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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베이에서 경험한 맛의 향연

2020.03.19GQ

다양한 문명이 버무러진 타이완의 역사는 헤아릴 수 없이 복합적인 식문화를 쌓아왔다. 타이베이에서 경험한 맛의 향연.

타이완에서 가장 높은 빌딩 타이베이 101.

상공에서 내려다본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에 전시된 유물.

골든 포모사의 새우볶음밥과 굴 오믈렛.

온천으로 유명한 타이베이 북부의 베이터우.

산해루의 면 요리.

타이완의 국보 취옥백채. 청나라의 황후 서태후가 극진히 아낀 보물이었지만 현재 자금성을 떠나 타이완에 소장되어 있다.

아시아 최대 박물관인 국립고궁박물원.

타이베이 그랜드 호텔의 도어맨.

무메 레스토랑의 크루도 요리.

상산에서 내려다 본 타이베이의 전경.

디화제 거리의 주택.

법고산에 위치한 농선사. 여느 곳과는 달리 현대적 건축물이 들어선 사원이다.

창의 문화 단지 화산 1914에서 커피를 내리는 바리스타.

W 타이베이 호텔의 내부 장식.

딘타이펑의 유명한 소룡포와 볶음밥.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는 모나리자가 걸려 있다.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선 다비드상이 관람객을 굽어본다. 유럽의 유명 미술관은 이처럼 사람들을 매혹하는 대표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역사적인 미술품은 멀고 먼 유럽까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타이베이의 국립고궁박물원 앞에선 조금 다른 생각을 했다. 오랜 시간 동안 널리 연구된 서양미술사와 달리 중국미술사의 인지도가 중화권 안에만 머물러 있어서일까. 마땅히 떠오르는 작품이 없었다. 다만 귀중한 소장품이 넘쳐나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국공 내전 당시 마오쩌둥에 밀린 장제스가 자금성에 보관된 보물을 탈탈 털어 타이완 섬으로 옮긴 게 국립고궁박물원의 시작이었으니까. 이곳에 수장된 중국 왕조의 미술품과 유물은 약 70만 점에 이른다. 어떤 작품은 그 역사가 8천여 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다.

박물원은 전체 소장품의 극히 일부만 전시하고, 나머지는 온도와 습도가 조절되는 수장고에 보관한다. 몇 개월에 한 번씩 전시품을 교체하기 때문에 늘 새로운 볼거리가 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3개 층을 도는 동안 가장 눈에 많이 띈 것은 서예 작품과 도자기였다. 1시간 반가량 둘러보았지만 타이완의 모나리자라고 할 만한 작품은 아직 찾지 못한 상태였다. 가이드로 동행한 캐롤에게 이 이야기를 털어놓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내놓았다. “배추가 있어요.” 의사 전달 과정에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캐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설명을 부탁하려던 참에 길게 줄을 선 관람객 무리와 맞닥뜨렸다. 캐롤은 유리 진열장 안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저기 있네요, 배추.” 아니나 다를까 유리장 주변 벽면에 커다랗게 확대된 취옥백채 翠玉白菜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19세기 청나라의 11대 황제 광서제의 부인인 근비가 혼수로 가져온 혼수품으로, 여치와 메뚜기가 녹색 비취옥으로 만든 잎사귀 사이에 숨어 있는 배추 조각이었다. 이 박물원의 최고 인기 작품은 이 배추가 틀림없었다. 엄지손가락만 한 조각을 보기 위해 나와 캐롤은 2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박물원 기념품점에서는 유리로 만든 복제품을 수백 달러에 판매 중이었다. 전시장 바로 옆의 레스토랑인 실크 팰리스는 취옥백채의 모양을 흉내 낸 메뉴를 판매한 바 있으며, 지난 2014년 일본에서 전시되는 동안 매일 2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다고 한다. 타이완에서의 첫 일정이 고궁박물원 방문이었다면 식재료를 조각한 예술품을 보고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서 며칠간 타이베이를 돌아보고 난 후 접한 배추 조각은 오히려 이곳 식문화의 유구한 역사를 가늠하는 상징으로 다가왔다. 타이완의 요리가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순 없지만, 흥미로운 미식 문화를 보유한 나라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특히 타이베이는 최근 들어 미쉐린의 관심을 끌었다. 2018년부터 별점 시스템이 도입됐고, 이듬해 총 24개의 레스토랑이 미쉐린의 별을 받았다.

타이베이에 도착한 날 저녁, 미쉐린 스타를 받은 음식점 중 한 곳에서 나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미쉐린 원스타를 받은 산해루(Mountain and Sea House)의 주방을 책임지는 셰프들은 타이완의 전통 요리, 그중에서도 1930년대 고급 만찬의 부활을 목표로 삼는다. 음식점이 소유한 유기농 농장에서 기른 채소를 포함해 타이완의 여러 지역에서 조달한 재료를 활용한다. 셰프들의 담대한 포부는 9단계로 구성된 코스 메뉴에서 여실히 표현된다.

