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 동안,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문신으로 자신의 몸을 덮어왔다. 이제 그들은 가능한 한 빠르게 그 문신을 없애고 있다. 우리는 레이저 시술을 받는 환자들, 문신 제거 시장이 호황을 맞으며 바빠진 기술자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이 지워지고 있는 문신 아티스트들을 만나보며, 어떻게 그렇게 영구적이던 것이 이렇게 덧없게 되었는지를 알아본다.

문신 제거에서 가장 끔찍한 부분은 타는 듯한 통증이나 2년에 걸친 장기적인 과정도 있지만, 레이저가 피부에 닿을 때 나는 소리다. 그것은 마치 전기에 감전된 사람을 그린 애니메이션 영상에 배경음으로 쓰일 법한 폭력적이고 부자연스러운 ‘퍽퍽’ 튀는 소리와 ‘지직’거리는 소리를 낸다. 시술 중에는 레이저 광선을 막기 위해 보호 안경을 착용하는 것이 권장되며, 많은 환자들은 공포에 질려 눈을 감는다. 시술 과정을 직접 보지 않는 상태에서 이 소리는 상상력을 자극해 마치 뭔가 끔찍한 훼손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 소리와 느낌은 마치 자신의 몸이 뉴욕 시내 인도 일부가 되어 토치로 부서지는 듯한 경험 같다. 불꽃은 사방으로 튄다.
이런 고통스러운 과정을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자청하고 있다. 개과천선한 전과자, 밀레니얼 아빠, 이미지 쇄신을 원하는 셀러브리티까지. 2월, 전신을 문신 갑옷처럼 덮고 있던 피트 데이비슨이 캠페인 화보에 문신 없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마치 AI가 만들어낸 피트 데이비슨 버전처럼 보였다. 그가 이 모습을 공개하기 전, 지미 팰런 쇼에 출연해 경험담을 털어놓았다. “끔찍해요,” 그가 말했다. “피부 한 겹을 태워내야 해요… 그리고 그걸 12번은 더 해야 해요.”
문신 제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그것이 실제로 피부 한 겹을 불에 태우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오해가 퍼지는 건 탓할 일도 아니다. 그만큼 시술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냄새도 무시할 수 없다. 희미하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뜨거운 생체 조직 냄새다. “그 냄새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들이 놀랍니다. 피부가 타고 있는 줄 알아요.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레이저 문신 제거 체인 잉크리스Inkless의 공동 창립자 제프 가넷이 말한다. “그건 모낭이에요. 불에 탄 머리카락 냄새랑 똑같죠. 하지만 그 냄새가 심리적으로 사람들을 충격에 빠뜨려요. ‘내 살이 타는 냄새야’라고들 하죠.”

실제로 레이저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은 소리나 냄새만큼 원시적이지 않고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하다. 오늘날 문신 제거를 위한 최첨단 장비는 수천만 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피코초 레이저 기계다. ‘피코초’란 잉크를 가열하는 데 걸리는 시간으로, 1조분의 1초를 의미한다. 이 짧은 시간 동안 레이저는 피부 속 색소를 겨냥해 그것이 견디지 못할 온도로 가열한다. 잉크가 없는 피부에 레이저를 쏘면 아무 반응도 일어나지 않는다. 색소가 없기 때문이다. 그 소름 끼치는 ‘퍽퍽’ 소리는 본래 몸 안에 영구적으로 남도록 설계된 잉크 입자가 쪼개지는 소리다. 입자가 충분히 작아지면, 그것은 신체 면역 체계에 의해 처리될 수 있는 크기가 된다.
시술 후 몇 달 동안 건강한 사람의 면역 체계는 이 작은 입자들을 흡수하고, 마치 바이러스나 멍처럼 배출한다. 민감한 피부는 며칠간 따갑고 가려울 수 있으며, 레이저 기술자들은 시술 후 몇 주간은 햇빛을 피하라고 강력히 권장한다. 시간이 지나면 문신은 시술에 대한 기억처럼 서서히 사라진다. 몇 달 뒤, 또다시 시술을 반복해야 한다. 운과 꾸준함이 따른다면 대부분의 문신은 1~2년 안에 사라진다. 그때가 되면 사람들은 다시 깨끗해진 피부를 즐길 수도 있고, 혹은 다시 문신을 시작할 수도 있다.
