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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레스토랑에 비평이 필요한 이유

2024.01.10전희란

좋은 비평은 미식의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 것이 분명하기에.

글 / 이정윤(다이닝미디어아시아 디렉터)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 한 음식평론가가 음식 전문 월간지를 통해 밍글스에 대한 비평을 공개했을 때 큰 화제가 됐다. ‘MINGLE’이라는 단어는 옥스포드 사전 정의에 따르면 “화학적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물리적 뒤섞음”이기에 레스토랑 이름으로 부적절하다거나, 백김치로 말아낸 푸아그라 토숑은 식감부터 맛까지 “완벽한 실패”라는 등의 언급이 이목을 끌었다. 이 비평은 즉시 폭넓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는 얼마 뒤 다시 한번 개인 웹사이트를 통해 “밍글스의 리뷰가 힘들었던 이유는, 전부를 펼쳐놓아도 부정적인 측면의 균형을 맞춰줄 긍정적 측면이 없었다”라는 극단적인 언급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평론을 지면에 실었던 매거진은 몇 회 이후 아예 코너를 없앴다. 이 논란의 글은 디지털 장례를 치렀는지, 지금은 웹에서 흔적이 사라졌다. 2024년, 여전히 한국에 레스토랑 비평은 없다.

서울뿐 아니라 어느 도시에서나 평론가의 부정적인 리뷰에 셰프들은 예민하다. 그들은 비평가에게 “당신이 요리에 대해 뭘 아나? 생선이라도 한번 제대로 구워본 적 있냐?”며 언성을 높인다. 고든 램지의 스승인 영국의 스타 셰프, 마르코 피에르 화이트는 “평론가가 한 사람의 인생을 가지고 장난칠 때, 나는 여기서 수많은 이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든다”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하지만 평론가의 리뷰가 죄 없는 셰프들을 괴롭히기만 하는 건 아니다. 평론가는 보석 같은 레스토랑을 발굴하거나 대중이 보지 못하는 장점을 명확하게 짚어내며 셰프를 스타덤에 올리기도 하고, 피드백을 통해 셰프와 레스토랑이 개선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한편 독자와 평론가의 관계는 어떤가. 한국에서는 비평은 고사하고 셰프나 레스토랑에 관한 기사가 나오면, “광고 잘 봤습니다”라는 조롱 섞인 반응부터 “저 음식 먹고 배가 부르겠냐”거나 “음식 가지고 장난친다”는 전형적인 분노, 또 “배부른 소리 한다”라는 무관심까지, 이 분야에 관한 이야기를 침묵 속으로 몰아넣는다. 한때 파인 다이닝과 셰프 이야기를 더 심도 있게 다루고 싶다는 내 말에 모 일간지 기자 선배가 “독자들이 항의한다”고 난색을 표했다. 일간지에서 다룰 수 있는 한 끼 식사의 암묵적인 가격 상한선이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미식에 지갑을 여는 소비자는 많아졌지만 그것이 명품 쇼핑백 사진을 올리듯 라이프스타일을 자랑하기 위한 수단인지, 진지하게 음식과 식사 경험의 오묘함에 열정을 가졌기 때문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니 계절에 맞는 맛집 소개 말고, 레스토랑 리뷰 수요는 어쩌면 여전히 지면을 만들기에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재미있는 영화는 꼭 해설과 평론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꼼꼼하게 파헤친 리뷰는 작품에 온전히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연다. 좋은 비평엔 감명받고, 배우고, 깊어지고, 성장하는 사람이 함께한다. 보이지 않던 상징, 감독의 작가주의적 연출 방식 같은 것에 대한 전문적 정보는 경험에 색채와 깊이를 더한다. 그렇다면 레스토랑 경험도 영화처럼 ‘논문 한 편’ 나올 수 있는 대상인가? 물론이다! 지금의 레스토랑은 그냥 음식을 만들어내는 공간이 아니다. 레스토랑 비즈니스에는 그야말로 ‘모든’ 것, 그러니까 셰프의 철학, 지역과 계절성, 직원들의 감정, 문화적 맥락까지 오감을 아우르는 수많은 정보가 응축되어 있다. 그래서 밤새도록 수다를 떨 만큼 콘텐츠가 풍부하다.

