숏폼 콘텐츠 시대에도 사람들이 3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이유 | 지큐 코리아 (GQ Korea)

숏폼 콘텐츠 시대에도 사람들이 3시간짜리 영화를 보는 이유

2022-03-17T12:55:28+00:00 |movie|

찰나의 스크롤링이 이어지는 숏폼 콘텐츠 시대에 상영관 속 영화의 시간은 다시 길어지고 있다. 장단의 기묘한 변주에는 무엇이 녹아 있나.

<더 배트맨>(2022)이 2시간 55분이라는 소문을 듣고 <듄>(2021)과 <하우스 오브 구찌>(2021)를 떠올렸다. <듄>은 2시간 35분, <하우스 오브 구찌>는 2시간 38분 분량이다. 팬데믹 이후 빠르게 성장하는 숏폼 콘텐츠 시장과 비교할 때, 몇몇 영화는 최근 흐름과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여기에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2021)의 2시간 36분까지 더해지니 어떤 하나의 경향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급격하게 바뀌는 소비 패턴을 둘러싸고, 영화계는 현재 술렁이고 있다. 소비자가 플랫폼을 바꾸니 업계는 분주해졌다. 디지털 TV와 모바일, 태블릿으로 스크린의 기능은 분할되고, 장르에 대한 인식은 급변했다. 스마트폰을 터치해 빠르게 전환하는 ‘짧은 영상’이 추세다. 당연히 극장 사업에 대해 걱정하는 사람도 늘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2시간 반을 훌쩍 넘는 영화들이 연달아 개봉하고 있는 것이다. 단언컨대 150분의 지루함을 견디겠단 각오로 극장을 찾는 사람은 없다. 양손에 팝콘을 들고 블록버스터를 즐기러 온 십 대는 있어도, 탐미주의를 견디겠다고 각오하는 시네필은 없다. 모두가 지향하는 감상의 방향은 유사하다. 팝콘을 쥔 관객도, 신경을 곤두세운 평론가도, 전부가 ‘아름다운 것’과 조우하려 극장을 찾는다. 그 아름다움이 기괴함이나 공포의 쾌감으로 살짝 방향을 틀어도 별문제는 아닐 것이다.
역사적으로 긴 영화가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60년대 텔레비전이 일반화될 당시, 영화관은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했다. 그래서 4 대 3의 좁은 화면비와 구분되는 와이드스크린을 택했다. 평면 스피커가 아닌, 서라운드 사운드를 도입했다. 텔레비전용 무료 영상 콘텐츠와 다르게 필름은 웅장해야만 했다. 그 결과 <벤허>(1959)는 3시간 42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는 3시간 36분의 러닝타임을 가지게 됐다. 이 영화들을 모두 인터미션을 가지고 2회로 나뉘어 상영되었다.


확실히 극장을 둘러싼 외부의 상황은 콘텐츠를 변화시켰다. 영화사 초기부터 러닝타임은 릴 Reel의 개수에 영향을 받았는데, 그 탓에 ‘동시상영’이 유행한 시절도 있었다. 영화관은 기술로 시간을 조절한다. 그렇지만 디지털 전환 이후에 전문가의 존재 여부나 기술사항은 더 이상 고려사항이 아니게 된다. 하루에 몇 차례 상영할지가 그보다 더 중요하다. 상영횟수는 흥행 수입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1970년대 이후 상영시간은 어느 정도 규격화되었다. 그 저변에는 가정용 VHS 테이프의 보급이 있었다. 비디오테이프 저장 용량에 따라 상영 길이의 표준이 바뀌었다. 그때부터 장편영화는 대략 2시간 이내로 정해졌다.
<드라이브 마이 카>(2021)를 보고 나오는 길에 상영시간 내내 졸았다는 어느 관객과 마주쳤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있었다. 또한 극장에 온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어쩌면 극장이 제공하는 혜택은 콘텐츠 내부에만 머물지 않는다. 숏폼과 구별되는 긴 영화만의 매력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과연 러닝타임은 ‘영화의 조건’이 될 수 있을까? 기술과 관습이 평균 상영시간을 만든다면, 이를 깨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가 궁금해졌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주인공은 매일 아침 죽은 아내가 녹음한 테이프를 듣는다. 그녀의 내레이션 목소리는 체홉의 <바냐 아저씨>를 읊는다. 매우 느린 속도로. 만일 그가 그 음성을 반복해 듣지 않는다면, 그의 인생은 바뀌었을지 모른다. “전생에 그녀는 칠성장어였습니다.” 과거에 그녀가 했던 말의 진의를 어느 날 그는 깨닫는다. 그렇게 건조한 목소리로 가득 찬 공간은 비극의 발원지가 된다. 그녀는 존재하지 않지만, 목소리를 통해 세상을 지배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 <듄>, <하우스 오브 구찌>는 상영시간 말고도 공통점이 있다. 모두 여성의 음성으로 시작된다는 것. 우리는 폐쇄된 방 안에서 각자의 리듬을 가진 목소리와 만난다. 확실히 스크린을 통해 바라보는 리듬은 관객의 상상력을 높여준다. 영화관이 아니고서는 느낄 수 없는 질감이 형성된다. 레오폴드 쉬르바주의 말처럼, 형상의 리드미컬한 움직임은 예술의 필수요소이다. 이미지에 덧입힌 운율이 영화를 예술로 만든다.


