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도망칠 수 없는 자

2016.10.24이충걸

상수리 나무 아래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도 무한 증폭되는 가을 아침, 집 앞 공원에서 풀을 깎는 기계음이 호젓한 마음을 들쑤신다. 불안정하게 뒤척이다 입술을 깨물면 폭설 같은 한숨. 세상이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원자 폭발 250데시벨, 청고래 울음 188데시벨, 굴착기 100데시벨, 지하철 80데시벨, 일상의 대화 60데시벨, 뒹구는 낙엽 10데시벨. 문명은 모든 분야에서 더 큰 소음을 만들었다. 하지만 세상에 아무리 시끄러운 게 많아도 사람 목소리만큼 시끄러운 것도 없다. 멧돼지를 오백 마리 삶아 먹은 그놈의 저팔계 목소리, 모기 백만 마리가 교미하듯 앵앵거리는 그 년 목소리, 힐링 구루들의 설교 같은 호통, 공짜도 아니면서 “얼른 가져가시라”는 쇼호스트들의 다그침. 어떤 땐 나긋나긋한 친구 목소리도 내이 內耳를 찢는다. 국가가 아무리 소음 기준을 강화한다 해도 시끄러워 죽거나 죽이는 사람들은 정신없이 늘었다. 테슬라 전기 자동차의 선풍은 그래서 납득할 수 있다. 전기 엔진은 상대적으로 조용하니까 더 큰 연료 효율을 위해 분투하는 건 깨끗한 공기와 조용한 도시를 만든다는 얘기 같아서. 그런데 점멸하는 빛을 감지하면 더 방어적으로 운전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자율 운행 자동차엔 사이렌이나 경적이 불필요하겠지? 클랙션과 사이렌이 사라진 세상에선 자전거 벨 소리가 도시 소음의 핵이 될까? 고무 아스팔스, 부드러운 콘크리트 도로 같은 걸 자꾸 실험하다 보면 미래의 도시는 씻은 듯 차분해질 테다. 요즘 박물관들이 소리의 방향을 조절해 옆 사람 방해 없이 설명을 듣게 한 걸 보면, 광고판이나 가게 디스플레이 앞을 지나는 개인들에게 선택적으로 오디오 메시지를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이렌 소리를 수평으로 퍼지게 하면 고층 빌딩 거주자에게만큼은 덜 들리겠지. 비행기 개체수가 그렇게 늘었는데도 공항이 덜 소란스러운 건 위성 시스템이 가파른 앵글로 비행기를 이착륙하게 만들어 활주 거리가 짧아진 탓 아닌가? 하이브리드 엔진을 날개 아래가 아니라 위에 단다면 마침내 이 땅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테크놀로지는 가령 화해를 선물하니까. 언젠가 법적 제한 소음이 넘는 차 번호판을 찍고 딱지도 떼는 장치가 생기면 기계에게 백날 하소연해봤자 들은 척도 안 할걸. 배터리의 혁신은 70데시벨로 윙윙거리는 청소기에게도 참견해 고요히 자폭하게 만들 것이다. 소리를 막는 장치가 더 정교해지다 보면 들어오는 소음의 반대 주파수 음파를 내보내 아예 무음화시키는 세상도 오겠지. 하지만 아무리 소음에 대항해도 더 시끄러운 게 세상을 채운다. 드론이 소포를 더 많이 배달하게 되면 추석 즈음의 도로는 한결 침착해 지겠지만 머리 위는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지속적인 주변 소음이야 어찌어찌 차단한다 해도, 급작스러운 소음엔 당할 재간이 없다. 공연장에서 끄지 못한 휴대전화 벨 소리를 막는 그날, 비로소 기술의 승전보가 울려 퍼질 것이다. 하지만 진짜 시끄러운 건 물리적인 소리가 아니다.

