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usic

휴가를 위한 플레이리스트

2023.05.15김은희

여정의 시작은 공명에서부터, 이용재 작가가 고른 12곡.

3년 4개월 만에 코로나19로 인한 국제적 공중보건 비상사태가 해제 되었고, 나도 3년 6개월 만의 휴가를 준비 중이다. 거창할 건 없고 한적한 도시로 3박 4일 다녀올 예정이다. 짐은 최대한 간단하게 꾸린 가운데 영어 소설 페이퍼백과 플레이리스트를 챙겨간다. 30대에 여행을 많이 다니면서 자연스레 플레이리스트를 짜거나 특정 음반을 집중적으로 듣게 되었다. 사운드트랙 삼아 여행의 기억을 더 잘 간직할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정말 오랜만의 휴가를 위해 짠 플레이리스트 이야기를 해보자. 

1.Alfred Brendel – ‘Schubert: Piano Sonata in B Flat, D.960’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계획하는데 막상 떠날라치면 관성 탓에 짜증이 나고 몸이 움직여지지 않을 때가 있다. 짐 싸기고 뭐고 모두 귀찮고 번거롭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럴 때 알프레드 브렌델의 슈베르트를 듣는다. 다른 작곡가는 모르겠지만 슈베르트만큼은 브렌델의 연주가 좋다. 그의 손길을 통해 곡의 주제가 찬찬히 펼쳐지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천천히 돌아선다.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많고 여행은 그 일부를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니 잘 준비해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2.The Cardigans – ‘Carnival’

약 20년 전, 내가 살았던 애틀랜타와 인천공항은 직항기로 15시간 30분 거리였다. 그렇기에 비행은 참으로 거창하고도 지겨운 일이었다. 게다가 애틀랜타 공항은 복잡하고도 불친절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비행기 탑승구까지 이르기가 별도의 지난한 여정이었기에 도착하면 나만의 의식을 치렀다. 일단 근처 바에서 맥주를 한잔 마시고, 약간 알딸딸한 채로 자리에 앉아 비행기가 이륙할 때까지 이 곡을 들었다. 전주의 오르간과 따뜻한 음색의 기타, 그리고 곧 치고 들어오는 니나 페르손의 “I will never know, you will never show / Come on and love me now”의 보컬이 주는 위안이 좋았다. 서너 번쯤 되풀이해 듣다 보면 까무룩 잠들었다가 이륙 후 깨곤 했다.

3. Ride – ‘In A Different Place’

3년 6개월 전 마지막 휴가가 바로 라이드의 공연을 보기 위한 도쿄행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밴드이기에 여행 플레이리스트에서 빠지지 않는 가운데, 이번 휴가에는 왠지 이 곡이 정서에 맞는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사랑을 곱씹는 가사며 쓸쓸함을 휴가에서 느끼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왠지 느낌이 그렇다. 

4. 로지(路地)- ‘君はボタニカル(너는 보태니컬)’

로지는 바로 직전 휴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밴드다. 나는 2007년부터 일본 여행을 가면 타워 레코드에 들러 무작위로 음반을 사는 충동 구매 의식을 치르고 있다. 재킷 디자인에 끌리거나 청음기에서 잠깐 들었는데 마음에 들거나 한다면 한두 장쯤 집어 들고 온다. 충동 구매치고 거의 실패한 적이 없는 가운데, 로지는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에 드는 뮤지션이다. 이름(‘골목길’)에 걸맞게 일본의 어느 골목길을 걷고 있을 때 듣기 좋은, 컬리지록풍의 밴드다. 

5. lamp- ‘ラブレター(러브레터)’

로지를 들었으면 다음 곡으로는 꼭 램프를 들어야만 할 것 같다. 아주 비슷한 느낌은 아니지만 연결시켜 놓으면 꽤 그럴듯하다. 전주도 없이 바로 치고 들어오는 가사 “차가운 파도가 온통 쓸고 간 모래 위에 쓴 러브레터 / 눈 내리는 12월의 어느 날, 두 사람은 겨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지”도 좋고, 빠르지도 않고 서정적이지만 그 뒤를 받쳐주는 역동적인 베이스라인(과 막판의 솔로)도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다. 새 앨범 소식을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다.

6. Sun Kil Moon – ‘Third and Seneca’

곡의 제목인 ‘3번가와 세네카 거리’의 교차점은 시애틀에 있다. 지도를 찾아보면 렘 콜하스가 설계한 시애틀 중앙도서관 바로 옆, 기억을 더듬어보니 가본 적이 있다. 연말이었고 시애틀의 겨울답게 우중충했고 비가 흩뿌리고 있었다. 지금은 술주정뱅이 아저씨의 신세 한탄 같은 노래만 줄곧 내놓고 있지만 10년쯤 전의 마크 코즐렉은 떠도는 음악가의 경험을 아름다운 선율에 담아 여행할 때 정말 듣기 좋은 곡들을 선사했다. 그 정점에 있었던 곡. 

