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속사회>의 저자 엄기호와 대화를 나눴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4월호에 ‘문득,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에 대하여’라는 칼럼이 있었다. 각종 SNS와 홈페이지에서 생각보다 많은 분이 공감했다. 지금은 다른 차원을 논해야 할 것 같다. 4월 16일 이전과 이후의 한국은 다를 테니까. 감정에 대한 문제로 시작하면 좋을 것 같다. 한국에서 느끼는 감정. ‘세월호’라는 이 거대한 사건을 보면서, 한편에 죄책감이 있을 거다. 또 이런 나라에서 살아가는 자신에 대한 연민. 오늘 초점을 맞추고 싶은 건 환멸이다. 사건 이전에 썼던 글이 그렇게 많이 퍼진 거 아닌가? 이미 우리가 이 사회를 환멸하고 있었다는 거다. 그 환멸을 백일하에 완전히 드러낸 사건이 4월 16일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 아닌가 싶다. 어젯밤(5월 8일) 11시 반에 초인종이 울렸다. 택배였다. 초로의 아저씨였는데, 차 안엔 물건이 가득했다. 밤 11시 반이 마지막이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완전히 소진됐다. 그렇다면 소진 이후에 왜 환멸이 오는가. 소진되면서도 우리가 소위 희망이라고 부르는, ‘이렇게 하면 그렇게 될 거야’라는 생각이 있었을 거다. 개인 차원에서는 그걸 기대라고 할 수 있지만, 사회 차원의 그런 희망은 약속이다. 그 약속이 깨졌다. 그러니 개인이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나? 개인의 삶에 대한 기대는 사회가 약속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사회가 내 삶을 약속해줄 수 있다고? 매우 새롭게 들린다. 사실은 당연한 얘기인데. 밤 11시 반까지 택배를 하면 내 자식 더 좋은 것 먹이고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나은 삶을 줄 수 있을 거라는 희망, 그것이 바로 사회적 차원의 약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약속한 적 없다. 너희가 망상을 한 거 아니냐”는 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나오는 방식이다. “수학여행 취소해라, 위약금 물어주겠다” 해놓고 오리발 내밀었다.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사회다. 이걸 사회라고 할 수 있나? 내 기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거라는 약속 자체를 못 믿는 곳에서 어떻게 삶을 견딜 수 있나. 어찌 환멸스럽지 않을 수 있나. 택배 아저씨의 정말 지친 뒷모습, 그리고 나. 이건 사는 게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다. 이제 그걸 너무나 잘 알게 됐다. 지금까지는 환멸을 알지만 그 앞에 ‘그래도’가 붙어 있었다. 이젠 그 ‘그래도’ 마저 박살난 것이다.
정말 박살났나?’ 혼자 의심할 때 누군가 ‘그렇다’고 말해주면 그보다 반가운 게 없다. 그걸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얘기지만.
세월호는 절대 다수의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국의 민낯을 아주 끔찍하게 드러냈다. 인간의 상상력보다 더 비현실적인 것이 현실이라는 말이 있다. 인간의 상상력은 결코 현실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 그 경악을 봤다. 만약 인간의 상상력보다 현실이 더 크다면 이걸 극복할 수 있는 건 없다.
모두의 마음이 한꺼번에 무너졌다. 그래도 일단은 정확하게 직시하는 것이 시작 아닐까? 지금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태기 때문이다. 말에는 여러 가지 기능이 있다.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표현, 분석, 설명 세 가지다. 이 세 가지 중 하나는 해야 하는데 이 슬픔과 고통, 이 황당함과 무기력을 표현할 수 있나? 지금은 현실이 상상력을 압도한 상태, 인간의 상상력이 진 것이기 때문이다. <단속사회>에서 ‘이게 사회냐?’고 물었다. 이게 사회가 아니라는 게 이런 식으로 드러날 줄은 몰랐다. 그럼 뭘까? 약간 문학적으로 설명하면 우리는 지금 산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닌 상태다. 단원고에 자원 봉사를 나갔던 소아정신과 의사가 생존자들을 이렇게 표현했다. “산 사람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의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고 그 경계에서 지금 방황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고통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이 사건을 자각하고 있고 외면하지 않는 한 사실 우리 모두가 그 상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물이 나는데 ‘내가 뭘 했다고 우는 거냐’는 생각이 들었다. 가서 손이라도 붙잡아 드리면 그 때 우는 거지 여기 앉아서 울면 그게 뭐냐는 생각이 들어서 꾹 눌렀다. 말을 잃어버린거다. 정리된 말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이것을 말로 표현하고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다. 이건 말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상상력을, 극단을 뛰어넘는 사건이 눈앞에 펼쳐진 것이기 때문에.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말의 불가능성이다. 그러니까 우리한테 지금 가능한 것 하나는 소리를 내는 것밖에 없다. 그것이 징징거리는 것, 울부짖는 것, 흐느끼는 것이고 또 침묵인 것이다. 모든 것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견디는 것이다. 우리한테 지금 허락된 건 견디는 것이다.