관료주의의 어두움. 애쓰지조차 않는 사회 정의. 폭도들로 들끓는 실락원. 가라앉는 배의 낡은 구명보트. 숨을 쉰다는 거짓말. 불타는 키보드. 고등 감옥. 돌아가는 샤우론의 눈은 결코 깜빡이지 않는다. 전생에 한 말로 비난받고, 합리적 의심은 한 번의 숨보다 짧다. 부풀어가는 분노. 토네이도의 힘으로 살육하는 수천 개의 지저귐. 모르는 사람들 무리의 육식 스튜. 날렵한 반사 작용. 두꺼운 낯가죽. 어그로 봉기에 대한 요새화. 인파이터들의 날아다니는 파편을 쳐내는 전투의 끝. 망설이다 위험 지역에 들어가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 거미의 성 >에서처럼 진짜 화살이 빗발친다. 동료들이 당신을 돕기 위해 모일 거라곤 믿지 말 것. 악의가 없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누구도 거머리처럼 스스로의 피를 빨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드러난 부정직, 더 드러난 무식함을 공유하는 사람들. 언제나 실망시키는 시대의 아이콘들. 실수 하나에도 서로에게서 등 돌리는 작가들. 문맹들이 들끓는 싸구려 숙박 업소. 물질적 세상의 인종차별주의를 미러링한 뒤 날것 그대로의 자아까지 벗겨내는 혐오증. 장기간의 귀착을 요구하는 매일매일의 적대감. 그것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여성과 소수자들뿐. 그리고 그들의 용맹한 심장. 댓글이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는 오컬트 이론. 거기에 신빙성을 보태는 정신병자들. 속도는 더 극적이고 늘 반전을 부르지만 결국은 같은 기계들. 공포가 잦아진 세상. 오감이 주는 욕망을 피하느라 지치고, 모든 걸 판단하느라 나가떨어진 삶. 배회하는 마음은 공간을 찾고, 인생에 설명을 구한다. 이렇게 모든 게 뒤죽박죽인데 뭘 해야 하지? 홀딱 벗고 스트리킹? 아니면 나체로 스카이다이빙? 이 꼴 저 꼴 안 보고 방구석에서 매일 포르노나 봐야 하나? 현대의 정치적 삶 자체가 포르노라는 것도 모르고?

내가 사는 이 행성에서 참을 만큼 참았으니 이젠 슬슬 미친 짓도 하고 싶다. 멸치 낚싯대를 쥐고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내 개하고 작은 쪽배에 앉아 바다 공기를 마시는 상상. 잠시 후, 숲의 마법 같은 빈터, 비밀의 수영장을 찾아가 보지만 깨진 유리와 날카로운 바위와 미끌미끌한 쓰레기가 덮여 있다. 더러운 거품을 걷어내면 그 많은 사람이 수영장에 대놓고 오줌을 쌌다는 걸 알게 된다. 나의 독점적 주거 공간, 종이와 윤전기가 접촉하는 아날로그 세상은 오줌 수영장 가장자리로 밀려난 거지. 나는 인생이 사라지길 원치 않지만 맛도 모르고 술을 마시고, 누구를 만나도 내가 거기에 아예 없는 상태에서 대화 전체가 이루어진다.

실은 오래전부터 나에게 선물을 주고 싶었다. 단 하루 만이라도 침묵하는 것. 차라리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것. 내가 들은 치료법은 오직 즐거움뿐이었다. 조코비치가 리턴하듯 절정의 무신경한 즐거움. 한적한 지하철에 앉아 눈을 감고, 척추는 바르게, 고개는 살짝 아래로, 느릿느릿 호흡하다 보면 심장이 웃는다지. 하지만 지하철은 늘 붐비고 비밀의 만트라를 읊을 수 없다. 혹시 소금 900파운드가 담긴 스테인리스강 탱크 안에 사해인 듯 누우면 모든 자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질까? 아님 수도원? 침묵의 은둔? 삶은 느려져서 오전 5시 기상. 7시 대나무 스트레칭. 9시 반까지 걷고 나면 고귀한 적막이 찾아오지. 입은 닫고 전자 기기는 금물. 누가 찾아와도 채소를 씹으며 고요히 있을 수 있어. 그런데 솔직히 딱 한 가지가 걱정돼. 한밤중의 차가운 안도 속에서, 네가 어디에 있든 너는 거기 존재한다는 식의 깨달음을 얻을까 봐. 그건 위안이 아니라 위협이잖아. 아, 어떡하지? 대답해줄 대상이 없다면 정답을 못 구하리란 걸 인지한 채로도 질문해야 하는데…. 시월에, 무의미라는 질병이 도지고 말았다.

    에디터
    이충걸
    포토그래퍼
    Gettyimages / 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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