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당신이 그렇게 똑똑해?

2011.01.27이충걸

E.L.세상엔 도대체 안 똑똑한 사람이 없었다!

질문 : 2억 년 동안 지속되던 빙하기가 BC 1만 년쯤 끝났지만, 작은 빙하기는 경련하듯 지속되었습니다. 날씨가 하도 변하다 보니 사람들은 일정한 패턴에 기댈 수도 없었습니다. 어떤 동물이 위험하거나 사냥할 만한지, 어떤 식물이 유독하거나 먹을 수 있는지 예측할 수도 없었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을까요?

답 : 사람들이 점점 똑똑해졌기 때문에요….

글쎄, 이런 게 하나마나 한 대답일 수 있겠지… 만… 틀린 답은 아니다. 12월 초에 트위터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알게 된 거지만, 세상엔 도대체 안 똑똑한 사람이 없었다! 트위터는 교감과 대화하는 것일 텐데, 그 집합 속에서는 선택적인 태도, 선禪적인 관조, 규율 대신 융통성도 함께 두드러졌다. 공중 앞에서의 지식이 심오한 척하는 무식과, 웅변 같은 지랄, 통찰 있어 뵈는 제 자랑으로 범벅돼 있다고 해도, 다들 확립된 사회적 틀을 깨진 않았다. 평소 내 앞에선 어리버리, 일 년에 두 마디만 하던 놈이, 저 안에선 바꿔치기한듯 저렇게 간명한 논리와 문화적 섭렵을 뻐길 줄이야. 엊저녁, 곱창과 막창으로 두 겹 목도리를 두르던 아이가, 오늘 아침엔 브라우니가 당긴다며 구라파스러운 척하는 걸 볼 때처럼 웃겼으되, 그건 필시 민감한 급습과 같았다.

사람들이 언제 이렇게 똑똑해진 거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스마트한’ 정사正邪 감각은 누가 가르친 거야? 저 높은 사회적 인식과 칭찬을 불러올 만한 행동양식들은? 새 아이디어와 정보를 얻는 데 친구 아닌 지인들의 역할이 엄청 커서? 그게 또 혁신 전파와 보급, 학제 간의 협력, 공급자와 수요자, 심지어 데이트에까지 영향을 미쳐서? 지식은 기르는 게 아니라 발화하는 것이었나? 나는 순식간에 미개해져선, 초월적이고 따뜻한 어른에서 총체적으로 실패한 작자, 빛나는 존재에서 어두침침한 천덕꾸러기가 된 것 같았다.

지난 세기 동안 사람들의 지능은 분명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머리 안 좋은 사람들이 어떻게 현대사회의 바탕을 만들 수 있었을까? ) 한국만 그런 것도 아니다. 전세계가 점점 빠르게 똑똑해지고 있다. 그러니까 더 좋은 학교 시스템과 환경 때문에? 그런데 머리가 환경 아닌 유전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해도 환경적 요인은 여전히 커다란 이유 아닌가? 환경은 약한 동시에 강할 수도 있는 걸까?

뉴스를 보면 매일이, 빙하기나 슈퍼 화산 폭발 당시만큼 아슬아슬해 보인다. 아님 뭔가 임박해 있거나. 지금이 이런데, 이 후의 몇백 년은 어떨까. 구글이 우리를 바보로 만든다는 생각, 나노 혹은 바이오 기술의 미친 급진성이 종국에는 문명을 완전히 분열시킬 거란 생각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정보와 하이퍼링크가 넘쳐나면서 이젠 더 이상 완화된 상태로 명상할 수 없으며, 모든 관계는 벽과 벽의 대화로 변형되었다는 주장 역시.

하지만 글쎄, 기술의 발전은 이 물리적인 세상에 어떻게 적응할지가 아니라, 문명이 만든 방대한 지식을 어떻게 적용해 나갈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 아닐까? 너무 낙관적인 시나리오인가?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인데도, 20세기 전까진 오직 특권층만 아이디어를 가질 수 있었다. 정신적으로 우월한 치들은 다른 사람들의 환경까지 만들었다. 그러다, 지난 12,000년 동안의 홀로세가 지나고, 생각의 공유와 교류로 만들어진 의식적인 집단이 도래함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곳이 되어가고 있다. 지식을 이해하는 관념과 범위 안에선 이미 실행 중인 것과 마찬가지다.

지식의 왕국엔 한계 없는 지배권이 횡행한다. 누군가의 가치 있는 생각은 모두에게 공유된다. 역설적인 건, 자기의 고유한 문화적 위엄을 방어하고 스스로 검열자가 되는 네트워크 속에선 굳이 똑똑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시빌라이제이션이나 더 심스 같은 게임도 현실 같은 공간을 만들고, 시청률 높은 프로그램일수록 출연자도 다들다글 정신없는 데다 후지기만 하니까.

미래의 유전학 엔지니어링에 대한 지식이 더 확대되면 요즘의 지식 역시 왜소하게 여겨질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너무 많은 정보가 주어졌다는 게 아니라, 그것을 관리하는 도구가 일차원적이라는 데 있다. 하지만, 과다한 정보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는, 웹이 처음 등장했을 때부터 워낙 데시벨이 높았다. 즉, 구글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문제의 시작일 뿐.

그런데, 사람들이 전자 마을을 벗어나 서로 눈앞에서 구체적 촉감으로 마주하고 있을 땐 생각보다 똑똑해 보이지 않는다. 상식 위에 가설을 세우고 실험하는 유동적인 지식이란, 다들 지식이라 여기는 기억력이나 지식의 나열과는 다르다. 똑똑한 것과, 지식을 차용한다는 건 분명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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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