그럼 누가 레스토랑과 셰프에 관한 흥미진진한 글을 써줄 것인가? 전문 비평가가 되기 위한 국제적인 자격 시험 같은 것은 없지만, 제대로 된 비평가라면 개인적인 감상을 기록하는 블로거나 인플루언서와는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즐거웠던 순간을 전시하는 콘텐츠는 이미 범람한다. 레스토랑 꽤나 다닌다는 ‘푸디’들의 인스타그램도 개인적인 만족감에 부풀어 “이 레스토랑은 환상적이다!”라고 하면, 그저 팔로워들은 “그렇다면 돈 쓸 만하겠지” 식으로 따라갈 뿐, – 그래야 할 의무도 없지만 – 음식의 좋음과 나쁨을 구분해내는 합리적이고 공정한 평가 기준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담은 창작물에 대해 ‘직업적으로’ 왈가왈부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수준의 전문성과 자격을 갖추는 것이 윤리다. “내 돈 내고 내가 먹었으니, 무슨 말을 하든지 알 바 아니다”라는 말은 비평가가 절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말이다. 그래서 음식을 비평한다는 것은 온갖 진미의 화려함을 음미하는 만족감과는 거리가 멀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는 레스토랑의 호의적인 식사 초대에 응해서도 안 되고, 비판도 서슴지 않기 위해서는 셰프나 오너와 감정적으로 개인적 깊은 유대 관계를 가지기가 상당히 힘들다.(물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내가 힘 있는 사람이니 잘 보이시오’ 같은 건 죄악이다. 푸디 FOODIE라는 단어의 시초가 된 <뉴 욕 타임스>의 푸드 크리틱 게일 그린은 늘 다른 이름으로 예약을 하고, 모자를 쓰는 등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꾸미고 레스토랑에 갔으며, 이름이 다른 신용카드를 쓴 것으로 유명하다. 비평가는 모든 요소를 낱개로 분석하며 평가한 뒤 통합해 하나로 완성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다. 그래서 셰프보다 조리 기술과 테크닉, 식재료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어떤 애호가보다 더 많은 레스토랑을 경험해보아야 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음식 트렌드에 민감해야 한다. 기술적인 이해와 정직함을 바탕으로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을 객관적인 평가로 바꿔내는 감각까지도 필요하다.

누가 있을까? 업계가 좁을수록 전문가들은 모종의 공생 관계를 형성하는데, 전문가들은 셰프나 레스토랑 사업가와 함께 일하며 비즈니스적으로 얽힌 경우가 많다. 좁은 커뮤니티 속에서 눈치 보지 않고 공명정대한 글을 펼칠 사람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생업으로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하루 20시간씩 온몸을 갈아 넣으며 지금도 머리를 쥐어뜯는 이들을 떠올리면 평가 글의 무게감은 더 막중하다.

어쩌면 <미쉐린 가이드>나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등의 평가가 산업과 공생하는 형태로 진화한 레스토랑 비평이 아닌가 싶다. <미쉐린 가이드>는 산업에서 수년간 경력을 갖춘 인력이 오랜 기간 트레이닝을 거쳐 내부적인 평가 기준을 숙지해야 평가원의 자격을 얻는다. 신분을 노출하지 않고 일체 대가나 향응을 받지 않으며 공정하게 레스토랑을 방문해 평가하는데, 당연한 말이지만 그 리포트가 칭찬으로만 가득할 리 없다. 그러나 이들은 상세한 리뷰를 공개하지 않으며 가장 뛰어난 영웅들의 이름만 매번 새롭게 발표한다. 좋은 곳은 더 알리고 발굴해 좋은 이정표의 역할을 수행하되, 누군가의 생계를 좌우할 수 있는 부정적인 리뷰는 침묵하며 시장이 자연스럽게 판단하기를 제안하는 셈이다. 만약 ‘최악’이라는 평가가 정당하다면 고객들도 같은 경험을 할 것이고, 결국 그 레스토랑은 도태될 것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변함없이 사랑받는다면 평가가 경솔하거나 부적절했다는 징표일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서울에 레스토랑 비평은 필요하다. 다양한 비평가가 자신만의 일관되고 독창적인 시선으로 ‘음식’이라는 예술적 창작물에 대해 평가할 수 있어야 파리나 홍콩처럼 한 발 더 미식 도시로 도약할 수 있다. 만약 레스토랑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 사전이 있다면 지금의 사전은 너무 빈약하다. 전형적이고 단순한 감상 말고, 음식의 향, 식감과 온도, 조리 기술에 대한 평가와 서비스, 접객 스타일, 셰프의 고민을 아우르는 따뜻하고 날카로운 단어가 훨씬 많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평가와 셰프들이 긴장감 넘치는 소동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애호가와 업계 종사자 모두의 반박과 옹호까지 평화롭고 조용한 길은 아니겠지만, 그렇기에 더욱 기대된다. 음식을 즐기는 행위도 영화를 보거나 미술관에 가는 것만큼이나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명백한 문화의 갈래다. 영화평론이 영화를 짓밟기 위한 것이 아니듯, 음식평론도 사랑과 관심, 더 나은 무언가에 대한 열망이 빚어내는 황홀한 창작물이다. 다양한 비평가가 자신만의 시선과 색으로 따뜻하게 구워낸, 음식보다 더 맛있을 글이 벌써 기대된다. 지금, 바로 이 시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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