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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잘했어요

2009.10.21정우영

남자는 여자의 ‘잘한다’를 ‘밝힌다’란 말로 단죄한다. 잘하고 밝히는 여자와 하면서, 남자의 ‘잘한다’는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처음이잖아. 그럴 수 있어.” 어떤 처음을 가리키는지 안다. 수없이 많은 자전거를 타보았더라도, 다른 자전거를 타면 생기는 이물감에 대한 얘기다. 낯선 자전거에 길들어야하는 친화력에 대해 말하는 거다. 자전거는 체인과 스프로킷 사이가 그렇다면 기름을 치는 것만으로 충분한데, 섹스는 그렇지 않다. 볼트와 너트가 공업 재료에 불과한 이유다. 섹스에 대한 은유는 좀 더 복잡해질 필요가 있다.

‘기름’이 여자들이 흥분한 증거라고 믿는, 후기공업사회의 기계공 남자는 그만큼이나 자신의 성기를 맹신한다. 알루미늄 배트만 있으면 홈런 따위는 식은 죽 먹기라고 믿는 남자들이다. 남자는 점수를 내려고 안달한다.‘ 여자가 만족할 때까지’ 쾌락을 안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다. 하지만 그건 고객 서비스의 차원이 아니다. 스스로의 남성성을 확인하는 방식이 그럴 뿐이다. 그녀는 이제 겨우 주춧돌 하나올린 남성성을 허물었다. 아무리 알루미늄배트를 과신하는 남자라도 ‘처음’이 그런 것쯤은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처음’을 명명하고위로까지 건네는 여자라니. ‘처음’이었다.“자위처럼 간편하지 않아서 섹스가 더 좋은 거잖아. 이리 와봐.” 아빠한테 혼나고 엄마 품으로 갈 때처럼 불쌍한 얼굴이 될 뻔했다. 입술이 조금 나왔다.

“귀엽다니까.” 내 입술에 대한 의견이 아니길 바랐다. 그녀의 목을 끌어당기며 품으로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녀를 안고 눕자, 머리카락이 코를 간질였다. 재채기가 나오려다 멈췄다. 방 안의 어둠에 흠이 날 법한 새카만 머리카락이었다. 아름다웠다. 동시에, 밤바다처럼 위험해 보였다.“너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섭지?”그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같이 웃었다. 부정도 긍정이 되고, 긍정도 긍정이 되는 상황에서의 최선이었다. 영화 <엽문>에서, 아내가 무서워서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느냐는 금산조의 도발에, 엽문은 이렇게 답한다.“세상에 여자를 무서워하는 남자는 없소. 여자를 존중하는 남자와 그렇지 않은 남자가 있을 뿐이오.” 거기에 하나를 추가해야겠다.“ 그리고 존중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남자들이 있소.”

웃음이 무기력함의 증거가 됐다. 성기에 사로잡힌 남자를 비웃는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나, 궁지에 몰리자 그들과 같은 꼴이 되었다. 억울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금세 이렇게 딱딱해지는데, 왜 넣으려고만 하면 그렇지?’ 그녀의 몸을 더듬으면서 그러한 ‘성기 중심적인’생각을 했다. 그녀는 젖었고, 이쪽은 딱딱했다.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는 것만큼 쉬운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그녀가 젖어 있어도 삽입은 어려웠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성기는 의지와 반대로 움직였다. 처음 하는 여자와 일사천리로 섹스에 돌입한 경험은 채 반이 되지않는다. 하지만 이 녀석이 이렇게나 몇 번에 걸쳐 말을 듣지 않는 건 처음이다. 정말 무서웠냐고? 모른다. 모르겠다고 대답하면 무서워서 그렇다고 믿을 것 아닌가. 남자들이 그렇지 뭐.

막 키스를 시작한 것 같은데 그녀 스스로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옷을 벗었을 때, 조금 놀랐다. 그녀의 집 현관을 들어서기 전까지 우리가 나눴던 대화는 하토야마 내각에 대한 것이었다. ‘세간의 기준에 빠진 데 없이 완벽한 남자는 인간성과 상관없이 자보고 싶어진다’고 했던가. 또 그녀는 하토야마 내각을 제나라 정권이 바뀐 것처럼 들떠서 얘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고이즈미가 되었다. 한 마디로 밀어붙였다. 여자 가지가지, 섹스 가지가지.

“가만 있어봐, 내가 노크도 안 하고 불쑥 열었나 싶으니까.” 노크란 그녀의 몸이 아래로 내려가는 일을 의미했다. “보일러 수리하러 왔어요. 똑똑똑.” “방은 따뜻한데, 무슨 일이죠?” “온도 조절이 안 된다는 신고가 접수됐어요.” “그럼 빨리 맡은 일을 해주셔야겠네요.” “엥, 아니야. 이렇게 해주는 게 ‘당연’한 건 아니야. 고맙다고 해야지.” 고맙다는 말과 웃음이 함께 튀어나왔다. 현명하고 영리한 여자와의 섹스. 오늘 밤이 썩 행복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러나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입에서는 웃음소리 대신 다른 게 튀어나오고 있었다. 흥분한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기 전에이미 그녀는 위에 있었다. 남자는 54년 만에 정권 교체를 이룬 정당대표처럼 기뻤다. “천천히, 천천히.”

