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는 어떤 섹스 상대일까?
“한국 남자는 고추가 작다.” 각종 매체에 등장 하는 ‘한국 남자 평균 크기’를 떠올리며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해본다. 평상시 크기라면 엄지와 검지만으로 충분히 측정이 가능하고, 발기시에도 엄지와 중지로 가늠이 되는 크기다. 내가 만난 한국 남자 대부분의 크기였다. “잘못된 계산이다”, “나는 그렇지 않다”라는 항변과 “길이보다 경도다”, “한국 남자는 굵기다”, “테크닉으로 커버할 수 있다”, “사랑이 있으면 문제없다”라며 도시 괴담인 양 모른척하는 남자 혹은 작은 고추 크기를 인정하고 무마의 말을 찾는 남자로 반응은 양분되었다.
내가 복이 없는지 지금까지 섹스 또는 그 비슷한 걸 한 한국 남자의 고추 크기는 자주 눈에 띄는 그 수치와 다르지 않았다. 이 단락까지 읽고 ‘네 X이 아직 큰 X맛을 모르는구나, 내가 해줄게, 주소 대봐’라고 생각하는 남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한국에서 나고 자라 살고 있는 ‘한남’에 버러지라는 조롱을 붙인 ‘한남충’일 것이다. 굳이 ‘한남충’을 겨냥해 성기 크기를 비교해가며 놀리려는 마음은 없다. 다만 한국 남자와의 섹스에서는 성기 크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이 잦았다.
자신의 성기 크기에 관심 없는 남자는 한명도 못 봤다. 대부분 작았기에 자신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원하는 대답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해댔다. “내가 큰 편은 아니지만 작지는 않지?”, “네가 만난 남자 중에서 나는 몇 번째로 커?”, “내가 화장실에서 봤는데 친구들도 대부분 이만하더라”. 그럼 나는 대답했다. “응, 맞아. 보통 이렇던데.” 우습게도 보통보다 큰 성기를 가진 남자들도 비슷한 질문을 했다. 나는 정말 큰 성기를 본 적이 없으므로 똑같이 대답했다. 그 각양각색의 성기를 내 안에 집어 넣으면 결과는 같았다. 무조건 거칠게 해댔다. 그 방법만이 크기의 결점과 장점을 증명할 수 있다는 듯이 기를 쓰고 해댔다. 나는 그 앞에서 거대한 물건을 받아들인 양 몸서리치듯이 반응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잘 못하나 보네”라며 어린애처럼 툴툴대길 반복했다. 사귀는 사이라면 사랑을 의심받을 때도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무턱대고 “좋았어?”, “어땠어?” 라고 자신의 늠름한 성기를 칭찬해달라고 했다. 이야기해달라고 한 남자는 있어도 먼저 나와의 섹스가 어땠는지 이야기하는 남자는 없었다. “응, 좋았어”라고 내가 먼저 말하고 나서야 나에 대한 칭찬이 돌아오곤 했다. 한국 남자의 섹스엔 여자인 내가 없었다. 이 사실은 다음의 문제로 이어졌다.
한국 남자는 여자를 만족시키는 방법을 잘 모른다. 왜나면 알려고 하지 않으니까. 대부분 자신의 큰 물건으로 지스폿을 공략하면 만족할 것이라는 단순한 공식이 머릿속을 지배하는 듯하다. 한국 사람들은 제대로 된 성교육을 못 받고 자랐다.(지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남자도 여자도 포르노를 본다. 포르노는 제대로 된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특별한 장르명이 붙지 않은 거의 모든 포르노 안의 여성은 남성을 위해 봉사하고, 남성이 행하는 대로 쾌락을 느낀다. 나는 자라면서 그건 아니라고 거듭 생각했다. 자위를 통해 어디가 어떻게 더 좋은지, 섹스 토이를 활용해 인간 남성에게 얻을 수 없는 쾌락을 얻기도 해보고, 상대 남성에게서 나를 위한 더 나은 만족감을 얻으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떠올려보기도 했다.
순전히 “싼다!”라는 말을 내뱉고 싶어서 자신의 사정을 외치지 않는 한, 말도 없이 남자 혼자 끝내버리는 경험을 나만 겪었을까. 어떤 상대와 매뉴얼처럼 전희와 삽입, 피스톤 운동과 사정 순으로 흘러가는 섹스를 반복할 때마다 나는 왜 이 남자와 섹스를 해야 하는지, 이 남자는 굳이 왜 나와 섹스를 해야 하는지 반문 할 수밖에 없었다. 화려한 기술이랍시고 몸을 이리 뒤집었다 저리 뒤집었다 다리를 들었다 내렸다 눌렀다 폈다 하고 나서 자랑스러운 듯이 웃는 상대도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했더니 오히려 그는 내가 눈이 풀릴 만큼 좋았을 거라 단정 짓고 행복하게 잠에 빠져들었다. 어디서 봤는지 쌍욕을 해대는 남자를 만났을 때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몇 번 안 본 남자와의 잠자리에서 다짜고짜 “이 음란한 수퇘지야”라고 말하며 흥분을 종용했다면 나를 제정신으로 봤을까? 그걸 내가 좋아한다면 나에게 천하의 몹쓸 년이라고 욕을 퍼부어도 상관없다. 섹스에서 손에 꼽을 만큼 중요한 건 합의다. 한국 남자와 섹스하면서 합의라는 단어는 마치 사어같았다. 섹스를 한다는 선택도 시작하는 시점도 끝내는 시점도 남자의 몫이었다.
