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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미식의 세계화, 서비스는요?

2024.03.14김은희

한국 미식을 향한 관심이 국내외로 넓어져 가는 가운데 식사라는 총체적인 경험을 완성하는 궁극의 한 조각, 서비스라는 퍼포먼스는 어떠한가?

글 / 이용재(음식평론가)

최근 도산공원 근처에서 저녁을 먹었다. 손님 접대를 위한 자리였고, 주요리의 선택지가 꽤 다양해 고른 이탤리언 레스토랑이었다. 여전히 제철도 무엇도 고려하지 않은 소안심과 양갈비가 전부인 레스토랑이 대다수인 현실에서, 폭찹에 닭고기, 생선까지 담긴 메뉴가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메뉴에 비해 실제 음식은 매력적이지 않았다. 특히 기대했던 주요리는 최악이었다. ‘봉골레 소스의 가자미’였는데, 생물이 아닌 게 분명한 생선살에서 희미하게 암모니아의 느낌이 났다. 입에 넣으니 탄력도 없이 물크러지고 흩어져, 나는 일행에게 그만 먹고 주방으로 돌려보내자고 이야기했다.

뭐가 문제였느냐고? 한마디로 음식이 음식 같지 않았다.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팩시밀리, 즉 복제물이랄까. 사람이 먹는다는 사실에 대한 의식보다 그저 음식처럼 보이는 무엇인가를 흉내 내 완성하려는 의지가 물질로 빚어진 결과물이었다. 요리들은 한결같이 사진발이 그럭저럭 받을 모형 같았다. 디저트까지 마음 없음의 행렬이 쭉 이어진 가운데 서비스가 잔잔한 불만족의 불길에 기름을 끼얹었다. 식사를 빨리 끝내도록 유도한다는 느낌이었다. 단품으로만 이루어진 메뉴에서 코스처럼 먹고자 주문했는데, 요리가 꽤 많이 남았음에도 다음 차례가 식탁에 등장했다. 와인이 채워지는 타이밍도 확실히 한두 박자 빨랐다. 결국 식사는 요리의 가짓수와 술에 따라 예상한 시간에 비해 훨씬 더 빨리 끝났다. 느긋하게 먹고 마시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려던 바람은 상당 부분 채워지지 않았다. 홀이 보이는 방향으로 앉아서 식사를 한 일행은 직원들의 퇴근 행렬을 보았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스태프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레스토랑을 떠났다. 왜 이런 걸까. 솔직히 말하자면 음식은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좋지 않았지만 오래 곱씹지는 않게 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서비스는 이야기가 꽤 달랐다.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또 시간이 적당히 지난 지금까지도 곱씹게 만들었다. 인과관계를 이해하고 또 헤아리고 싶었다.

짚이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우리는 불경기를 겪고 있다. 그럴 때 가장 영향을 빨리 또 많이 받는 분야가 파인 다이닝이다. 잉여 가운데서도 잉여이니 그럴 수밖에 없다.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해외여행이 막히면서 국내, 특히 파인 다이닝으로 몰렸던 수요와 돈줄도 이제는 말랐다고 보는 게 맞다. 실제로 작년 11월부터 매체에 “플렉스 소비 끝났다”라는 기사가 등장했다. 대상은 골프와 파인 다이닝, 더불어 레스토랑의 폐업 소식도 들려왔다. 미쉐린 별을 받은 곳조차 문을 닫고야 말았다. 사회 및 경제적 여건이 이렇다 보니 현재 영업하는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들이 기름 잘 친 기계처럼 돌아가길 바라는 게 무리일 수 있다. 특히 서비스라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사람과 직접 대면하며 해야 하는 일이니 적당히 북적대기도 하고 간간이 대화도 오가야 좀 더 재미있게 일할 수 있다. 요즘의 여건에서는 그런 상황이 아예 만들어지지 않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실제로 내가 식사를 한 그날 저녁은 평일이라는 걸 감안하더라도 썰렁했다. 넓은 홀의 사 분의 일만 채워졌을 뿐이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자리를 채운 객들도 신통치 않아 보였다. 내 옆의 젊은이들은 파스타에 콜라를 시켜놓고 앉아 있었다. ‘여전히 그렇구나.’ 한참 리뷰를 열심히 한 시절, 레스토랑이 이문을 낼 수 있도록 제발 주류를 비롯한 음료를 시키자고 글을 썼다가 엄청나게 욕을 먹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나마 콜라라도 시킨 건 다행이라 보아야 할까? 이런 분위기 속, 나는 스태프의 제스처에서 체념을 읽었다. 손님도 없고 재미도 없으니 신이 날 리가 없겠지. 그렇다고 요식업계가 금전적인 보상에 후한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올해는 모든 악재가 어우러져 최악일 거라는 전망이 야속하게도 부지런히 나오고 있다. 오른 물가에 맞물려 소비 침체가 계속되니 외식이 외면받고, 이는 결국 업계에 인건비 부담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스태프들이 방문객의 식사 도중에 줄줄이 퇴근한 것도 마지못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장사가 안 되는데 홀의 사 분의 일을 간신히 채운 객들을 위해 많은 인력을 남겨두기가 부담스러운 것이다. 남아 있는 스태프마저 다들 빨리 먹고 집에 가주었으면 하는 심정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어쩌면 손님 접대에 파인 다이닝을 굳이 고른 게 실수일 수도 있다.

