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유튜브라는 기회의 땅엔 1등이 없다

2021.05.21GQ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개그콘서트>에서 박성광이 외친 세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오디션? 지겨워, 신물 나. 노래 잘하는 무명 가수가 아직 남아 있다고? 올 초, 심드렁했던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불러온 건 어깨에 툭 기타를 걸치고 무덤덤하게 ‘누구 없소’를 부르는 청년 이무진이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 없소. 천진한 얼굴에 부스스한 단발, 하얀 웃음을 짓는 청년은 여태 들어본 적 없는 허스키 보이스를 내뱉었다. ‘어차피 우승은 이무진.’ 그때부터 많은 시청자는 이무진의 우승을 예상했다. <싱어게인> 서사에서 처음부터 철저한 언더독이었던 이승윤이 각성하기 전까진. 이승윤은 스스로 정의한 것처럼 늘 배 아픈 가수였다. (이승윤의 팬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표현이다.) 모차르트를 질투한 살리에리처럼 이승윤과 이무진은 그런 관계였다. 이 예능의 서사를 단단하게 만든 라이벌전에서도 승자는 늘 이무진이었고, 이승윤은 패자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 구도 자체가 이승윤에게는 또 하나의 전략이 되었다. 원래부터 1등이던 이무진이 맹렬히 자신과 싸우는 동안 철저한 2등 전략을 취한 이승윤은 등수에는 별로 관심 없다는 듯 박진영의 ‘허니’를 부르며 때로는 귀엽게, 이효리의 ‘치티치티뱅뱅’을 부르며 구부정하게 알 수 없는 춤을 추면서 무대를 날았다. 방탄소년단의 ‘소우주’를 부르며 자신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스스럼없이 드러내기도 했다. 순위 따윈 안중에 없어진 이효리가 ‘치티치티뱅뱅’을 발표했을 때처럼.

이런 것도 아이러니라 해야 할까. 오디션 내내 2등으로서 자유롭게 날던 이승윤은 결국 최종 우승이라는 목표에 도달했다. ‘2등이어도 괜찮아’란 이야기를 오디션 내내 음악으로 표현한 이승윤에게, 대중들은 결국 우승을 선물했다. 그렇게 덜컥 2등이 되고 만 이무진의 ‘누구 없소’ 영상은 여전히 유튜브에서 1위를 기록하고 있다. 2021년 4월 14일 기준 <싱어게인>의 유튜브 조회수는 1,972만. 대한민국 국민 중 열에 네 명이 그의 “여보세요호~”를 들었다는 얘기다.

오디션에서 우승은 최종 목표지만, 연예인으로서 오디션 우승은 과정에 불과하다. 결국 연예인이라는 직업인으로서 평생을 먹고살기 위해서는 꾸준히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비쳐야 하고, 그러기 위한 명분으로 ‘000 오디션 우승자’라는 명찰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우승자’라는 글자의 잉크는 휘발성이 너무나 강하다. 매년 또 다른 사람들이 ‘우승자’라는 명찰을 달고 등장하고, 불과 1년 사이에 숱한 우승자들은 ‘우승해본 사람’의 무리 중 한 명으로 잊히는 게 일상이다. 우승이라는 무거운 왕관, 그것을 버텨내고 우승자라는 본인의 타이틀을 넘어설 또 다른 무기가 있는 자만이 이 험난한 연예계에서 꾸준히 생존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

한때 오디션의 왕이었던 <슈퍼스타 K> 출신 중 가장 왕성한 활동을 하는 사람은 존 박이다. 지금은 일반명사처럼 되어버린 “방송국 놈들아”가 그의 입에서 가장 먼저 나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슈스케’ 무대 중에 가사를 실수해 탄생한 ‘쳐밀도’ 짤이라던가, 냉면을 먹고 너무 신이 나 외친 ‘니나니뇨’ 짤을 보면 그가 왜 예능에 자주 섭외되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된다. 1등 출신이 아니어서일까. 그 역시 카메라 앞에서 너무나 자유롭다. 가수지만 1등보다 노래를 조금 못해도 용인이 되고, 1등이 아니니까 조금 경박스러워도 괜찮다. 1등이 아니어서 어쩌면 조금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1등이 아니니까.

