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K-팝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

2019.10.12GQ

K-팝은 세계적이며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편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개념이다. K-팝을 즐긴다는 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을 넘어 자기 해석을 더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는 과정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BTS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들이 막 데뷔한 2013년의 일이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세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BTS가 스튜디오로 막 들어서던 그 모습만은 여전히 또렷하게 남아 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BTS의 손에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그들은 “빨리 먹고 시작해도 될까요?”라고 물은 뒤 도시락을 깨끗하게 비워냈다. 식단 관리를 하지 않는 이상 직접 도시락을 준비해온 연예인은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없었다. BTS가 씩씩하게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다시 한번 질문지를 체크하고 일곱 멤버의 실물과 사진을 비교해가며 이름을 달달 외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몰랐다. 6년이 지난 지금, 그 이름들을, 런던에서, 이렇게나 자주 듣게 될 줄은 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오히려 런던에 살면서 BTS 신드롬을 제대로 실감하게 된 것 같다. 여러 매체를 통해 “런던 웸블리 스타디움 객석이 6만 아미로 가득 찼다” 같은 뉴스를 읽는 것을 넘어 일상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순간에 BTS에 대한 무언가를 듣고 보게 된다. 작년 8월쯤엔 런던 킹스크로스역을 지나다가 정국의 포스터를 마주쳤다. 해리 포터가 호그와트 급행 열차를 타던, 런던 중심가에 위치한 대규모 스테이션에서 말이다. 그 포스터는 다가오는 정국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였다. 한 무리의 소녀들이 세상 밝은 표정으로 포스터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국의 생일 포스터 앞 촬영을 목적으로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이 꽤 있다고 했다. 그로부터 한 달쯤 지난 10월엔 런던 엔젤역에서 지민의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를 다시금 목격했다. 이번엔 나도 태연하게 사진 한 장을 찍어두었다.

정말이지 ‘모두’가 BTS를 안다. 과장이 아니라 인종, 국적, 세대 불문이다. 내년이면 50대가 되는 영국 친구는 얼마 전 <BBC>에서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방탄소년단 공식 장기 휴가 알림’ 공지를 봤다면서, 그런 소식조차 뉴스로 보도될 정도인 그들의 인기에 놀라워했다. 거의 모든 친구가 BTS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들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고 하면 다들 말도 안 된다고 경악하면서 폭풍 질문이 이어졌다. “실제로 만나보니 어땠어?”, “그들의 음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K-팝엔 ‘피, 땀, 눈물’ 같은 제목이 흔해?”, “왜 BTS를 보이 밴드가 아니라 아이돌이라고 하는 거야?”

이 현상은 단순히 BTS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런던의 힙스터 타운 중 하나인 해크니에 위치한 단골 네일 살롱에선 늘 블랙핑크나 트와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처음 갔을 때부터 내 이름을 보고 한국인임을 알아채더니, 최애 아이돌이나 최신 연예 가십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영국의 코리아타운인 ‘뉴몰든’에 같이 가보자고 청하기까지 했다. 한 독일인 친구는 영국 언론사 <가디언>의 ‘K-팝 비기너 가이드’ 기사의 링크를 보냈고, 어떤 프랑스인은 K-팝 연습생들의 일상을 다룬 포토 에세이 기사를 읽었다며 이게 진짜냐고 되물었다. 스웨덴에서 온 친구가 아이돌 그룹도 아니고, 래퍼 식 케이의 노래 ‘그래 그냥 내게 바로(Skip and Kiss)’를 추천해준 적도 있다. 어찌나 다양한 K-팝 스타들에 대한 질문과 이야기를 들었는지, 런던에 살고 있는 이 몇몇 유러피언이 서울에 사는 내 동생보다 K-팝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더 잘 알 거라고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서른네 살의 평범한 직장인인 내 동생은 몬스타엑스와 식 케이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만난 유러피언은 대부분 K-팝 팬이라기보다는 호기심 정도로 접근한다. 바꿔 말하면 그만큼 보편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는 거다. 엠마 스톤도 코난 오브라이언의 토크쇼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K-팝은 세계적인 현상이에요. 분명 모두가 K-팝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건 완전히 새로운 거예요. ‘훌륭하다(Excellent)’는 수준을 넘어서, 아마 이제껏 당신이 본 것 중 최고일 걸요.” 우리에게는 익숙하기 그지없는 K-팝의 어떤 점이 그토록 새로울까, 에 대한 답을 찾는다면 아마 <빌보드> 매거진의 K-팝 기고가인 타마 허먼의 말을 빌려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K-팝은 음악의 장르가 아니라 음악 개념(Idea)에 가깝습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돌이란 음악 이상의 총체적인 무엇이다. 세상에 음악만 잘하는 아이돌은 없다. 태생적으로 그들에겐 서사가 있다. 고되고 오랜 연습생 생활을 거쳐 무언가를 성취해내는 지극히 한국적인 성장 과정과 메인 보컬, 랩, 비주얼, 댄스, 막내 등 그룹 내 정해진 각자의 역할, 멤버 구성과 그룹 네이밍에서부터 느껴지는 국제적인 마케팅 전략, 연극적이라고 느껴질 만큼 완벽하게 짜인 안무와 뮤직비디오의 시각적 효과까지, 이 모든 것이 아이돌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러한 아이돌 공식이 하나의 산업으로서 K-팝 성공의 이유라면, 음악과 무대가 가진 스토리텔링은 보다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영국의 <바이스> 매거진 기사 ‘왜 이렇게 많은 이모(Emo) 음악의 팬들이 지금 K-팝 팬이 되었나’에서는 K-팝이 얼마나 리스너와 정서적으로 밀착된 장르인지를 말한다. 사실 처음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Emotional’ 혹은 ‘Emotive’의 준말로 개인의 억눌려 있던 감정, 청소년기의 예민한 감수성, 슬픔, 절망, 증오, 특히 우울함을 드러내는 음악 및 패션 경향을 뜻하는 ‘이모’와 K-팝이라니? 마이 케미컬 로맨스, 패닉! 엣 더 디스코, 폴 아웃 보이의 음악들, 우리나라로 치자면 넬의 몇몇 곡이 바로 이모 뮤직인데, 척 보기엔 K-팝 아이돌과는 대척점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구글에서 ‘Emo’를 이미지 검색해보길. 짙은 아이라이너, 검은색 손톱과 피어싱, 섀기 커트 스타일의 앞머리로 눈을 반 이상 가린 음침한 아웃사이더들이 대거 등장한다.)

