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뉴욕의 흑백 사진 6장 | 지큐 코리아 (GQ Korea)

서울과 뉴욕의 흑백 사진 6장

2019-03-12T17:09:40+00:00 |ENTERTAINMENT|

다큐멘터리 사진가 신웅재는 서울과 뉴욕의 거리를 누빈다. 그 어느 것보다 구체적인 삶 속에 뛰어든 그 사진들 속에, 유독 거창하지 않은 하늘이 빠지지 않고 있었다. 

의도적으로 하늘을 찍지는 않는다. 구름이 가득하거나 멋지게 흐드러지면 프레임의 빈 공간이 줄어 콘트라스트도 뚜렷하고 멋있으니까, 그렇게 찍은 적은 있을 것이다. 도시 풍경을 찍다 보면 어떻게든 하늘이 걸리기 마련이고, 현장에 나가 늘 ‘상하전후좌우’를 둘러보기 때문에 어느 쪽이 담겨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

2010년 1월 용산 참사 1주기가 시작이었다.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처음으로 나간 현장이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제 와서 보니 일반적인 보도사진과 다르게 찍었다.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에게 플래시를 터뜨려가며 사진 찍는 무리에 섞여 있는 게 힘들었다. 추모제 중심부에서 나와 고개를 돌렸다. 안개가 자욱이 깔린 날씨와 남일당 주변 건물에 더 눈이 갔다. 그것들을 찍어 스승이신 성남훈 선생께 보여드렸더니 철거 중인 옥인아파트 현장을 찾아가 네 눈으로 보고 온몸으로 겪으며 찍어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옥인아파트에 갔지만 두려움이 앞섰다. 혹시나 남은 주민과 마주칠까 봐, 혹은 철거 인부들에게 들켜서 혼날까 봐. 머릿속이 ‘철거 용역’, ‘재개발’, ‘전철연’, 등 무거운 단어로 가득했다. 하지만 첫날, 이 선입관들은 완전히 깨졌다. 스스로 한심하고 부끄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폐허 더미에 묻힌 흔적이, 기억이, 한때 존재했던 삶이, 그 폐허를 감싸고 있는 벚나무, 개나리, 이제 막 잎을 틔우고 있는 다른 나무들이. 아파트에서 나고 자란 개인적인 기억과 맞물리면서 ‘이건 평생 기록해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후 용산 재개발 지역을 틈만 나면 찍었고, 조금씩 대상과 외연을 확장해나갔다. 오래된 아파트, 골목, 철거 직전의 버려진 집, 재개발 지역 등등.

그렇게 경험이 쌓이면서 사진에 대한 생각이 보다 분명해졌다. 이를테면 사진을 찍을 때는 확실한 시각을 가지면 좋은 정도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사회적인 이슈를 다루는 사진뿐만 아니라 여행 사진이나 SNS에 올리는 사진들까지. 사진은 현실의 모사 또는 기록을 위해 만들어지고 생존해온 매체이자 기계 예술이다. 정교한 기계가 작가를 도와주기에 다른 매체에 비해 훈련 시간 대비 높은 품질의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회화나 소설에 채색 우선 모드나 자동 집필 모드는 없다. 태생적 특징들로 인해 사진은 매우 위험한 매체다. 사유가 없는 피상적인 작업, 정교한 가짜가 쉽게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작가 스스로의 대상에 대한 고찰, 과정에서의 질문, 결과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사진은 공허하다.

스스로 다큐멘터리와 포토 저널리즘에서 가장 경계하는 말 중 하나가 ‘사명감’이다. 힘 있고 단단하고 역사적 정당성까지 확보한 듯이 들리지만, 그래서 매우 위험한 단어. 작가의 부족한 사유를 은폐하고, 작업 과정 중 타인의 고통을 가볍게 다루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자기 정당화의 주문이 될 수 있다. 당장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 때 수많은 사람이 카메라를 들고 나와 사명감을 외치며 여기저기에 카메라를 들이밀었지만 지금까지 남아 있는 유의미한 작업이 얼마나 되나? 세월호 참사에 대해 가장 깊이 있고 가치 있는 작업을 한 <한겨레>의 사진가 김봉규도 사명감이라는 말을 쉬이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내가 이 참사를 다룰 자격이, 능력이 있는지 스스로를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오는 수많은 음식 사진이 사명감 운운하는 거짓 사진보다 도덕적으로나 목적성으로나 훨씬 우위에 있다. 자신이 먹은 걸 자랑하고 싶고, 이를 통해 보다 많은 ‘좋아요’를 얻고 싶고, 더 나아가 보다 많은 팔로워를 얻고 싶다는 목적의식과 이를 위한 미학이 뚜렷하니까.

다큐멘터리 사진은 곧 현장이고, 나는 서울, 뉴욕과 가장 깊이 관계한다. 하지만 작업으로서 각각의 결은 다르다. 서울의 작업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온 도시에 대한 애가다. 남아 있는 것, 사라져가는 것, 흔적, 기억, 한때 존재했던 모든 감정과 삶에 대한 애가. 다른 하나는 이 도시와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삶을 바꾸는, 그것도 매우 일방적이고 폭력적으로 바꾸는 보이지 않는 힘, 욕망, 주체는 뭔가에 대한 사회학적, 정치지리학적 고찰과 비판이다.

하지만 뉴욕은 그곳에 사는 나를 관찰하는 작업에 가깝다. 물론 피상적이고 자기 과시욕으로 가득한 이미지만 소비하고 배설하는, 예컨대 ‘휴먼즈 오브 뉴욕’같은 ‘뉴욕 팔이’에 대한 ‘카운터펀치’의 측면도 있다. 그렇다고 타임즈 스퀘어 사진 그만 찍고 뒷골목의 노숙자 사진만 찍어야 한다는 말이라기보단 내가 정말 보고 느끼고 숨 쉬는 게 뭔지를 이야기하겠다는 거다. 처음엔 의도적으로 화려한 걸 피해 어두운 것만 찍으려고 했는데 도통 셔터가 눌러지지 않았다. 내 안의 톱니바퀴가 삐걱거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포토 저널리즘적인 접근을 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셔터스피드, 조리개, 포커스, 구도 전부 무시하고 본능적으로 반응하며 찍었다. 찍는 순간 생각하고 느끼고, 또 느끼고 생각하면서 셔터를 누르고, 결과물을 바탕으로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를 의심했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뉴욕 작업은 일기일 수 있다. 구체적인 계획 없이 마음 내키면 카메라를 들고 나가 거리를 배회하며 사진을 찍는다. 아예 한 컷도 안 찍을 때도 있다.

결국 이 작업들의 중심에는 ‘나’라는 인간이 자리한다. 서울에서는 자의 반 타의 반 사람을 프레임에 담지 않고, 뉴욕에서는 대개 행인들을 익명의 방식으로 처리한다. 하지만 대상을 바라보고 사유하는 ‘나’라는 존재는 확연하다. 서울과 뉴욕의 사진들은 나를 비추고 바라보는 거울이다. 그러므로 내 사진은 인간을 다룬다고 확신한다. 그것이 하늘을 찍은 사진이더라도. 서울의 하늘에서는 바벨탑처럼 인간의 들끓는 욕망, 그러나 결코 닿을 수 없는 지향을, 뉴욕의 하늘에서는 고독과 허무, 나를 억누르는 투명한 힘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