말문이 막히면 울부짖어야 되는 거고 개인적인 차원에서 답을 찾지 못하면 같이 해야 하는 것이고, 그 차원에서 다시 울부짖어야 되는 거 아닌가? 지금은 모든 단계가 다 막혀 있는 것 같다. <단속사회>에서 당신은 ‘곁을 밀치고 편을 강요하는 사회’라는 표현을 썼다. 내가 눈물을 흘리다 옆을 보니 같이 우는 사람이 있고, 둘 혹은 셋이 그렇게 만나게 되는 거다. 이렇게 만나서 같이 울부짖고 소리를 내다 보니 그것이 말이 된다는 거다. 그 말이 공적으로 울려 퍼지는 거다. 이것이 소위 사회라고 하는 것이 연속적으로 흘러갈 때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단속이라는 건 지금 그 마디마디가 다 끊어졌다는 뜻이다.
‘곁’의 최소 단위, 그러니까 소중한 누군가와 둘 혹은 가족만 있어도 위안을 얻을 수 있을 텐데. 여러 가지 층위에서 어려워진 것 같다. ‘곁’이라는 것은 같이 견디는 것이다. 그런데 왜 안 되는가? 그 핵심은 곁에 있는 것조차 너무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 끔찍함을 직간접 체험할 때마다 내가 무너지니까.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 아는 기자 한 명이 자기는 “냉혈한이라서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는데 KBS앞에서 유가족들 시위를 보고 드디어 울었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외면하면서, 또는 견딜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피해 있는 것이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다. 이 못 견디겠다는 것을 다시 견뎌야 한다. 애도는 같이 슬퍼하는 것이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징징거려도 된다. 우린 징징거리기 위해서 만나야 된다. 이 단속을 그렇게 극복해야 한다. SNS에서 ‘공유하기’와 ‘좋아요’와 ‘리트윗’을 통해서 퍼뜨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만나야 되는 거다. 안 미치고 버티려면 그래야 한다.
이렇게 묻겠다. 지금 한국은 중세에 가깝지 않나? 그렇다면 근대는 뭐고 전근대는 뭔가? 한국은 어디에 와 있나? 지금 한국은 근대인 것도 근대가 아닌 것도 아니다. 반근대, 전근대, 탈근대, 근대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우리와 같은 상태인 건가?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 예를 들어보자. 지금, 너무 무능력한 국가 아닌가? 근대 국가의 핵심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다. 너무 무능력해서 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각종 통제를 위한 움직임을 보면 우리 앞에 엄청 강한 국가가 있다. 생명을 돌본다는 측면에서는 ‘이게 국가냐?’ 물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우린 어마어마한 근대 국가를 만나고 있다. 그래서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상태라는 거다. 근대 자체가 항상 분열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 분열성을 은폐하면서 작동하는 게 근대다. 한국은 이 분열적인 근대의 모습을 날것, 민낯으로 눈앞에 그`대로 들이대고 있다.
‘근대의 분열성’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근대 국가는 생명 권력이기 때문에 생명을 돌보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연재해가 터지면 정치인들이 자기 잘못이 아니더라도 내려가서 생명을 구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근대 국가의 처벌이 비공개인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는 것으로 권력을 증명하는 거다. 푸코가 한 유명한 얘기다.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 이게 근대 권력이다. 중세 권력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이었다. 죽이는 걸 통해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근대 권력은 효율성과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늘 누군가를 폐기 처분하는 권력이기도 했다. 바흐만 같은 사람이 얘기하는 한 편에서의 근대는 쓰레기를 끊임없이 양산하는 체재였다. 누군가를 쓰레기라고 지목해서 폐기 처분하니까. 같은 권력이지만 분열돼 있다. 또 다른 한편에는 강력한 통제가 있다. 이런 게 분열적이라는 거다. 한국은 그래도 국가와 민족이라는 걸로 은폐하면서 작동해왔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개인의 삶도 어찌 보면 ‘하면 된다’는 약속 위에 있었지만….
교과서에는 그런 말이 있다. 모두에게 기회가 있고 노력한 만큼 얻을 수 있다는 말.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둘 중 하나의 정신 상태가 된다. 하나는 강박이다. 강박적으로 하는 거다. ‘하면 된다’를 실현하기 위해서. 또 다른 하나는 분열이다. 한다는 것과 되는 것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해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하는 상태를 말하는 건가? 그걸 이미 알기 때문에 우리는 분열적으로 살아간다. 한편에서는 믿고 한편에서는 믿지 않는다. 열심히 하면서도 무기력해진다. 이 분열을 은폐시키는 여러 가지 환상이 우리 사회를 떠받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분열이 다 드러나 있는 상태가 지금의 한국이다. 분열이 분열인 것으로 드러나면 그건 근대가 아니다. 당혹스러울 수밖에.
우리는 끊어졌고, 사는 것이 아니고, 분열됐고, 환멸하고 있다. 이렇게까지 말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참담함도 있다. 인간은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판타지가 작동해야만 사회도 개인도 존재할 수 있다. 지금은 모든 판타지가 깨져버렸다. 환멸하지 않을 수 없다. 기댈 판타지가 없는데 더 이상 그런 판타지 따위는 주지 않겠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한 거다. 정권 차원의 얘기가 아니다. 사회 자체가 꿈꾸지 마라, 우리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하는 거다.