젠데이아 콜먼의 목소리로 시작되는 영화 <듄>은 또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관객 누구라도 이 작품이 철학적이란 사실은 인정할 것이다. 한데 그것뿐일까. 식민주의와 생태학적 불안, 전쟁과 구원 사이에서 이 작품은 서성인다. 주인공은 예언 속의 왕자로, 그는 우주를 구원할 운명을 타고났다. 어디선가 들어본 플롯이다. 아기 예수의 운명! 하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를 <듄>은 들려주지 않는다.
만일 이 영화를 종교적이라 느끼더라도, 원형신화의 탓은 아니다. 예수 플롯은 다양하게 줄곧 변형되었다. 이번 경우의 영적 원인은 극 전반을 장악하는 고요한 분위기에 있다. 흐릿한 황홀의 상태에서 관객은 제각각의 상념을 끄집어낸다. 그렇게 하나의 이야기에 담긴 가능성은 확대된다. 처음에 관객을 끌어들이는 것은 스토리이지만, 이후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점은 <하우스 오브 구찌>도 마찬가지다.
예상외로 <하우스 오브 구찌>의 이야기는 덜 반짝거린다. 영화는 레이디 가가가 연기하는 파트리치아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그녀는 구찌 가문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완전한 외부인이다. 파트리치아는 냉정하게 구찌 일가를 들여다본다. 그 곳은 완전히 파편화되어 있다. 언뜻 모든 이가 얽힌 듯 보이지만, 사실은 쪼개져 있다. 어느 누구도 다른 이를 구속하지 않는다. 스토리는 마치 퍼레이드를 하듯, 그저 반전 없이 흘러간다. 긴장감도, 속도감도 없다. 슈즈와 스카프, 장신구…, 공허한 명품이 공간을 떠돈다.
감독 리들리 스콧이 바라는 것은 플롯이 주는 즐거움이 아니다. 패션 세계의 원시성을 드러내려고 그는 소가 뛰노는 목장을 섭외했다. 그리고 “난 장식하러 왔다”고 떠드는 텍사스 출신 디자이너를 투입했다. 프레임의 운율과 몽타주의 하모니, 어쩌면 리듬 자체가 영화의 모티프가 된다. 비록 메시지 전달에는 실패했지만, <하우스 오브 구찌>는 리듬감 있는 퇴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태초에 영화는 사실주의의 제왕이었다. 그렇지만 몽타주를 통해 시간과 결합했다. 우리는 간혹 지속시간을 감각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1분 미만의 영상, 그리고 3시간에 달하는 긴 길이의 영상물이 각각 다른 플랫폼에서 유행한다. 이들은 현실의 모양새를 드러내는 리듬이 된다.
숏폼 콘텐츠가 유행하는 현시점에, 영화가 길어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극장용 영상은 스마트폰의 영상과 애초에 목표가 다르다. 이들은 서로 다른 극단의 취향들을 끌어안는다. 이제, 러닝타임이 영화의 조건이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분명히 어떤 영화는 시간이 흘러가는 감각을 경험하게 만든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버려둔다. 우리는 시간의 지각을 통해 이야기가 야기하는 감정을 얻는다. 이것을 즐길지 여부는 순전히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시간의 영화는 사물의 흐름을 포착해낸다. 그리고 시간의 가치를 표현한다. 길어진 러닝타임의 영화가 만들어내는 리듬은 그 자체로 인식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현대 영화가 말하는 시간의 ‘체험’이고 ‘몰입’이다. 긴 영화는 정해진 법칙이 아니라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 시네마는 그 4차원의 고지를 넘고 있는 중이다. 글 / 이지현(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