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밤 산책길에 마주친 야생화 | 지큐 코리아 (GQ Korea)

서울의 밤 산책길에 마주친 야생화

2021-06-11T13:25:38+00:00 |travel|

여름밤을 거닐다 마주친 생기들.

할미꽃 백범광장
밀레니엄 힐튼 서울 앞, 남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을 따라 백범광장을 어슬렁거리는 길에 커다란 엉겅퀴인가 듬성한 민들레인가 갸웃거리게 만드는 식물을 만났다. 사진을 찍으면 꽃 이름을 알려주는 명석한 어플이 단박에 일러준 정체는 할미꽃. 소문으로만 들은 그 생명체는 허리가 굽은 보라색인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곁에 구부러진 보라색 꽃도 보인다. 하나 할미꽃은 보라색 꽃잎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머리카락마냥 열매가 맺히고 종국에 그 열매가 하얗게 부풀어오르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백발 노인이라 붙은 이름이란다. 사진은 하얗게 쇤 머리칼이 복슬복슬해지기 전 할머니의 모습이다. 가닥가닥 성성한 머리칼이 “‘빠마’하지 않으면 형편없다”며 한 달에 한 번씩 미장원 가던 우리 할머니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가 그리워지는 걸 보니 할미꽃이 분명하네.

백송 창경궁
호젓한 운치 속에서 산책하고 싶을 때 궁을 찾는다. 경복궁과 국립고궁박물관 사이 뜰에는 씨앗에 유분이 많아 호롱불 켤 때 사용했다는 쉬나무가 남아 있고, 덕수궁 석어당 앞 살구나무는 꽃을 피우고 지우고 또 피운 지 4백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곳 창경궁에는 어둠이 내릴수록 빛나는 나무가 있다. 백송, 하얀 소나무다. “원래 고향은 중국 베이징 부근이며, 조선시대 사신으로 간 관리들이 귀국할 때 솔방울을 가져다 심은 것”이 백송 앞 푯말에 적힌 탄생 비화다. 어릴 때는 푸른빛이고 나이 들수록 흰 얼룩이 많아져 하얗게 보인다. 당시 국내 여기저기 심었다는 백송은 생장이 느리고 번식이 어려워 지금은 다섯 그루만 남았다. 이국 땅 하얀 소나무의 신비로움에 고이 품고 왔을 작은 솔방울을 이곳 창경궁 연못 앞에 심으며 그이는 무슨 마음을 함께 묻었을까.

은방울꽃 선정릉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 Lily of the Valley>이  ‘은방울꽃’의 오역이라는 주장을 보았다. 은방울꽃의 영문명이 ‘Lily of the Valley’이기 때문이다. 은방울꽃이라 번역하는 게 맞는지, 풀어 해석하여 골짜기의 백합이라 하는 게 옳은지 의견이 분분한 와중에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주인공이 ‘골짜기에 사는 백합 같은 여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므로 <골짜기의 백합>이라 하는 데 힘이 실린다는 불문과 교수도 있었다. 무엇이 좋을지 소설을 읽지 않은 입장에서 할 말은 없으나, 은방울꽃 실물과 마주한 바로는 <은방울꽃>이라 했어도 틀리지 않은 번역이지 않을까 싶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방울들이 깊고 어두운 계곡처럼 우거진 커다란 잎사귀들 틈에서 은밀하고 분명하게 피어난 모양새는 ‘Lily of the Valley’ 그 자체이므로.

죽단화 소월로
지난여름, 회현동 백범광장에서 남산도서관 앞을 지나 한남동 하얏트 호텔까지 이어지는 남산둘레길 소월로를 따라 걷다 어느 집 울타리를 지날 때, 울타리 너머 강아지마냥 고개를 내민 노란 꽃을 만났다. 그 모습이 귀엽고 예뻐 꽃 좋아하는 아버지가 그러하듯 휴대 전화 카메라를 바짝 대어 찍어둔 게 어느새 1년 전. 그사이 다시 여름이 찾아와 같은 길을 걷다 노란 꽃무더기를 또 보았다. 지지 않고 피어난 게 반가워 이번엔 알아두어야지 찾아낸 이름은 죽단화다. 비슷하게 생긴 황매화보다 꽃잎이 겹겹이 피어 겹황매화라고도 한다. 4월 말부터 5월에 걸쳐 햇빛 아래서면 그곳이 어디서든 잘 자라나 여름을 맞이한다. 이름을 알고 나니 가는 곳마다 눈에 채인다. 늦봄과 초여름 날 어디서든, 탁구공보다 작고 꽃잎이 촘촘이 포슬거리는 노란 털뭉치 같은 꽃무더기가 있다면 그것이 죽단화다.

꽃창포 혹은 붓꽃 국립고궁박물관
서촌이라 부르는 통의동 쪽에서 경복궁으로 가고자 할 때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까지 갈 필요 없이 서촌 방향으로 난 측면 입구로 들어서면 된다. 그러면 국립고궁박물관 뜰을 지나게 되는데 문제는, 뜰에 핀 꽃과 나무가 너무도 다채로워 목적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숲처럼 울창하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종류가 많고 식물마다 이름표와 소개글이 있어 야외 식물원을 둘러보는 것 같다. 이곳에서야 나는 붓꽃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여름에 물가에 피는 보라색 꽃이 붓꽃인 줄 알았는데 물가나 습지에서 핀다면 그것은 대개 꽃창포다. 더 확실하게 구분하는 법은 보라색 꽃잎 위 무늬가 노란색 길쭉한 삼각형 모양으로 단순하면 꽃창포이고, 화려한 얼룩무늬라면 붓꽃이다. 피기 전 꽃봉오리가 붓과 닮은 점은 둘 다 비슷하다. 그럼 문제, 사진 속 꽃은 꽃창포일까 붓꽃일까?

삼색버드나무 용산가족공원
지난봄엔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까지 이어지는 산책길이 흡족스러워 즐겨 찾던 용산가족공원에 오랜만에 갔을 때 그간 보지 못한 색감의 나무를 보았다. 초록색과 흰색과 연분홍색이 한데 모여 바람에 하늘거리는 나무. 아주 쾌청한 날 석양의 색감을 한 몸에 품은 나무. 용인 한택식물원의 식물정보사전에 따르면 이 나무는 무늬개키버들이다. 삼색버드나무라고도 한다. 영문명으로는 화이트 핑크 셀릭스, 한자로는 백로금 白露錦이다. ‘백로’는 흰 이슬, ‘금’은 비단을 뜻한다. 녹색이던 새순이 점차 옅어져 6월이 되면 전체가 하얘지고, 이후 희미한 복숭아색이나 분홍색을 띤다. 어쩌면 이 나무는 지난봄 이곳에 없었던 게 아니라 같은 위치, 다른 색으로 자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순환은 식물이 지닌 신성스러운 무엇. 다음 계절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