영구적인 선택을 되돌리기 위해 이토록 고통과 인내를 요구한다는 점은 어떤 의미에선 시적인 정의다. “문신이란 건 본래 중력을 거스르는 일이에요. 우리 몸은 그걸 끊임없이 밖으로 밀어내려 하거든요,” 잉크리스의 레이저 기술자 레베카는 말한다. “그리고 문신을 지우는 일도 그런 자연 법칙을 거스르는 거예요.”

미국 성인 3명 중 1명은 문신이 있다. 최소 8천만 명이다. 이 중 4분의 1은 자신의 문신을 후회한다고 여겨지며, 이는 약 2천만 명 이상의 문신 제거 잠재 고객층을 의미한다. 20대에 문신을 시작한 밀레니얼 세대는, 이제 40대에 접어들면서 방황하던 과거와 괴리감을 느끼고 있다. 아이를 키우고, 주택 대출을 갚고, 술을 끊고, 대장내시경을 받고, 클린 식단을 실천하며 그들은 이제 몸도 이러한 급격한 삶의 변화에 걸맞게 바꾸고 싶어 한다.
동시에, 레이저 기술은 점점 발전하고 접근성도 높아졌다. 초창기 문신 제거는 장비가 거칠고 고통도 심했으며, 일부 주에서는 의사의 시술이 필수였다. 이제는 시술이 더 부드럽고 저렴해졌으며 (작은 문신은 수십만 원, 크고 복잡한 문신은 수백만 원까지) 피부에도 부담이 적다. 금융 시장도 이 흐름에 주목했다. 2021년, 레이저 체인 리무버리Removery는 사모펀드로부터 5천만 달러를 투자받았다. 현재 전 세계 150곳 이상의 지점이 운영 중이다. 이로 인해 문신 제거는 더 이상 특수하거나 잔혹한 시술이 아닌, 6개월에 한 번 치과 스케일링을 받거나 분기마다 보톡스를 맞는 일처럼 평범한 미용 관리로 자리 잡았다. 이 같은 붐 속에서 문신 자체는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 영구적인 상징에서, 바지 통이나 눈썹 모양처럼 유행을 타는 패션 아이템이 된 것이다.

셀러브리티들은 다양한 신체 변형의 유행을 이끌어왔듯, 문신 제거 열풍의 선두에 서 있다. 퍼렐은 거의 20년 전 일부 문신 제거를 시작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위키드’ 홍보 기간 동안, 관찰력 있는 팬들은 아리아나 그란데의 왼팔 바깥쪽에 있던 나비 문신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을 눈치챘다. 2018년, 제미마 커크는 문신 제거 과정을 거침없이 공개했다. 그녀는 레이저 시술 영상과 함께 “인정해. 너 실수했잖아.”라는 글을 트윗했다. 조 크라비츠는 30세가 되던 해, 몇몇 문신을 없애는 과정을 시작했다. “이건 더 이상 내 몸에 있을 필요가 없어요,” 그녀는 2022년 GQ에 말했다.