7. Hania Rani – ‘On Giacometti: A live performance at Atelier in Stamp’

2003년 여름,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미술관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자코메티의 조소를 함께 보았다. 그리고 내 기억에는 후자가 항상 더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다. 그렇기에 요즘 가장 많이 들은 하니아 라니의 연주 가운데서도 자코메티 다큐멘터리 사운드트랙을 챙긴다. 유튜브의 몇몇 실황 영상으로 감동을 준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하니아 라니는 되풀이되는 선율 속에서 필립 글래스의 느낌을 풍긴다. 이 앨범은 스위스에 있는 자코메티의 아틀리에에서 실황 녹음했다. 마음이 가장 느긋할 휴가 2일 차의 오후, 커피숍에서 뜨개를 하며 듣고 싶은 음반이다.

8. Men I Trust – ‘Seven(Garage Session)’

최근 내한 공연도 한 퀘벡의 밴드 멘 아이 트러스트는 코로나로 투어를 할 수 없게 되자 자신들의 연습실인 창고에서 실황을 연주 및 녹음했다. 원래도 곡들이 좋았지만 상황에 맞는 절제된 연주 등이 맞물려 이 앨범은 ‘코로나 시대의 OST’ 같은 인상으로 길이 남게 됐다. 모든 곡이 좋지만, 분위기를 잘 잡아주는 베이스라인 위로 조용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솔로가 인상적인 ‘세븐’을 선택했다. 감정은 이렇게 고조시키는 것이다.

9. Diiv, ‘When You Sleep(Live at The Murmrr Theatre)’

잠이 항상 나에게는 큰일인데 그나마 여행을 가면 좀 나아진다. 아무것도 없는 휑뎅그렁한 숙박 시설일 수록 잠이 잘 온다. 그런 여건만으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면 다이브 Diiv를 들으면 된다. 실제로 집에서도 잠이 오지 않으면 즐겨 듣는 이들의 2022년 실황 앨범에서는 슈게이즈의 고전인 마이 블러드 밸런타인의 ‘웬 유 슬립’ 리메이크가 가장 좋다. 곡 제목에도 ‘잠’이 들어가 있으니 수면에 도움이 된다. 정말이다.

10. Bon Iver – ‘For Emma’

잘 알려져 있듯 본 이베어의 데뷔 앨범 <For Emma, Forever Ago(2007)>는 고립의 산물이다. 음악도 건강도 아무것도 풀리지 않았던 20대 후반의 어느 겨울, 저스틴 버논은 20시간 가까이 차를 몰고 고향 위스콘신의 외딴 동네에 들어가 자신을 고립시킨다. 아버지의 사냥 오두막에서 하루에 14시간씩 작업을 한 결과가 바로 이 앨범이다. 그렇기에 외로움이 뚝뚝 묻어나는 곡들을 혼자 떠나는 여행의 사운드트랙으로 삼는 건 좀 너무한가 싶기도 하지만, 고립이 두려우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믿는다. 나에게 여행은 아는 고립의 상태에서 모르는 고립의 상태로 떠나는 여정이기도 하다.

11. William Tyler, ‘Highway Anxiety’

고립을 말하려면 고속도로도 이야기해야 한다. 규모가 작은 땅덩어리에서 고속도로는 이곳과 저곳을 이어주는 수단에 불과할 수 있다. 하지만 땅덩어리의 규모가 커지면 고속도로 자체가 고립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끝없는 길 위에 똑같은 풍광이 몇 시간씩 펼쳐지는 고속도로를 하루에 12시간쯤 운전하고 나면 누구라도 말수가 적은 사람으로 거듭날 것이다. 모든 게 너무 덧없이 느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고속도로가 그렇고, 그런 고속도로의 느낌을 담은 이 곡이라면 당신의 여정에서 감정의 북극성 역할을 능히 해낼 것이다.

12. Fishmans, ‘Long Season’

집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대합실에서 나는 이 곡을 들을 것이다. 가방에는 공항 매점에서 산 잡다한 주전부리가 담겨 있을 것이다. 1998년 12월 28일에 열린 피쉬만즈의 마지막 실황 <남자들의 이별>에서 ‘롱 시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주되고, 불과 4개월 뒤 보컬과 기타를 맡은 사토 신지가 세상을 떠난다. 실황 영상을 보고 있노라면 그가 생전 마지막으로 남긴 곡이 이것이라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물론 요절은 슬프디슬프지만.) 흥얼거리는 그 노래는 뭐야? 떠오르는 게 뭐야? 가사 두 구절을 선문답처럼 되뇌며 나는 다시 집으로 향할 것이다. 모르는 고립에서 다시 친숙한 고립으로.

해당 칼럼에서 언급된 총 12곡의 노래들은 저자의 유튜브 플레이리스트에서 재생할 수 있습니다.

글 / 이용재(<식탁에서 듣는 음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