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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밤 산책길에 마주친 야생화

2021.06.12김은희

여름밤을 거닐다 마주친 생기들.

할미꽃 백범광장
밀레니엄 힐튼 서울 앞, 남산 방향으로 이어지는 한양성곽을 따라 백범광장을 어슬렁거리는 길에 커다란 엉겅퀴인가 듬성한 민들레인가 갸웃거리게 만드는 식물을 만났다. 사진을 찍으면 꽃 이름을 알려주는 명석한 어플이 단박에 일러준 정체는 할미꽃. 소문으로만 들은 그 생명체는 허리가 굽은 보라색인 줄 알았는데. 그러고 보니 곁에 구부러진 보라색 꽃도 보인다. 하나 할미꽃은 보라색 꽃잎이 떨어지면 그 자리에 머리카락마냥 열매가 맺히고 종국에 그 열매가 하얗게 부풀어오르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백발 노인이라 붙은 이름이란다. 사진은 하얗게 쇤 머리칼이 복슬복슬해지기 전 할머니의 모습이다. 가닥가닥 성성한 머리칼이 “‘빠마’하지 않으면 형편없다”며 한 달에 한 번씩 미장원 가던 우리 할머니 것 같기도 하고. 할머니가 그리워지는 걸 보니 할미꽃이 분명하네.

백송 창경궁
호젓한 운치 속에서 산책하고 싶을 때 궁을 찾는다. 경복궁과 국립고궁박물관 사이 뜰에는 씨앗에 유분이 많아 호롱불 켤 때 사용했다는 쉬나무가 남아 있고, 덕수궁 석어당 앞 살구나무는 꽃을 피우고 지우고 또 피운 지 4백여 년이 지났다. 그리고 이곳 창경궁에는 어둠이 내릴수록 빛나는 나무가 있다. 백송, 하얀 소나무다. “원래 고향은 중국 베이징 부근이며, 조선시대 사신으로 간 관리들이 귀국할 때 솔방울을 가져다 심은 것”이 백송 앞 푯말에 적힌 탄생 비화다. 어릴 때는 푸른빛이고 나이 들수록 흰 얼룩이 많아져 하얗게 보인다. 당시 국내 여기저기 심었다는 백송은 생장이 느리고 번식이 어려워 지금은 다섯 그루만 남았다. 이국 땅 하얀 소나무의 신비로움에 고이 품고 왔을 작은 솔방울을 이곳 창경궁 연못 앞에 심으며 그이는 무슨 마음을 함께 묻었을까.

은방울꽃 선정릉
프랑스 사실주의 작가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 <골짜기의 백합 Lily of the Valley>이  ‘은방울꽃’의 오역이라는 주장을 보았다. 은방울꽃의 영문명이 ‘Lily of the Valley’이기 때문이다. 은방울꽃이라 번역하는 게 맞는지, 풀어 해석하여 골짜기의 백합이라 하는 게 옳은지 의견이 분분한 와중에 소설의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 주인공이 ‘골짜기에 사는 백합 같은 여자’의 모습으로 그려지므로 <골짜기의 백합>이라 하는 데 힘이 실린다는 불문과 교수도 있었다. 무엇이 좋을지 소설을 읽지 않은 입장에서 할 말은 없으나, 은방울꽃 실물과 마주한 바로는 <은방울꽃>이라 했어도 틀리지 않은 번역이지 않을까 싶다. 새끼손톱보다도 작은 방울들이 깊고 어두운 계곡처럼 우거진 커다란 잎사귀들 틈에서 은밀하고 분명하게 피어난 모양새는 ‘Lily of the Valley’ 그 자체이므로.

죽단화 소월로
지난여름, 회현동 백범광장에서 남산도서관 앞을 지나 한남동 하얏트 호텔까지 이어지는 남산둘레길 소월로를 따라 걷다 어느 집 울타리를 지날 때, 울타리 너머 강아지마냥 고개를 내민 노란 꽃을 만났다. 그 모습이 귀엽고 예뻐 꽃 좋아하는 아버지가 그러하듯 휴대 전화 카메라를 바짝 대어 찍어둔 게 어느새 1년 전. 그사이 다시 여름이 찾아와 같은 길을 걷다 노란 꽃무더기를 또 보았다. 지지 않고 피어난 게 반가워 이번엔 알아두어야지 찾아낸 이름은 죽단화다. 비슷하게 생긴 황매화보다 꽃잎이 겹겹이 피어 겹황매화라고도 한다. 4월 말부터 5월에 걸쳐 햇빛 아래서면 그곳이 어디서든 잘 자라나 여름을 맞이한다. 이름을 알고 나니 가는 곳마다 눈에 채인다. 늦봄과 초여름 날 어디서든, 탁구공보다 작고 꽃잎이 촘촘이 포슬거리는 노란 털뭉치 같은 꽃무더기가 있다면 그것이 죽단화다.

꽃창포 혹은 붓꽃 국립고궁박물관
서촌이라 부르는 통의동 쪽에서 경복궁으로 가고자 할 때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까지 갈 필요 없이 서촌 방향으로 난 측면 입구로 들어서면 된다. 그러면 국립고궁박물관 뜰을 지나게 되는데 문제는, 뜰에 핀 꽃과 나무가 너무도 다채로워 목적지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숲처럼 울창하지는 않지만 소소하게 종류가 많고 식물마다 이름표와 소개글이 있어 야외 식물원을 둘러보는 것 같다. 이곳에서야 나는 붓꽃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여름에 물가에 피는 보라색 꽃이 붓꽃인 줄 알았는데 물가나 습지에서 핀다면 그것은 대개 꽃창포다. 더 확실하게 구분하는 법은 보라색 꽃잎 위 무늬가 노란색 길쭉한 삼각형 모양으로 단순하면 꽃창포이고, 화려한 얼룩무늬라면 붓꽃이다. 피기 전 꽃봉오리가 붓과 닮은 점은 둘 다 비슷하다. 그럼 문제, 사진 속 꽃은 꽃창포일까 붓꽃일까?

삼색버드나무 용산가족공원
지난봄엔 없었다. 국립중앙박물관까지 이어지는 산책길이 흡족스러워 즐겨 찾던 용산가족공원에 오랜만에 갔을 때 그간 보지 못한 색감의 나무를 보았다. 초록색과 흰색과 연분홍색이 한데 모여 바람에 하늘거리는 나무. 아주 쾌청한 날 석양의 색감을 한 몸에 품은 나무. 용인 한택식물원의 식물정보사전에 따르면 이 나무는 무늬개키버들이다. 삼색버드나무라고도 한다. 영문명으로는 화이트 핑크 셀릭스, 한자로는 백로금 白露錦이다. ‘백로’는 흰 이슬, ‘금’은 비단을 뜻한다. 녹색이던 새순이 점차 옅어져 6월이 되면 전체가 하얘지고, 이후 희미한 복숭아색이나 분홍색을 띤다. 어쩌면 이 나무는 지난봄 이곳에 없었던 게 아니라 같은 위치, 다른 색으로 자리했을지도 모르겠다. 생명의 순환은 식물이 지닌 신성스러운 무엇. 다음 계절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

    피처 에디터
    김은희
    포토그래퍼
    박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