‘문신 지우기(cleaning up)’는 지난 2월 새로운 정점에 도달했다. 피트 데이비슨이 의류 브랜드 리포메이션(Reformation)의 캠페인에 등장한 것이다. 이 이미지들이 인상적이었던 건 옷 때문이 아니었다. 옷 아래에 감춰진 것이 놀라웠다. 코미디계의 앙팡 테리블이자 스태튼 아일랜드 출신의 고뇌하는 아웃사이더였던 그의 정체성을 형성했던 시그니처 타투들이 사라진 채 등장했기 때문이다. 한때 야생 동물, 중요한 날짜, 행성 등으로 뒤덮였던 그의 팔은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힐러리 클린턴과 빅 션을 암시했던 이미지가 있던 말랐던 다리 역시 깨끗했다. 「소프라노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우탱 클랜 등 대중문화 아이콘들을 박물관처럼 새겨뒀던 그의 상반신도 본래 상태로 돌아가 있었다. 데이비슨은 마치 새로운 성인 세례를 받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술도 끊은 상태였고, 보기 좋게 변해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데이비슨은 지금까지 문신 제거에 약 20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이후 그는 상반신을 드러낸 채 해변에 나타났는데, 캠페인 사진보다 훨씬 많은 문신이 남아 있는 걸 보면, 아직 완전히 제거된 상태는 아닌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신 제거를 원할 경우, 훨씬 비용 효율적인 옵션들을 선택한다. 지역 피부과나 그루폰에서 할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메디컬 스파에서 레이저 시술을 받을 수 있다. 최근에는 전문 체인도 등장했다. 어떤 문신숍은 자체적으로 레이저 기술자를 고용해 원스톱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리무버리 같은 곳은 다양한 패키지 상품이나, 교도소 출신이거나 성매매 피해자, 혹은 인종차별적 상징을 제거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무료 서비스를 제공한다. 정가 기준으로, 작은 문신은 약 8회 시술이 필요하고 평균 600달러가 든다. 크고 컬러가 포함된 문신은 두 배의 시간과 4,000달러 가까운 비용이 들 수 있다.
잉크리스 창립자 가넷(Garnett)은 15년 넘게 문신 제거를 받고 있다. 처음 이 과정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새로운 문신을 받을 때 느끼는 그것과 유사했다고 한다. “에처 스케치(Etch-a-Sketch)를 흔들어 지우는 것처럼, 모든 걸 없애고 완전히 새로 시작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 너무 흥분했어요.”
잉크리스의 공동창립자 로렌조 쿤즈(Lorenzo Kunze)는 단순히 후회하는 고객들로부터 돈을 벌려는 사업가가 아니다. 그는 신체의 영속성에 도전하는 유전자를 지닌 사람이다. 그의 고조할아버지는 최초의 제모 장비를 발명했고, 그의 할머니 헬렌 쿤즈는 미국 최초의 전기분해 제모 교육원을 열었다. 당시의 제모는 원시적이고 고된 과정이었다. 전류를 털 하나하나의 모낭에 흘려보내는 방식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이 일을 했다. “아버지는 과학자처럼 보였어요. 사람 몸 여기저기에서 바늘이 튀어나와 있었죠.”
어린 시절 아버지를 도우며 일할 때, 쿤즈는 처음으로 레이저 문신 제거 기술을 접하게 된다. “그땐 끔찍했어요—피가 나고 흉터도 생기고.” 하지만 19살의 쿤즈는 그 야만적인 기술에 매료되어 빠져들었다. 그 시기는 마침 그가 ‘문신 흑역사 시절’을 통과하던 때이기도 했다. 16세 혹은 17세였던 그는 아버지와 함께 뉴멕시코 타오스를 여행하다가 문신을 새기겠다고 결심했다. 아버지는 부모 동의서에 서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문신을 새기고 싶다면 알겠다. 한 시간 후에 데리러 올게. 엄마만 모르면 된다.” 한 시간 후 돌아온 아버지는 그의 등에 거대한 석조 용 두 마리가 새겨지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등 전체를 한 거야?”

지금으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현재, 쿤즈는 이 등 문신들을 레이저 제거 장기 실험의 샘플로 활용하고 있다. 약 10년 전, 프린스턴 대학의 기계·항공우주공학과 대학원생들이 문신이 새겨진 돼지 피부를 대상으로 현대 레이저 기술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 현재 쿤즈는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삼아 각 용에 서로 다른 종류의 레이저를 쏘아가며 비교 중이다. 한 쪽은 피코세컨드 레이저로 쏘았고, 다른 한 쪽은 아노세컨드 레이저를 사용했다. 7년 넘게 지켜본 결과, 피코세컨드 쪽은 95% 가까이 사라졌고, 아노세컨드 쪽은 더 많이 남아 있었다. “이건 고객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메시지예요. 시술 간 간격을 최대한 길게 두는 게 중요하다는 것.”
