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festyle

농부의 물방울

2013.09.26손기은

프랑스 보르도는 농부들이 일군 마을이다. 외할머니 댁 앞마당처럼 소박한 와이너리도, 영화 촬영장같이 으리으리한 성을 쌓은 와이너리도 모두 농부의 집일 뿐이다.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보르도의 포도알. 7월 말이면 포도알이 성장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여물기 시작한다.

아직 다 여물지 않은 보르도의 포도알. 7월 말이면 포도알이 성장을 멈추고 본격적으로 여물기 시작한다.

포도밭이 관광지가 될 수 있을까? 와이너리 방문이 관광으로서 가치가 있을까? 끝도 없이 늘어선 포도나무는 갈대밭처럼 너울거리지도 않고, 꽃밭처럼 화려하지도 않다. 여름엔 해가 미치도록 따갑고, 가을엔 빠르게 수확해야 하는 바쁜 일꾼들만 넘쳐난다. 와인을 시음해볼 수 있는 경험을 꼽는다면, 사실 서울에서 열리는 각종 시음회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미국 나파밸리처럼 호텔과 리조트까지 보태진 놀이공원 같은 곳을 찾아간다면, 그게 과연 포도밭 관광일까? 결국 따지고 보면 남는 건 사람이다. 사람들이 와이너리를 찾는 이유는 포도밭을 일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일주일간의 메독 와이너리 투어를 마칠 때쯤 들었다. 그 사람들에게 거창한 와이너리 철학이나 성공 신화를 듣고 싶은 건 아니다. 매일 포도밭에 나가는 마음에 대해 듣거나 얼굴에 비치는 성취감 같은 것을 보는 일만으로도…. 보르도 북쪽의 메독은 그랑 크뤼 클라세, 크뤼 부르주아, 크뤼 아르티장, 공동 생산자 조합 등 다양한 분류 체계와, 이름만 들어도 혀가 먼저 반응하는 8개의 아펠라시옹이 모여 있는 보물 창고 같은 지역이다. 크고 작은 와이너리가 좁은 길 하나를 경계로 뭉게뭉게 이어져 있고, 이제 막 와이너리를 인수한 새로운 사람과 5대째 와이너리를 이어온 사람이 함께 보르도의 햇살을 공평하게 나눠가며 포도를 키우고 있다. 흔히 메독 와인이라고 하면 샤토 라투르나 샤토 무통 로쉴드 같은 그랑 크뤼 클라세 와인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보다 훨씬 다양한 색깔의 와이너리가 각자의 방식을 유지하며 존재한다.

메독엔 와이너리뿐만 아니라 당연히 오크통을 만드는 회사도 있다. 메독에서 토넬르리 나달리에를 운영하는 크리스틴 나달리에는 성큼성큼 걷는 여장부다. 어설픈 ‘비주’를 하니, 뺨을 꼭 맞대고 입으로 쪽 소리를 내라고 호통부터 친다. 그는 오메독 AOC(아펠라시옹, 원산지 통제 명칭) 와인인 ‘클로 라 보엠’도 만들고 있다. “한 와이너리에서 여러 회사의 오크통에 와인을 숙성시킵니다. 와인과 맞는 잘 맞는 통을 찾으려는 거죠. 그래서 저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와이너리를 매입했어요.” 오크통은 세심하고 다단한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225리터 한 통에 총 28~32개의 참나무 막대가 사용되고, 안쪽을 그을리는 ‘토스트’의 단계는 총 8단계이고, 한 통당 40분이 걸린다. 무엇보다 나이테가 촘촘한 좋은 참나무를 고르는 일이 먼저다. 참나무 한 그루를 베기까지 110~130년이 걸리니 와인 한 병에 어마어마한 시간이 투입되는 셈이다. 나달리에에서는 한 해에 총 6만5천 개의 오크통을 제조하고, 225리터 오크통 하나가 최소 650유로다. 과연 여장부다운 규모다.

메독 지역엔 총 9개의 공동 생산자 조합이 있다. 소규모 포도 재배업자들이 힘을 합쳐 와인 생산 시설을 공동으로 쓰는 일종의 ‘패밀리’다. 그중 ‘그랑 리스트락’은 메독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다양한 토양에서 자라는 여러 품질의 포도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퀄리티가 다양한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가격도 합리적이고요.” 공동 조합의 디렉터 피에르 슈냉이 교장 선생님 같은 얼굴로 꾹꾹 눌러 말했다. 1935년부터 사용한 양조 설비를 설명하다가 작년 지역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소식을 전할 때 엷은 웃음이 번졌다.

크뤼 부르주아는 그랑 크뤼 클라세 와인에 뒤지지 않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속하지 못한 와이너리들이 모여 만든 분류 체계다. 2007년부터는 크뤼 부르주아 내 등급 체계도 폐지했다. AOC 물리스에 위치한 샤토 르 베르디의 마티유 토마는 여동생과 함께 2종의 크리 부르주아 와인을 만들고 있다. “제비꽃 향이 나는 프티 베르도 품종을 다른 와이너리보다 많이 쓰는 편입니다. 강렬한 빛깔도 좋고, 개성이 강해서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메독 지역의 와인은 주로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를 블렌딩하고 프티 베르도나 카베르네 프랑은 10퍼센트 미만으로 쓴다. 마티유 토마는 프티 베르도를 20퍼센트까지 끌어올렸다. 다른 지역에서도 와이너리를 운영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에 토마는 농사일로 까매진 손끝을 부비며 말했다. “네? 다른 곳에서요? 메독이 아니라요?”AOC 메독에 위치한 샤토 생-크리스톨리도 자매가 함께 운영하는 와이너리다. 상드린 에호는 2010년 아버지에게 와이너리를 물려받았고, 아버지를 자신의 직원으로 다시 고용했다. “저는 행정을 맡고 동생은 양조를 책임지는 여걸입니다. 동생은 여자로서 최초로 이 지역 트렉터 몰기 대회에서 1등을 했을 정도예요.” 흰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산들산들 걸어서 시음실로 향했다. 메를로 비중이 높은 향긋한 와인이 여기저기 그림이 걸린 자매의 와이너리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AOC 메독의 또 다른 크뤼 부르주아, 샤토 카스테라는 웅장한 고성이다. 영주를 보호하기 위해 창문조차 숨긴 두툼한 건물엔 이 와이너리의 오랜 역사를 전시해뒀다. 이곳의 커머셜 디렉터인 장-피에르 다르뮈제는 1784년에 수도사가 쓴 고문서에서, 1616년에 발행된 영수증에서 샤토 카스텔라의 흔적을 핀셋처럼 뽑아내 자랑했다. 그 얼굴에 주름은 없었지만 시간은 켜켜이 쌓여 있었다.

