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한국 음식의 역사는 어떻게 조작되는가

2013.08.15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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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이 음식을 먹어야겠다’ 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 처음이 위생이다. 죽거나 탈나지 않을까 따지는 것이다. 두 번째가 영양이다. 몸을 움직이고 유지하는 데 유리한가 판단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쾌락이다. 맛있는 음식인가 하는 것이다. 세 조건만 만족되면 인간은 그 음식을 즐겁게 먹는다. 인간은 수백만 년을 그렇게 살았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음식은 철저하게 상품으로 재편성되어 더 이상 위생, 영양, 쾌락이라는 세 가지 조건에 의해서만 선택되지 않는다. 새로운 상품 가치가 제안된 것이다. 세련된 삶을 사는 인간으로 보일 수 있게 해주는 음식, 신분 상승에 기여할 수 있을 듯한 음식, 전통을 지키는 멋진 현대인이라 느끼게 해주는 음식, 지구 환경을 살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위무를 주는 음식 등등으로 팔리고 있다. 새로운 가치의 제안을 두고 흔히 마케팅이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법이 허용하는 한 어떤 식으로든 상품을 팔 수 있다. 마케팅으로 ‘뻥’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다국적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패스트푸드를 먹으면 세계의 평화와 가족의 행복이 온다고 마케팅을 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가 원래 그런 것이니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최소한의 상식은 지켜야 할 것인데, 참 난감한 마케팅을 접할 때가 많다. 그것도 억척의 상행위를 제어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 등 공공기관에서 그러고들 있다. 전통 또는 향토 음식 이야기다. 이 분야의 마케팅이 워낙 극렬해 조작된 전통에 세뇌된 사람이 많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비빔밥 한식 세계화 사업의 제일 앞에 비빔밥이 있다. 일을 주도하는 것은 한국 정부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썰’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궁중음식설. 조선시대 왕이 점심에 먹는 가벼운 식사로 골동반이란 것이 있는데, 그게 비빔밥의 유래다. 둘째, 임금 몽진 음식설. 나라에 난리가 일어나 왕이 피란을 하였는데, 왕에게 올릴 만한 음식이 없어 밥에 몇 가지 나물을 비벼낸 데서 유래했다. 셋째, 동학혁명설 또는 임진왜란설. 전쟁 중에 그릇이 충분하지 않아 한 그릇에 이것저것 비벼 먹은 데서 유래했다. 넷째, 음복설. 제사를 마치고 나서 상에 놓인 음식으로 비벼 먹은 데서 비롯했다.

각 ‘썰’의 상황을 상상하면 그때 비빔밥을 먹었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비빔밥이 탄생한 것은 아니다. 한국인의 밥상은 밥과 반찬, 그리고 국으로 이루어져 있다. 밥에 반찬을 더하면 비빔밥이고, 국을 말면 국밥이다. 반찬과 국을 따로 차릴 필요 없이 한 그릇의 밥을 간단히 먹을 수 있게 조리한 것이 비빔밥이고 국밥인 것이다. 밥과 반찬이 있으면 자연스레 비벼서도 먹게 되어 있으니 비빔밥이 어느 시점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밥을 지어 먹었을 때부터 비빔밥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불고기와 맥적 한국 대표이니 이것도 ‘썰’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작동하고 있다. 최남선의 < 고사통 >과 중국의 고서 < 수신기 > 등을 인용하며 고구려 시대의 맥적이 그 연원이라 주장하고 있다.

1906년에 나온 최남선의 < 고사통 >에 맥적이 등장한다. 핵심 부분만 옮기면 이렇다. “중국 진나라 때의 책 < 수신기 >를 보면 ‘지금 태시 이래로 이민족의 음식인 강자羌煮와 맥적貊炙을 매우 귀하게 안다. …강羌은 서북쪽의 유목인을 칭하는 것이고, 맥貊은 동북에 있는 부여인과 고구려인을 칭한다. 즉 ,강자는 몽골의 고기 요리이고, 맥적은 우리나라 북쪽에서 수렵생활을 하면서 개발한 고기구이다.’”