쿤즈는 최근 한 투자 그룹이 주최한 디너 파티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사업의 미래가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걸 보았다고 말한다. 누군가가 스틱앤포크 문신 아티스트를 파티의 재미 요소로 고용한 것이다. “다들 백만장자들이에요. 그냥 문신을 새기고 있더라고요. 속으로 생각했죠. ‘명함을 나눠줘야 하나?’” 문신이 너무도 손쉽게 접근 가능해졌다는 사실이 때로는 그를 놀라게 한다고 한다.
쿤즈와 가넷은 거의 실현 가능해진 미래를 꿈꾸고 있다. “문신을 세 번의 시술만으로, 6개월 이내에, 별 고통 없이 제거할 수 있는 날이 오면, 문화 자체가 바뀔 거예요.” 가넷은 열정적으로 말한다. 그는 문신 문화가 유행처럼 순환하는 날을 상상한다. “예를 들어, 개학 첫날을 맞아 새 문신을 하고, NFL 제츠에 드래프트된 선수가 팀 문신을 한껏 새기고, 이적하면 지워버리는 거죠. 그렇게 되면 문신 문화가 완전히 달라질 거예요.” 그는 덧붙인다. “물론, 그런 걸 싫어하는 구식 타투이스트들도 있긴 하죠.”
아, 바로 그 사람들이 생각났다—전통을 지키겠다는 고집으로 문신 파티에 찬물을 끼얹는 구식 타투 순혈주의자들! 이들은 문신이 실제로 무언가를 의미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문신은 영원히 간직할 만한 삶의 경험이 있어야만 새길 수 있는 것이었다. 헬스엔젤 같은 집단의 일원이 아니더라도, 이런 주장엔 일정 부분 공감할 수 있다. 문신의 본질은 바로 영구성 아닌가? 필요할 때마다 없앨 수 있는 문신은 결국 일시적인 스티커와 다를 바 없는 것 아닌가? 아이들 생일 파티에서나 쓰는 그런 종류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투 업계도 조심스럽게 레이저 제거의 세계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실용적이었다. 형편없는 문신을 덮고 새롭게 작업하고자 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타투이스트는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제발, 먼저 그걸 지우고 오세요. 그래야 깨끗한 캔버스에서 작업할 수 있어요.” 문신 제거는 좋은 신체 부위를 다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전국의 많은 타투숍들이 자체 레이저 기술자를 고용하기 시작했고, 다수의 타투이스트들도 ‘다크 사이드’로 넘어가 제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 가장 친한 친구가 타투이스트예요.” 레이저 기술자인 레베카는 말한다. “나는 그 친구의 로빈 같은 존재죠. 만약 친구가 실수하면, 그 사람이 우리 가게로 와서 내가 고쳐줘요.”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몇몇 문신 아티스트들이 기술의 발전으로 자신의 작품이 지워진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게 된다. 스너피Snuffy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는 줄리어스 마굴리스는 머신건 켈리, 피트 데이비슨 같은 유명인들의 문신을 담당한 아티스트다. 그는 단순히 애인 이름을 팔뚝에 새겨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그런 아티스트가 아니다. 그의 데이레이트는 무려 6,000달러며, 비용을 부담스러워하는 고객에게는 비싼 디너나 옷보다 자신의 문신이 “당신과 무덤까지 함께 간다”고 말하곤 한다. 그는 문신을 하기 전 고객의 인생 이야기를 받아 그로부터 초현실적인 맞춤 디자인을 창조한다. 이처럼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그는 한 번 한 디자인은 절대 다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데이비슨의 타투 없는 몸 사진을 봤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와, 잘생겼다’고 생각했죠,”라고 그는 소호의 작업실에서 말한다. 이 스튜디오는 NFL 제츠의 와이드 리시버 앨런 라자드와 함께 쓰는 공간이다. “그가 건강해 보이는 게 그냥 너무 좋았어요. 내 문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잘 지내는 게 중요하죠.” 스너피는 30대 중반으로, 문신의 매력에서 조금은 벗어난 세대다. 그는 이제 문신보다는 순수 미술 프로젝트에 더 집중하고 있고, 자신의 몸에 문신을 더 새기는 일도 흥미를 잃었다. “이제 아무도 내 몸에 문신 안 해요. 문신 많기도 하고요. 이제 그렇게 흥미롭지 않아요.”