코스 요리가 나오는 동안 현대와 전통이 각축전을 벌이는 듯했다. 사탕수수로 훈제한 닭고기와 자연산 전복조림 등으로 구성된 첫 코스에서는 모던한 플레이팅과 맛으로 감각을 흔들어 깨웠다. 하지만 뒤이어 나온 점토로 만든 솥에 넣고 찐 돼지고기 요리는 지역 색체가 강한 풍미로 미각을 뒤흔들었다.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는 20세기 초반에 대한 향수를 더욱 자극했다. 정문을 통과하는 순간 고풍스러운 앤티크 가구와 전통적인 나무 문이 나타나 마치 과거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지나간 시대에 대한 경의는 음식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태도에도 깃들어 있었다. 모두 넥라인이 높고 흰 깃이 달린 빅토리아 시대풍 드레스를 갖춰 입고 손님을 맞았다.

골든 포모사 Golden Formosa에서도 타이완의 전통 식문화에 대한 존중을 읽을 수 있다. 2년 연속 미쉐린 스타를 받은 골든 포모사는 1954년 문을 연 후 삼대째 내려오는 귀한 레스토랑이다. 현재는 창립자 첸렌즈의 손자 에릭 첸이 오너 셰프를 맡고 있다. 개업 당시 상호명은 포모사였으나 에릭의 부친 조니 첸이 가게를 물려받으며 그 앞에 골든이라는 단어를 덧붙였다. 에릭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따라 주방을 드나들며 타이완의 풍미와 농산물에 눈을 떴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가 손님에게 내는 음식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시던 추억 속의 음식과 닮았다.

각 메뉴가 모두 다른 접시에 담겨 나오는 산해루의 정교한 코스 요리와는 달리 골든 포모사가 강조하는 바는 가족과 친구가 한데 모여 복작복작하게 음식을 나눠 먹는 경험이다. 커다란 식탁의 중앙에 공용 접시를 두어 음식을 덜어 먹을 수 있고, 식사는 푸근하고 정겨운 맛을 내면서도 상당한 솜씨를 뽐낸다. 굴 오믈렛의 경우 산지에서 직접 조달한 최고 품질의 굴에 가리비를 곁들이고, 집안의 비법으로 만든 소스를 첨가해 타이완에 흔한 길거리 음식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또 다른 대표 메뉴인 돼지 갈비 튀김은 창립 초기부터 이어져 오는 요리인데, 현재 오너 셰프인 에릭이 요리법을 조금 바꿨다고 한다. 몇 가지 요리를 더 해치운 후 디저트는 건너뛰려 했지만 홀을 책임지는 에릭의 여동생 릴리 첸이 살짝 튀긴 타로 크로켓을 권했다. 65년간 가족이 영업을 해온 식당에서 보일 법한 달콤한 친절이다.

타이완 현지의 전통 요리 문화와 차별점을 둔 곳으로는 무메 Mume가 있다. 타이베이 남서쪽 다안구의 조용한 거리에 자리 잡은 무메는 사전 정보가 없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차분한 회색 외벽에 간판 하나 없이 커다란 창문 두 개만 달려 있을 뿐이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조그마한 공간이 나타났다. 주황색 등이 걸린 앞쪽의 작은 바에서는 바텐더가 타이완산 재료를 사용해 시그니처 칵테일을 만들고 있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10개 남짓한 테이블이 놓인 공간이 나왔다. 천장에는 선박용 로프가 매달려 있었고, 필라멘트 전구가 은은한 빛을 냈다. 요리를 만들고 테이블로 가져가는 일련의 동작들이 일사불란하게 이뤄지는 오픈 키친은 손님이 앉는 공간보다 몇 계단 위에 있었다. 미쉐린으로부터 별 하나를 받은 무메의 셰프 세 명은 타이완의 제철 농산물에 주목하는 한편, 조금 더 서양식에 가까운 방법으로 조리하고 플레이팅한다. 이 레스토랑을 찾는 재미 중 하나는 메뉴를 미리 알 수 없다는 점. 가게를 방문해 테이블에 달린 작은 서랍을 열어야만 그날 저녁의 메뉴를 확인할 수 있다. 종이에 적힌 메뉴 설명은 아주 간략하지만, 맛까지 단순하리라고 예측해선 안 된다. 이탤리언 스타일의 날생선 요리 크루도와 자두, 다시마로 구성된 메뉴는 지금껏 본 어느 요리보다 아름다웠고 맛도 그에 못지않았다. 랍스터와 바닐라, 옥수수가 조합된 메뉴는 시각적인 위트가 돋보였다. 음식점 내외부에 장식이 별로 없는 점이 드디어 이해가 됐다. 접시 위에 펼쳐진 아름다운 광경으로부터 시선을 돌릴 필요가 없었으니까.