현실이 이렇지 않더라도 사실 서비스는 많이 어렵다. 어찌 보면 음식보다 더 어려운 게 서비스라고 나는 믿는다. 셰프는 주방에서 음식으로 손님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스태프는 반드시 대면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음식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스태프의 퍼포먼스에 따라 식사라는 총체적인 경험이 좌지우지될 수 있다.

실제로 괜찮거나 아슬아슬한 음식이 좋지 않은 서비스와 어우러져 경험이 저하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체험했다. 예로 많은 이가 한국 파인 다이닝의 최고라 꼽을 어느 레스토랑에서는 스태프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외면하고 주방으로 도망쳤다. 테이블로 다가와 무엇이 필요하느냐고 물어봐도 모자랄 판국에 도망치다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좋은 스태프의 덕목으로 참 많은 것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중 으뜸은 주의력 Attentiveness이다. 홀을 누비고 다니면서 객들을 살펴, 드러내놓고 호출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이다. 의외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아주 은밀하고 조용하게 처리되어야만 할 객의 요구가 꽤 많기 때문에 주의력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처럼 도망치는 스태프도 겪어보았다.

질이 높다고는 할 수 없는 서비스를 왜 겪게 되는 걸까? 한마디로 아직도 시간이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인 다이닝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이가 그렇지 않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과 별개로 낯선 문화다. 오히려 음식이라면 차라리 나을 수 있다. 앞서 말했듯 대면 서비스가 아니니 일거수일투족이 읽힐 이유도 없고 빠른 학습을 통해 복제와 응용도 가능하다. 하지만 서비스는 다르다. 발가벗는 건 아니지만 나를 많은 사람 앞에 노출시키며 하는 일이다. 따라서 자세와 행동 등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꾸준한 경험이 필요한데 우리가 파인 다이닝과 그에 걸맞은 접객을 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30년이라 말하면 충분할까? 축적되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이다. 게다가 한식은 아직까지도 식사는 물론 서비스의 형식 면에서도 바람직한 선례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파인 다이닝을 비롯한 요식업계의 노동 조건 또한 감안해야 한다.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 갈 때마다 주방의 많은 젊은 요리사들을 보면 고민이 많아진다. 과연 이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으며 일하고 있을까? 보장 없는 미래의 꿈과 희망을 담보로 고생만 하는 것은 아닐까? 스태프들이라고 다를 이유가 굳이 없다. 소위 ‘젠지’ 세대에게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감내하며 좋은 서비스를 제공하라 요구하는 게 무리일 수 있다.

이렇기에 나는 미쉐린 가이드가 한국에 너무 일찍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닐까, 아직도 생각한다. 좋은 파인 다이닝 문화가 습관과 태도처럼 자리 잡기까지 우리에게는 과제가 많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식재료의 질과 다양성도, 많은 이의 믿음이나 바람과 달리 떨어진다. 그런데 여러 이유로 미쉐린이 자리를 잡아버리면, 실무자는 이제 이루었다고, 어느 경지를 지났노라고 믿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그저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앱으로 예약해 파인 다이닝을 찾아가는 객에게 현실은 솔직히 그렇지 않다. 이 많은 이유를 헤아리고 선해 善解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서비스 탓에 만족스럽지 못한 식사를 경험하게 된다. 몇몇 소위 ‘국가대표’급 레스토랑이 심지어 국외에서 좋은 성과를 거둔다고 해서 우리가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더 갈 길이 있다는 사실이 딱히 부끄러워야 할 이유도 없다. 아직 우리는 그만큼 시간을 쌓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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