그는 고객들이 레이저 제거를 선택하는 걸 탓하지 않는다. 그도 자신의 문신을 몇 개 지웠다. “어깨 전체를 지웠고, 지금은 그 위에 완전히 새로운 게 있죠. 다리도 여러 번 시술받았고요.” 그는 바짓단을 걷어, 예전에 재활센터에서 받은 문신의 자취가 남은 종아리를 보여준다. “그때 날 문신해준 애, 별명이 랜덤라인 롭이에요. 걔가 ‘프리스타일 좀 해도 돼?’ 이러더라고요.”
랜덤라인 롭 같은 애한테 문신을 받지 않았어도, 후회는 누구나 한다. 사진작가 캐롤라인 톰킨스(32세)는 20살 때 다리에 너무 큰 피자 조각 문신을 새겼다. “이제는 제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 같아요,” 그녀는 말한다. “그걸 새겼던 시절의 저도 사랑하지만, 그걸 더 이상 갖지 않을 수 있다는 게 너무 신나요.” 그녀는 지난해 제거를 시작하면서, 사라져가는 피자 조각이 새로운 상상을 열어줬다고 한다. “문신 하나만이 아니라, 여러 개를 지우는 게 어쩌면 더 의미 있겠다 싶었어요. 이 고통을 겪을 거라면, 아예 많이 없애자고 생각했죠.” 그녀는 레이저로 거의 지운 피자 문신을 보여주며 말했다. “아직 문신이 있긴 한데, 이제는 거의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수준이에요. 너무 만족스럽고, 너무 기분이 좋아요.” 그녀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건 마치 나 자신을 다시 디자인할 수 있는 기분이에요.”
영국의 화가이자 뮤지션인 이시 우드(32세)는 10대 때 문신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20대에는 이미 후회를 많이 하고 있었다. 목 뒤의 백조, 섭식장애 다큐멘터리에 대한 애매한 참조, 안쪽 팔뚝에 마르셀 뒤샹 인용구, 바깥쪽 팔에는 이빨 문신까지. “부모님의 기준에서 벗어나 살기 시작하자, 반항심의 달콤함은 금세 무의미해졌어요,” 그녀는 말한다. “집을 떠나 혼자 살게 되고, 미대에 다니게 되자, ‘부모님이 문신을 봤을 때의 충격’은 더 이상 쓸모 없는 감정이 됐죠.” 당시 문신 제거는 병원에서만 가능했고, 과정이 너무 고돼서 중도에 포기했다. 백조를 가리기 위해 머리를 기르는 게 차라리 쉬웠다.
인터넷 인플루언서 카림 라흐마(38세)는 지난 20년간 18개의 문신을 받았다. 작년, 그는 첫 문신과, 그 위를 덮기 위해 새긴 더 크고 못생긴 문신을 지우기로 결심했다. “별로 깊게 고민하지 않았어요. 그냥 ‘슬슬 이걸 해도 되겠다’ 싶었죠. 우체국에 소포 하나 부치는 느낌이랄까요.” 그렇게 첫 문신 제거를 시작하면서, 이 일은 점점 더 큰 의미를 갖기 시작했다. “새 문신은 이제 안 할 것 같아요. 아마 평생 안 하게 될 거예요,” 그는 말한다. “깨끗한 몸으로 무덤에 돌아가겠죠.”진심으로 ‘죽음’이나 ‘인생의 나머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은 드물다. 결혼 서약이 하나고, 문신도 그런 것 중 하나다—적어도 예전에는. 이제 문신 제거는 우리에게 불멸의 감각을 제공한다. “신이 된 것 같아요,”라고 톰킨스는 말한다.