여성이 원하는 섹스? 한국 남자와의 섹스안에 애초부터 이런 말은 있지도 않다. 호스트바에 간 적이 있다. 돈을 지불하고 원하는 남성을 골라 함께 노래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몸을 슬쩍 맞대기도 한다. 그런데 방 안에 모인 호스트들은 내 요구보다는 자신의 장기나 특기를 들이댔다. 어떤 호스트는 소몰이 창법으로 노래를 부르며 팔을 둘렀고, 어떤 호스트는 “오늘 하루 힘들었죠?”라며 연기하듯 묻고는 다리를 주무르고 발가락 사이를 만져댔다. 침대에서 멋대로 엎치락뒤치락하고 미소를 보내는 남자의 모습이 겹쳤다. 돈을 냈으니까 내 맘대로 하겠다는 심보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는 합의가 있을 거라는 기대를 했다. 호스트 바에 가는 것이나 남자와 자는 것은 한편 기분을 달래는 행위다. 내가 원하는 쾌락을 얻는 것이 힘든 일임을 한국 남자와 만나고 자는 동안 지겹도록 겪었다.
사귀는 사이가 되면 더 심해지기도 했다. “여기를 이렇게 저렇게 해줘”라고 말했더니 갑자기 화를 내며 등을 돌린 남자가 떠오른다. 내가 성적으로 원하는 걸 이야기하는 것은 남자인 자신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이라고 했다. 이쯤 되면 자기가 잘하나 못하나의 지경이 아니라 그런 건 내 알 바 아니고 여자인 너는 나만 따르면 된다는 지시와 다르지 않았다. 정말 여성 상위가 남성의 로망인가? 잠자리를 한 한국 남자들은 여성 상위 체위가 여성과 남성 사이의 주도권을 건 가장 치열한 체위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남성이 허락했을 경우의 여성 상위는 섹스를 즐기는 표정과 과감한 몸짓, 가슴과 허리의 아름다운 곡선을 바라보면서 엉덩이까지 동시에 만질 수 있으며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체위. 반대라면? 너무 놀아본 것이 아닐까 걱정되는 분방한 움직임에 남자를 내려다보는 눈빛이 불안하기만 한 체위. 내가 위에서 몸을 움직인다고 남성을 범하는 기쁨을 느낀 적은 없다. 후배위가 정복욕을 만족시키는 체위라고 정해놓은 상대의 의심이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대와 잘 때 내가 위로 올라가면 “너 경험많지? 그런 것 같다”며 기분 나빠하거나 의기소침해졌고, 꽤 만난 상대는 자기가 원할 때만 여성 상위를 허락했다.
한국 남자의 무지하고 우악스러운 태도는 끝내 사적인 공간까지 침범하기도 했다. 내가 혼자 사는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언제든지 얼마든지 섹스를 할 수 있는 여자로 단정 지었다. 얼마 전 친구가 인터넷 링크 한 줄을 보냈다. 남성 사진가가 찍은 <자취방>이라는 이름의 사진집에 대한 설명이었다. ‘특별하고’, ‘비밀스러운’. 두 단어에서 벌써 글러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취녀’라고 이름 붙이고, 혼자 사는 여자와는 공짜로 섹스를 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한국 남자의 볼썽사나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분노의 대화를 마치고 트위터를 켜자 ‘#이게_여성의_자취방이다’라는 태그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들이 그리는 여성답지 못하게 어질러진 방의 모습, 위험해서 자물쇠와 방범창을 설치한 모습이 좌르륵 펼쳐졌다.(이 태그가 걸린 글들을 읽어보길 바란다.) 아직까지 범죄의 표적이 된 적은 없지만, 내 방에 밀고 들어오려는 무뢰한들과 여러 번 싸움을 했다. 내가 맘에 들어 섹스를 할 때도 상황은 다를 바 없었다. 늦잠을 자고, 예의 없이 물건을 뒤지고, 밥을 해달라며, 마치 결혼한 것처럼 굴었다. 사랑은 질척거리는 거라고? 이건 분명 섹스에 관한 이야기다. 내가 혼자 사는 집에 입성하고, 섹스를 했으니 멋대로 굴어도 된다는 태도는 한국 남자와의 섹스에 따라붙는 덤이다.
아직 ‘한남’이 한남동을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로 안다.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고 부를 때 감지되는 특별히 우스운 뉘앙스는 불과 얼마 전에 생겨났다. 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남자들의 말과 행태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어째서 ‘한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제야 시작됐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2017년 3월, 당대의 한국 남자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남자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한국 남자도 답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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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 글 / 박공기(프리랜스 에디터)
- 포토그래퍼
- 강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