게다가 우리 모두에게 지금은 1등이지만, 시작은 ‘장려상’이었던 사람도 있다. 국민 MC 유재석. 코미디=예능 프로그램이라는 등식이 성립했던 1990년대, <개그 콘테스트>는 또 하나의 스타 오디션이었다. 특히 1991년 <KBS 대학 개그제>는 그야말로 레전설이었는데, 여기서 수상한 사람들을 읊어보자면 김국진, 김용만, 박수홍, 남희석, 김수용 그리고 유재석이다. 우승인 대상은 김용만과 양원경. 유재석은 장려상이었다. 당시 수상 장면이 유튜브에 남아 있는데, 장려상에 호명되자 다소 실망한 듯 귀를 후비며 시상대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실제로 “금상 정도는 받을 줄 알았는데 실망했다”라고 이야기하며, 그 장면 때문에 선배들에게 종종 꾸지람을 들었다고 한다. 동기인 김용만의 집에 놀러 가서 어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에 고기 반찬이 없자 “반찬이 풀밖에 없네…”라고 읊조릴 정도로 충격적인 인성의 소유자(?)였다고도 하는데 지금의 유느님을 생각하면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 후 대상 김용만, 동상 김국진·박수홍, 장려상 김수용은 ‘감자골 4인방’을 결성해 데뷔와 동시에 꽃길을 걸었던 반면 또 다른 장려상 유재석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카메라 앞에만 서면 NG를 내고, 반복되는 실수가 트라우마가 되어 그를 옥죄었다. 잘나가는 동기들과 상반된 자신의 초라한 모습. 포기 직전까지 갔던 그에게 주어진 천금 같은 기회. 그것은 <서세원의 토크 박스>였다.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콩트 위주의 코미디에서는 주목받지 못했던 그가 자유로운 입담을 뽐내는 토크에서는 단연 돋보였던 것이다. 그것이 유느님의 시작이었다. 장려상으로 시작해 기회가 오기만을 절치부심했던 그에게 하늘은 한 번의 기회를 주었고 그는 보기 좋게 그것을 거머쥐었다.

장려상이라는 다소 초라한(?) 시작. 그리고 길고 긴 무명 시절. 지금의 겸손하고 선한 유느님의 바탕에는 그 시절이 있었다. 1등으로 시작해 1등을 유지한 유느님이었다면 어땠을까. 장려상에 실망해 귀를 후비던 모습을 요즘도 종종 보이지 않았을까. 잦은 연예 대상 수상에서 다소 심드렁한 수상 소감을 밝히진 않았을까. 본인의 프로그램에 출연한 신인들의 이름을 자꾸만 틀리는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을까. 작은 일에도 크게 감사하며, 길거리 시민들의 이름을 물어보고,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신인들이 카메라 앞에서 긴장할 때면 조용히 다가가 용기를 북돋워주는 유느님. 어쩌면 그가 겸손한 일인자로서 대중들의 사랑을 오랫동안 받는 이면에는 그가 1등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점일지도 모른다.

다소 장황하고 우아하게 1등이 아니어도 괜찮은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나 역시 1등이 되기 위해 물 밑에서 열심히 물장구를 치고 있다. 방송이 나간 다음 날 아침 실눈 뜨고 시청률을 확인하고, 목표 시청률을 넘었는지, 못 미치면 얼마나 더 올려야 하는지, 같은 시간대 다른 프로그램들은 시청률이 어떤지 체크하고 때때로 기쁨을, 대부분은 좌절감을 맞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때로는 이런 시청률의 경쟁이 없는 유튜브가 차라리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도 한다. <코미디빅리그> 무대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제는 유튜브 부캐 ‘최준’으로 숱한 여성의 마음을 훔치는 김해준을 보며 1등도 잊히는 시대의 새로운 활로를 목격한다. 이제까지는 <코미디빅리그>에서 괜찮은 캐릭터나 코너를 만나 주목받고, 크고 작은 예능에 섭외되었다가 결국 스타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단계였는데, 이제는 그사이에 유튜브라는 기회의 땅이 활짝 열려버렸다. 1등이 없는 곳 혹은 모든 채널이 각자에게 1등인 곳. 구독자 숫자대로 줄 세우지 않고, 오늘 하루 가장 핫한 영상에 주목하는 곳. 나의 영상을 봐주는 구독자들에게만큼은 내가 1등인 유튜브가 1등마저 잊히는 냉정한 시대의 도피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구독자 50명의 내 유튜브를 보고 또다시 좌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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