식사 이후 찾은 스린 야시장의 분위기는 무메의 미니멀리즘과 정반대였다. 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 발원하는 냄새와 소리, 빛에 포위됐다. 시장 입구에서 한 사내가 운영하는 노점은 돈을 받고 새우낚시를 하게 해주었는데, 추가 비용을 내면 수조에서 건진 새우를 즉석에서 구워주기도 했다. 그 옆에는 마작판을 관리하는 여자가 있었고, 장난감을 따기 위해 장난감 총으로 풍선을 쏘는 10대들이 보였다. 옷과 장신구, 기념품을 판매하는 매대도 가득했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이 먹을거리를 손에 쥐고 몰려 다니는 포장마차 골목에 가장 관심이 쏠렸다. 납작한 닭튀김을 종이 봉투에 담아주는 핫스타 지파이 트럭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섰다. 우육면을 판매하는 곳도 있었고, 둥글게 자른 소고기를 거센 불에 구우며 행인을 불러 모으는 상인도 있었다. 새우와 달걀, 그리고 치즈라는 생소한 조합의 요리를 파는 곳도 눈에 들어왔다. 동행한 가이드 케롤의 말에 따르면 시장 내 위치한 사원 자성궁 근처의 노점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생소한 풍경과 맛으로 정신없는 밤을 보낸 후, 날이 밝자마자 용산사로 향했다. 중국어로 룽산사라고 발음하는 용산사는 1738년에 지어졌다. 타이베이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이다. 이곳은 후대로 전해 내려온 전설로 인해 특히 신성시되고 있다. 2차 대전 막바지였던 1945년, 당시 일본의 식민지였던 타이완은 미군 폭격기로부터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시민들은 폭격을 피해 용산사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기떼가 몰려들어 살을 찔러댔다. 피난객들은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와 다른 곳에 몸을 숨겼는데, 곧이어 용산사에 포탄이 집중적으로 떨어졌다. 이로 인해 사원은 전소됐지만, 정전에 모신 관세음보살상은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고 한다.

겸허한 마음으로 용산사의 입구를 통과하자 신도와 사원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는 방문객으로 가득했다. 탁자 위에는 방문객들이 바친 공물이 가득했다. 불 붙인 향을 두 손에 끼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어떤 소원을 마음속에서 말하고 있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나와 캐롤은 사업을 담당하는 신과 아기를 점지하는 신을 모신 사당을 지나 연인을 만나게 해준다는 신의 사당 앞에서 멈췄다. 10대 여학생과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젊은 사람들로 붐볐다. 사랑을 관장하는 신은 식성도 다른 걸까. 사당 바깥의 탁자 위엔 초콜릿을 비롯한 달달한 과자가 잔뜩 놓여 있었다.

타이완의 음식 문화를 두루 이해하고자 한다면 타이베이에 몇 주는 머물러야 한다. 네덜란드의 식민 통치와 50년간 일제 치하를 거치면서, 그리고 중화 문명과 원주민들이 쌓아놓은 토착 문화가 상충하며 타이완만의 독특한 식문화를 형성했다. 타이완에서의 여정이 끝을 향해 달리자 들르지 못한 명소보다 먹어보지 못한 음식에 더욱 미련이 남았다. 곧장 하루에 다섯 끼를 먹겠다는 마음으로 예약을 서둘렀다. 푸진트리 Fujin Tree에서 가느다란 볶음면과 굴을 곁들여 튀긴 빵에 프랑스산 스파클링 와인을 곁들이며 황홀한 시간을 마련했고,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W 타이베이 호텔 31층의 옌 Yen에선 타이완식으로 재해석한 와규 요리를 접했다. 자리 잡기가 어렵다고 소문난 스시 노무라 Sushi Nomura의 점심도 운 좋게 예약할 수 있었다. 다안구에 위치한 오마카세 전문점으로, 역시 미쉐린 스타를 받은 레스토랑이다. 마스터 셰프 요지가 만들어준 정갈한 스시는 일본을 제외하고 가장 뛰어난 일식당은 모두 타이베이에 있다는 풍문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맛의 세계화 측면에서 평가한다면 딘타이펑을 넘어설 곳은 없었다. 1972년에 문을 연 이후 각별한 맛의 소룡포 덕에 명성을 얻었다. 어쩌면 버블티보다 유명할지도 모를 타이완의 제1 수출품 딘타이펑은 2000년대 들어 두바이에서 뉴욕까지 세계 각지에 진출했다.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가늠되지 않는 본점은 엄두가 나지 않아 타이베이 101 타워 1층에 위치한 분점을 찾아갔지만, 역시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딘타이펑에서 맛보는 음식은 기다린 시간을 충분히 보상한다. 게다가 타이베이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있기 때문에 대기하는 동안 86층 전망대로 올라가 넓게 펼쳐진 녹지대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도시의 모습, 그리고 그러한 도시를 메운 전통 양식의 건물과 현대식 건물이 빚어낸 전경을 볼 기회도 얻는다. 저 멀리 보이는 산의 윤곽을 바라보다 발 아래 도시로 시선을 옮기던 중 우주선 모양 경기장이 족히 50년은 넘었을 듯한 낡은 건물들과 나란히 서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둘 사이 골목길 어딘가에 틀림없이 작고 평범한 가게가 하나 있을 테고, 결코 평범하지 않은 우육면을 만들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입에 딱 맞는 그런 우육면을 말이다.

    에디터
    Rhea Saran
    포토그래퍼
    Shyjith Onden Cheriyat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