana, 1991. 이후, 세상의 남자들은 거지꼴로 흐느적, 구부렁, 울렁거리면서 말하고 걷는다.” 언젠가 작가 양아치에게 청춘에 대해 물었을 때 비범한 작가와 공유하는 흔한 청춘의 한 장면이 있어서 조금은 안도했다. 흐느적, 구부렁, 울렁거리는 너바나식 청춘에선 왠지 홉 향 진한 IPA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해왔는데, 실제로 너바나 브루어리, 심지어 너바나 IPA란 게 존재한다. 아쉽지만 알코올 프리라 대체재를 찾는다. 풍부한 홉 향에 여름 숲을 포착한 듯 자몽 터치가 얹힌 구스 IPA라면 어떨까. 쓰디쓴 홉 향을 달게 즐기게 된 건 일찌감치 홉을 잔뜩 넣어 미국식 IPA를 실험한 구스 아일랜드의 개척 정신 덕분이기도 하니까. 이제는 비현실처럼 멀게 느껴지는 록페스티벌의 한 장면에 연두색 구스 IPA를 툭 놓는 상상을 한다. 마음껏 휘두르고 구기고, 때로는 땀과 함께 꿀꺽 삼키는 제멋대로 멋진 젊음.

“프란시스 베이컨의 ‘검은 3부작’을 목도할 때의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진공 상태. 그 기분을 느끼려면 진에 소다수를 섞어 마셔보세요.” 작고하신 마영범 선생이 내게 말해주었을 때, 그때가 나에겐 진의 첫 경험이었기에 지금도 진을 들이켤 땐 프란시스 베이컨을 떠올린다. 알코올은 기포란 급행 열차를 타고 금세 뇌로 도달한다. 멍하고, 희뿌옇고, 중력이 감지되지 않는 순간의 뾰족한 환각. BGM은 비킹구르 올라프손의 연주라면 좋겠고, 잔에 담긴 진의 이름은 생경할수록 좋겠다. 런던도 스톡홀름도 아닌 경기도 양평에서 나는 최초의 한국 크래프트 부자진, 혹은 남양주 태생의 쓰리 소사이어티스의 정원진이라면 퍽 엉뚱하고 유쾌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