크뤼 부르주아에 비하면 크뤼 아르티장은 훨씬 더 작은 규모의 와이너리의 조합을 부르는 체계다. 아르티장이 수공예, 장인을 뜻하는 말이라는 걸 알면 이해가 빨라진다. 제빵이나 축산 등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전통적인 방식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1850년부터 존재한 개념인데, 공식적으로 등급이 인정된 것은 2006년이다. AOC 메독의 크뤼 아르티장인 샤토 오-그라바는 10헥타르 정도의 작은 포도밭을 일구고 있다. 알랭 라노 부부는 양조부터 마케팅까지 모두 책임지고 있다. “수확 철에는 일손이 달려요. 아들과 아들 친구들이 와서 도와주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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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크통 제조 회사인 샤토 카스텔라 토넬르리 나달리에에서 오크통 내부를 ‘토스트’하고 있다. 2 36개의 포도 생산자가 가입한 그랑 리스트락 공동조합의 스테인리스 와인 보관통. 3 샤토 팔머의 오크통 숙성고. 2단으로 쌓으면 총 1400개의 오크통을 보관할 수 있다. 4 병입이 끝난 샤토 블래냥 와인이 출고를 기다리고 있다.

지롱드 강을 따라 늘어선 AOC 마고와 AOC 포이약으로 넘어가면 그랑 크뤼 클라세 와이너리가 나온다. 샤토 피숑 롱 그빌, 샤토 팔머, 샤토 탈보 같은 익숙한 이름만큼이나 으리으리한 건축물도 많다. 젊은 일꾼들이 우르르 몰려 나가고 들어오는 와이너리 한복판에서 샤토 팔머의 기술 디렉터 사브리나 페르네가 말했다. “올해 6월까지는 비도 많이 오고, 날씨도 안 좋았어요.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한다, 하는 규칙은 없어요. 아침마다 포도밭에 나가 확인해야죠. 어려운 선택과 판단의 문제가 매일 이어집니다.” 그랑 크뤼 클라세 2등급 와이너리인 샤토 피숑 롱그빌의 마리-루이즈 쉴러는 화려한 건물을 자랑하며 < 미션 임파서블 >을 찍어도 될 만큼이라고 눙쳤다. “예약하면 여기서 근사한 식사도 할 수 있습니다. 연간 1만 명이 이곳을 둘러보고 갑니다.”

AOC 포이약에 위치한 그랑 크뤼 클라세 5등급 샤토 랭슈 바즈는 4대 째 약 100헥타르 규모로 포도를 키우고 카베르네 소비뇽이 80퍼센트 가까이 되는 힘있는 와인을 생산한다. 장 뤽 로샤 셰프가 보르도 식재료를 세련되게 풀어내는 레스토랑도 운영한다. 이곳에서 추진하는 ‘비니브’라는 개인화된 양조 프로그램도 솔깃하다. 포도밭이 없어도 개인이 입맛대로 와인을 양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연간 180병을 최소 단위로 8천 유로 정도 내면 전문 컨설턴트부터 그래픽 디자이너까지 와인 양조를 도와준다. “한 커플 고객이 연애할 당시 와인을 만들고, 그 다음 해에 결혼하면서 또 만들고, 그 다음엔 아이와 함께 와인을 만들기도 했어요. 와인이란 그런거죠. 비니브VINIV는 앞으로 읽으나 뒤로 읽으나 항상 같은 이름이어서 좋아요. 와인이 꼭 전문 양조가만의 것이 아니라, 거꾸로 소비자가 만드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비니브의 스테픈 볼저 대표가 쉬지 않고 말했다.

메독엔 아무런 분류 체계나 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와이너리도 많다. AOC 물리스의 샤토 모카이유나 AOC 오메독의 샤토 밀 로즈, AOC 포이약의 샤토 줄리아도 자신만의 기준과 생각으로 와인을 만들고 있다. 1.5헥타르밖에 안 되는 작은 포이약 땅에서 와인을 만드는 소피 마르탱은 메독에 있지만 메독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으로 와인을 만든다. “오랜 기간 숙성해야 하는 포이약 스타일보단 바로 마실 수 있는 와인을 만들고 있어요. 작지만 얼마든지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요.” 일주일간 와이너리를 돌아다녔지만, 똑같은 말과 표정을 본 적이 없다. 물론 와인도 그랬다.

1 샤토 밀 로즈2 클로 라 보엠3 샤토 피숑 롱그빌4 샤토 탈보5 샤토 팔머6 샤토 카스텔라

1 샤토 밀 로즈 2 클로 라 보엠 3 샤토 피숑 롱그빌 4 샤토 탈보 5 샤토 팔머 6 샤토 카스텔라

 

 

    에디터
    손기은
    포토그래퍼
    이명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