하지만 < 수신기 > 앞부분의 핵심 내용을 번역하면 이렇다. “호상胡床, 맥반貊槃은 적족翟族이라는 민족이 쓰는 용기의 이름이고 강자羌煮, 맥자貊炙는 적족이 먹는 음식의 이름이다.”(중국 연변인민출판사 번역본 2007년판 < 수신기 >에서 발췌. 貊炙의 炙는 ‘자’ 또는 ‘적’으로 읽는다.) 맥적은 적족의 음식이라 쓰여 있다. 적족은 한민족과 관련이 없다. 최남선이 민족정신 고취를 위해 원문을 ‘마사지’한 것이다.

불고기는 고기에 양념을 발라 굽는 음식이다. 고기 굽는 일에 대한 근원을 따지자면 호모에렉투스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고, 양념 발라 굽는 것에 대한 연원이면 세계의 거의 모든 민족에게서 발견되는 양념 고기구이와의 연관관계를 따져야 할 것이다.

의령 망개떡 “가야시대에 백제와 적대관계를 해소하고자 서로 혼인을 맺었는데 신부 측인 가야에서 이바지 음식 중 하나로 백제로 보냈다는 최초의 설과,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이 망개잎으로 떡을 싸서 보관, 산속으로 피해 다닐 때 전시식으로 먹었던 것으로 전래되고 있다.” 의령에 가면 망개떡 상징물이 있는데, 그 아래 이런 구절이 쓰여 있다. 근거는 없다. 그냥 누군가 ‘썰’을 푼 것이다. 일본에 망개떡과 똑같은 떡이 있다. 카시와모치かしわもち다. 카시와는 떡갈나무이고, 카시와모치란 떡갈잎으로 싼 떡이라는 뜻이다. 일본은 5월 5일 단오를 양력으로 쇠고 또 이날이 어린이날과 겹치는데, 이때 먹는 절기음식이다. 일본의 일부 지방에는 떡갈나무가 없어 그 대용품으로 망개잎을 쓴다. 이 망개잎으로 싼 떡도 카시와모치라 이른다. 일제강점기에 이 카시와모치가 우리 땅에 이식되었고, 그 흔적은 한반도 여기저기에 존재했다. 의령시장에 망개떡집이 있었고 그 떡집이 어느 때에 유명해지면서 향토음식 대접을 받고 있을 뿐이다. 이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망개떡이 맛없어진다고 여겨서 그러는 것일까.

초당 두부 초당은 강릉에 있는 마을이다. < 홍길동전 >의 저자 허균의 부친 허엽이 한때 이 마을에 살았는데, 그의 호가 초당이다.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썰’이 만들어졌다. 허엽이 이 마을에서 처음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었고(심지어 두부를 팔아 큰돈을 벌었다는 ‘썰’도 있다), 그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가 두부 만드는 ‘잡일’을 했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무리다.

초당동은 논밭이 넓지 않다. 넉넉한 동네가 아니었다. 이런 마을에서는 인력으로 부가가치를 올리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게 일반적이다. 외지에서 콩을 사 두부를 만들어 내다 파는 일을 한 것이다. 1951년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초당동 토박이에 따르면 그때는 두어 집이 두부를 쑤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후 두붓집이 급격히 늘었는데 1954년에 90여 가구가 두부를 만들어 팔았다. 전쟁통에 남자를 잃은 집안의 여자들이 호구지책으로 두부 쑤는 일에 나선 것이다. 초당 두부의 명성(?)은 그때 생긴 것이다. 한국 전쟁으로 탄생한 ‘눈물의 두부’라 하면 그 맛이 달아난다 생각하는가.

사례는 끝이 없다. 한국 음식은 그 유래와 역사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조작되어 있다. 이런 일이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번창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음식에 조작된 전통을 갖다 붙이고 있다. 그래야 소비자의 주머니를 열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조금 다른 것이, 그 조작의 주체로 중앙 또는 지방의 정부가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부의 용역을 받고 스토리를 만드는 이들 역시 공공의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이는 집단의 사람들이라는 것도 문제다. “어떻게든 많이 팔리기만 하면 되는 것 아냐” 하는 천민자본주의가 공공의 영역에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한국 음식 문화계를 슬프게 한다.

    에디터
    글/ 황교익(맛 칼럼니스트)
    일러스트레이션
    김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