누구라도 모이면 ‘힘들다’는 말로 시작하는 게 그래서일 거다. 하지만 ‘그래도’라 말한다면? 아, 아까 그것도 박살났다고 말했다. ‘나는 이대로 소진되다가 폐기되겠구나.’ 이런 느낌 갖고 있지 않나? ‘소진되는 기간에는 그 어떤 것도 꿈꾸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 말이다. 그럼 우리가 다 끝났나? ‘그래도’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굉장히 낙관적인 게 있다. 왜냐하면 바닥이 드러났고 우리를 기만하고 은폐하던 그 판타지, 그러니까 우리를 꿈꾸게 했던 판타지만 끝장난게 아니라 우리를 기만하던 판타지도 끝장났으니까. 우리만 진 게 아니다. 이 체계도 졌다.
하지만 우리가 좋은 사회라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나? 예시가 없어서 상상할 수 없다는 회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경험하지 않아도 좋은 사회를 상상할 수 있다. 상상력은 인간에게 허락된 가장 강력하고 유일한 힘이다. 그 핵심이 바로 ‘내가 너의 자리에 서보는 것’이다. 내가 진짜 네가 될 수는 없다. 그런데도 너의 자리에 서보는 것, 내가 이 사회의 바깥에 한번 가보는 것, 내가 이 삶의 바깥인 죽음의 입장에서 삶을 한번 바라보는 것…. 상상력은 그걸 가능하게 한다.
다 내려놓고 묻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할까? 비로소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 떠오를 수 있다. 그게 뭐냐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거다. 질문을 던지는 게 인간이다. 소진, 폐기 처분, 이루어지지 않을 약속…. 이건 사는 게 아니라는 판단이 이미 우리 속에 있었다. 근데 그걸 유보하거나 은폐하거나 못 본 척하다가 이 민낯을 보고 나서는 이 답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다. 그럼 질문을 다시 할 수 밖에 없다. ‘대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 슬퍼하고 애도하는 가운데 서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 거다. 사실은 답도 이미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사는 삶’이라고 얘기한다.
정성을 들일 시간이 있고, 그로부터 뭔가 얻을 수 있는 삶일까? 글을 읽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처럼? 글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읽을’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시간과 정성을 들이며 사는 삶이 왜 좋은 삶인가에 대한 대답을 사람들이 희미하게든 분명하게든 알게 됐다고 생각한다.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그 좋은 삶이 가능하려면 어떤 정치 공동체가 돼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끝났을 때 비로소 국가에 요구할게 나온다. 이게 안 되면 국가에 안전만 요구하게 된다. 지금처럼 살되 안전한 삶. 그게 정말 우리가 바라는 것인가?
정치에 대한 환멸이야말로 깊고 깊다. 그리스식으로 보면 ‘좋은 삶이란 무엇인가?’ 를 토론하는 것 자체가 정치다. 국가공동체가 추구해야 되는 것이 ‘좋은 삶’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질문을 안 던지고 살아왔다. 굉장히 관념적이고 호강에 겨운 소리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그 질문을 안 던질 수가 없게 됐다. 혼자 생각하는 게 아니라 같이 생각하는 그 자체를 정치라고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선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시작된 거다.
한국에서 개인이 행복한 삶을 논하는 것은 여전히 사치스럽게 느껴지는데도? 한국에선 국민의 안전이 아니라 국가의 안전을 절대시하면서 살아왔다. 국가의 안전을 안보라고 한다. 그것이 곧 나의 안전인 것처럼 착각하고 살다가 전혀 아닌 걸 알게 된 거다. 그렇다면 이대로 각자 개인만이 행복한 삶을
추구하게 될 가능성도 농후하지 않나? 그럴 가능성이 십중팔구다. 각자도생의 지옥이 열릴 가능성. 이 사회는 전혀 나를 보호하지 않는구나, 그럼 누가 나를 보호해야 하지? 내가 나를 보호하는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
결국 돈 아닐까? 지금까지 사회 어디선가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건 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쨌든 ‘뭔가 있어야 내가 살아남을 수 있겠구나’라는 각자도생의 삶이 열리는 거다. 각자도생의 핵심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거다. 지금 우리가 느끼는 비겁함에도 그런 측면이 있다. 그 슬픔과 고통을 직시할 용기가 없으니까. 나도 없다. 나는 비겁한 거다. 그 비겁함이 우리를 생존시키고 있다. 그래서 죄책감이 생긴다. 두려움과 비겁함 때문에 응시하지 못하고 곁눈질만 하고 있다.
모두 지쳐 있으니까. 비겁함과 죄책감으로부터 도출되는 무기력이다. 그래서 지금 허락된 것은 견디는 것뿐이라는 말이다.
이 모든 것을 견디면서, 그래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건가? 그게 출발이니까.
- 에디터
- 정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