“K-팝과 이모는 모두 메인스트림에서 비켜서 있지만 그 팬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메인스트림에 가깝기도 하다. 또한 솔직한 감정 표현 역시 두 장르의 공통적인 매력이다. 이모 음악에서 느꼈던 슬픔과 분노에 대한 이야기들을, 위로를 건네는 샤이니 종현의 ‘하루의 끝’이나 자신의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같은 민감한 감정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BTS 슈가의 믹스테이프 <Agust D>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0대 시절 열렬히 마이 케미컬 로맨스를 듣다가 지금은 K-팝에 완전히 빠져버렸다는 필자는 K-팝엔 치유의 매력이 있다고 덧붙였다. 인생의 극도로 우울한 시기에 K-팝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됐는지, 그 카타르시스를 경험한 이가 자신만이 아니라면서 말이다.

그 말처럼 전 세계 K-팝 팬들을 인터뷰한 유튜브 영상을 살펴보면 “K-팝은 내 인생의 힘든 시기에 정말 많은 도움을 줬어요”, “BTS의 <윙스 외전: 유 네버 워크 얼론> 앨범을 들으면서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같은 대답이나 댓글이 높은 지분을 차지한다. 이런 공감에서 비롯된 위로는 그동안 이모 뮤직이 수행해온 역할이었다. 물론 이모 뮤직이 사회 불만에 초점을 맞춘다면 K-팝은 낙천적이고 희망적이다. 이건 팬덤의 성장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침대에 누워 하염없이 천장을 바라보면서 슬픔 속의 단맛을 찾던 불안한 10대들이 우울함을 이기는 법을 배우고 일상의 작은 성취를 깨닫는 성인이 된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 감정이 어떻게 변할 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K-팝을 즐긴다는 건 음악을 듣는다는 것을 넘어 자기 해석을 더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찾아내는 과정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사람들은 K-팝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다. K-팝은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한국에서 만든 음악 혹은 아이돌이라고만 한정 짓기엔 프로듀서나 멤버의 구성은 이미 다분히 국제적이며, 좋은 아이디어라면 적극적으로 빠르게 흡수하는 근본적인 특성상 늘 변화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고 봐도 좋다. 한 곡 안에서 힙합과 팝, 록, EDM 등을 넘나드는 ‘실험적인(그러나 우리에겐 더없이 익숙한) 구성’처럼 말이다.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 세계를 해설하다> K-팝 편에서 타블로는 이렇게 말했다. “수십 년에 걸쳐 동서양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습니다. 팝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죠. 한 지점을 특정할 수 없어요.” K-팝은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그래서 K-팝은 어쩌면 지금 가장 팝의 본질에 가까운 장르이고 개념일지 모른다. 글 / 권민지(프리랜스 에디터)

    에디터
    김영재
    사진
    빅히트 홈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