그러나, 정권 교체 이후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정권을 잡은 게 모든 걸 마음대로 하라는 뜻일 수는 없었다. 야당은 정권을 견제했다.하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보복도 아니었고, 권력을 향한 단순 간섭 같은 말을 보탠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세 가지 자세를 원한다는 말은 했다. 그래야 더‘깊이’들어간다며. 그녀는 너무 잘 알았다. 하나의 목적 아래서 그녀는 부드러웠다. 그 밖에, 말로 이것저것을 요구하고 확인한 건 아니었다. 말이 빠진 침대 위에서 시간은 넋을 놓았다.문득 침대 좌우로 늘어져 있는 둘 사이에는 시간의 전령, 음악만 빠져있다는 걸 자각한 게 언제인지는 모른다.

“음악 틀어줘. ‘스트레인저스 인 더 나이트’ 듣고 싶어.” “그거 말고, 프랭크 시나트라 다른 거.” “왜?” “또, 이방인이 되면 안 되니까.” 연인이 된 직후에나 들을 수 있는 낭만적인 말을 하는 건 그녀가 ‘남자한테 잘해서’ 일까, ‘스스로에게 솔직해서’일까. 연애든 섹스든, 능숙한 여자에게는 언제나 팜므 파탈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여자가 잘하다는 화제는 남자들 사이에서 오르내리지 않는다. 섹스나 연애나 이성의 일이 아니라면서 이미 천박한 결론을 갖고 있다. 내가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여자의 ‘색기’때문이며, 그건 나쁜 거다. 의사를 통해 내려야 할 결론을 무속인을 통해 내리고 있는 거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건 다르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 말하는건 금지되어 있다. 이 매력적인 여자에게 뻗친 한 가닥의심을 한숨이 덮어버렸다. 둘 사이에 빠진 음악을 가로질러 가서 그녀를 안았다.

“이제야 네가 좀 무서워. 너무 부드러워서 무서워.” 멍청한 말이었지만, 공포 영화처럼 무섭다는 뜻은 아니었다. 영화는 실제가 아니다. 실존하지만, 정체가 모호한 대상이 가장 무섭다. 그러나, 온기는 모호하지 않다. 그녀의 정체는 모호하지만, 온기는 뚜렷하다. 베개 맡이라서 할 수 있는 어리광 섞인 말이었다. “무슨 소리야?” “섹스 말이야. 너무 좋았다고. 무슨 카마수트라에 밑줄 그어가며 공부라도 했니?” “남자애들이 주도하는 섹스가 싫고 무서워서 적극적으로 해온거지 뭐. 그런 게 무슨 소용이니.” 그녀가 말하는 무서움이 공포 영화에서의 무서움이었다.“사실 좀 ‘기술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어.” “어떤 부분이?” “글쎄.” “기술적인 게 있긴 해. 이를테면, 여자들은 긴장하면 다리에 힘이 들어가거든. 그렇게 하면 남자도 힘들고 경직돼. 하지만 또 다리는 적당히 모아줘야 돼. 그래야 ‘거기’에 압력이 들어가서 더 기분이 좋거든. 나는 ‘들어오는’걸 좋아하는 타입이라 그렇게 해. 하지만 남자애들도 좋아하더라고. 경험에서 나오는 기술이랄까.”

무턱대고 솟아오르는 성기를 가진 남자에게도 스스로의 의도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기술’이란 게 있을까 싶었다. 스스로의 능력만을 지나치게 과신하는 건 기술이 없다는 반증이 아닐까. 성기가 크다고 믿으며, 체력을 자부하며, 여자의 ‘물’과 ‘신음’을 흥분한 증거라고 뿌듯해하는, 자위 같은 섹스에는 없는 그 기술 말이다. 기술은 배우려는 자세, 겸손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논어의 글자가 아니라 현실에서 읽히는 경우였다. 요미우리의 이승엽은 2군에 내려가서 시키지도 않은 후배의 미트를 닦아주는 훈훈한 미담을 남기는 남자다. 상대방에게서 꼭 뭔가를 배우지 않더라도 그는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는 희생을 통해 다른 사람의 신임을 얻어왔다. 완벽한 인간이 아니므로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이승엽의 기술은 그렇게 쌓여 왔다. 그러나 겸손은 누군가에게 탐나는 능력이었던 적이 없다. 겸손은 남자의 성기처럼 눈에 잘 띄는 물건이 아니었다. 매혹보다는 하품에 가깝다.

기술도 없고, 겸손하지도 않은 남자의 성기는 이승엽을 생각하면서도 커졌다. 또, 하고 싶었다. 이번에는 이쪽에서 노크를 시작했다. 문을 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잘해주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차서 집요하게 노크했다. 그러자 마침내 집주인이 답했다.“너, 잘한다?” 도장 받을 공책이라도 내밀어야 할 것 같았다.

    에디터
    정우영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Kim Eun J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