나는 가끔 내 결혼식 영상을 본다. 하객들이 입장하기 직전, 남편이 갑자기 당황한 듯 연단의 반대편으로 자리를 바꾸고, 주례를 부탁한 친구에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입모양만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뻔하다. “캐리는 저쪽에 서야 해. 그래야 하객들 쪽으로 오른쪽 어깨가 안 보이거든.”
문신이 보일까 봐 걱정한 건 결혼 준비 내내 나를 괴롭혔고, 결국 우리가 결혼 서약을 하기 직전까지도 남편은 우리의 관계를 되돌아보거나 서약문을 곱씹기보다 조용히 내 문신을 가릴 방법을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몇 주 동안 이 문제로 얼마나 신경 쓰고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드레스를 바꾸는 걸 고민했고, 문신을 가리기 위한 특수 화장품을 검색했고, 결국 머리를 풀고 가리는 쪽을 택했다. 남편은 그런 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문신을 한 건 2009년 여름, 대학교 4학년을 앞둔 시기였다. 나와 친구들은 필라델피아 외곽의 고향 동네에서 대공황 이후의 후폭풍을 느끼며, 별 의욕도 없이 어차피 될 리 없는 인턴십과 일자리에 지원서를 내고 있었다. 대신 우리는 술을 마시고, 차에서 음악을 크게 틀고, 가족들을 피해 다녔다. 내 인생 최고의 여름이었다. 그 황홀한 몇 달을 기념하기 위해 서로에게 스틱 앤 포크(Stick-and-Poke) 문신을 해주자는 제안이 나왔을 때, 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문신을 갖게 되었다. 오른쪽 견갑골 위에 세 인치 크기의 펜실베이니아 주의 상징인 ‘키스톤(쐐기돌)’을 본뜬 검은색 윤곽선 문신이었다. 꽤 눈에 띄지 않고, 피부에서 차지하는 면적도 작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부모에게 반항하는 마음으로 문신을 새기곤 하지만, 나는 내가 문신을 했다는 사실을 부모님께 말할 용기를 끝내 내지 못했다. 내 몸을 훼손했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님이 보일 1950년대식 충격 반응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다행히 감추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결혼식이 다가올 때까지—무려 13년이 흐른 뒤에도—나는 여전히 그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특별한 날을 커밍아웃의 기회로 삼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나는 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커버 메이크업을 바르고, 머리를 풀고, 왼쪽 어깨가 하객들을 향하도록 서서, 모든 게 잘 되기만을 바랐다. 내 비밀은 그렇게 지켜질 터였다.
그 이후로 나는 문신 자체에 대해 점점 무덤덤해졌다. 기분 좋은 추억을 상징하긴 했지만, 점점 보기 안 좋게 바래졌고, 사람들에게 “이건 하인즈 케첩 로고가 아니다”라고 해명하는 것도 지겨워졌다. 다시 돌아간다면 문신을 안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문신은 영구적인 것. 나는 내 결정을 내렸고, 이제는 어른스럽게 그 결과를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 부모님 앞에서 해변에 가면 겁이 나서 티셔츠 입고 있어야 할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2024년, 결혼식 2년 후이자 딸이 태어난 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산후 우울과 혼란 속에 있었다. 몸도, 정체성도 완전히 다시 만들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체중을 다시 줄이고, 뒤틀린 근육을 회복하고, 산후 탈모를 어떻게든 복구하려 애쓰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문신을 없애보는 건 어떨까?
그리하여 나는 어느 날 오후 맨해튼 미드타운의 한 레이저 시술실에 앉아 스트레스 볼을 꽉 쥐고 있었다. 친절한 레베카가 정성스레 건네준 것이었다. 이건 내 두 번째 문신 제거 시술이었다. 처음 받았던 시술은 형편없이 고른 메드 스파에서 받은 것이었고, 너무나 고통스러운데다 잉크에 거의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해 이걸 계속 해야 하나 회의감이 들 정도였다. 시술 이후 몇 주 동안 나는 친구들에게 ‘출산보다 더 아팠다’고 말했다. 본격적인 시술에 들어가기 전, 나는 레베카에게 나의 낮은 통증 내성을 미리 경고했다. 그녀는 차가운 공기로 등을 마취해주며, 내가 원하면 언제든지 쉬어도 된다고 안심시켰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지잽, 지잽. 즈즈즈잽—.” 단 몇 피코초밖에 지나지 않은 듯한 순간, 레베카가 뜻밖의 말을 했다. “끝났어요.”
1991년, 두 명의 등산객이 티롤 알프스에서 5,300년 된 미라를 우연히 발견했다. ‘외치 더 아이스맨(Ötzi the Iceman)’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미라의 손목과 몸통에는 무려 61개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고, 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신 보유자로 기록되었다. 수천 년이 흐른 지금, 문신의 생애 주기는 우스울 정도로 짧아졌다. 어쩌면 이는 틱톡 세대의 ‘브레인 로팅(두뇌가 녹는)’ 현상과 집중력 저하가 문신에 대한 태도에까지 스며든 결과일지도 모른다. X세대의 문신은 얻기 어려웠고 반항의 상징이었기에 오랫동안 유지되기 마련이었다(문신한 베이비붐 세대는 말할 것도 없다). 레이저 시술사들은 내게 이렇게 설명했다. 35세에서 50세 사이의 사람들은 대개 문신을 10년 정도 유지하다가 후회하는 반면, 처음부터 문신에 대한 사회적 낙인을 거의 겪지 않은 젊은 세대는 문신을 더 빨리 후회한다고—보통 2~3년 안에. 쉽게 얻고, 쉽게 버리는 셈이다.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사람들에게서 문신을 새기고 지우는 양쪽 모두에서 큰 변화가 보인다”고 제프 가넷은 설명한다. 이 젊은 세대는 ‘패치워크’ 스타일의 문신—작고 즉흥적인 선 드로잉 형태의 문신 여러 개를 조각조각 모아놓은 식—에 매력을 느낀다. “한 번에 50달러나 100달러 정도로 새기는 문신이지만, 여러 개를 계속해서 새긴다. 그리고는 마음을 바꾸는 거다. ‘이건 다 남기고, 이것만 지우고 싶어.’”
“문신 하나를 지우겠다고 오면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넌 다음번엔 분명히 더 많이 지우고 싶어질 거야,’”라고 퀸스에 있는 ‘바이 바이 잉크(Bye Bye Ink)’의 소유주 재키 깁스는 말한다. “그리고 역시나, 정말 그렇게 된다. 이미 후회 중인 거다.”
내가 스너피와 이야기를 나눌 때, 그는 문신을 지운 적이 있다는 사실보다도 더 놀라운 얘기를 들려준다. 젊은 세대가 문신을 쉽게 없애려는 경향이 있다면, 나이 든 세대는 문신에 대한 태도를 재고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들은 이제 삶에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더는 보수적인 사회 규범에 얽매일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이다. 스너피의 아버지도 그렇다. 은퇴한 척추외과 의사인 그는 최근 문신을 마구 새기기 시작했다. “그는 더 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야,” 스너피는 말한다. “이제는 내 클라이언트라고.”
“사람은 살아가면서 수많은 낙인을 겪어,” 스너피는 말을 잇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게 되는 거지. ‘이 낙인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거지? 40년 전에 돌아가신 우리 엄마?’ 문신을 지우는 것도 똑같다고 생각해. 그냥 지워버려. 대체 누가 신경 써,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