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에 대한 일곱 가지 단상 | 지큐 코리아 (GQ Korea)

번역에 대한 일곱 가지 단상

2022-03-17T13:21:42+00:00 |book|

우리는 번역의 결과물인 책을 주어지는 대로 읽기만 하지 않는다. 텍스트를 해석함으로써 번역의 과정에 참여하고, 그렇게 두 언어 사이의 다리를 건너간다.

1 ― 스코틀랜드로 여행 갔을 때의 일이다. 시간이 느리게 지나가는 어느 시골 마을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나는 틈나는 대로 하숙집 근방의 산에 올랐다. 처음 올랐을 때 나는 그곳을 언덕이라 여겼다. 나에게 산은 나무가 울창하고, 꽃과 풀이 늘비하며, 크고 작은 바위가 여기저기 웅크리고 있고, 골과 골 사잇길로 강을 찾아 계곡물이 하산하는, 온갖 생물과 무생물이 무심히 놓인 듯 혼재해 있으면서도 스스로[自] 그러하게[然] 나름의 조화와 균형과 질서를 이룬 복합성의 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나무도 바위도 없었고 물이 흐르지 않았다. 내 관념 속의 산을 구성하는 여러 항목 중에서 빈 곳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그곳을 산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곳은 높은 지대에 있는 목초지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하숙집 아저씨는 그 언덕을 산이라 불렀다. 그와 나 사이, 그의 산과 나의 산, 그의 언어와 나의 언어 사이에는 어떤 틈이 있었다. 그 틈을 채우기 위해서는 나의 산 위에 그의 산을 덧그려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겨난 산은 이전보다 더 풍부해진 의미를 담고 있을 터였다.
2 ― 모세가 십계명을 받기 위해 오른 시내산의 모습은 원효가 수도하러 들어간 소요산의 자태와 사뭇 다르다. 모진 광물적 세계와 노긋한 식물적 세계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유일신을 섬기는 신앙과 내가 곧 부처라는 불이의 가르침만큼이나 다르기에 그 세계에서 솟아난 산의 모습 또한 그만큼 판이하다. 둘 다 산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지만 그 동일성 아래에는 지리적, 환경적 차이는 물론이거니와 역사적, 언어적, 경험적 차이라는 뿌리가 깊게 자리하고 있다. 그 뿌리를 속속들이 다 살필 수는 없겠지만 문득 헤아린다면 다시금 산이라는 동일성에 조금 더 가까워질지도 모른다. 이러한 동일성으로서의 산은 차이를 겪은 연후에 도달한 경지로서의 산이다.


3 ― 차이를 보지 않은 채 동일성을 얘기하는 것은 정치 슬로건처럼 공허하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있다 해도 전달되지 않으며, 전달되어도 공명하지 못하는 허언이다. 우리는 흔히 소통의 토대를 언어라고 보지만 코스모스로서의 우주가 카오스에서 생성되었듯이 이 조화의 기저에는 소음이 있다. 소음이라는 카오스 속에서 코스모스를 발견하는 노력이 곧 소통이다. 이것은 자연처럼 스스로 그러하지도, 운명처럼 그저 주어지지도 않는다. 그런 이유로 왜 소통이란 이다지도 어려운가 안타까워하기보다는 소통이 이루어지는 기적에 감사해야 한다. 더불어 그 기적이 우발적 사건으로 남지 않도록 부단히 애써야 한다.
4 ― 번역은 서로 다른 두 언어 사이에 소통의 다리를 놓는 일이다. 번역가는 그 다리를 짓기 위해 여러 자원을 구비한다. 어학 실력은 물론이거니와 예리한 언어 감각, 모국어에 대한 사랑, 관련 분야를 꿰뚫는 깊이 있는 지식 등. 그리고 여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 외에 절대 지나칠 수 없는 하나가 더 있다. 존 버거는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풀어 썼다. “번역은 두 언어 사이의 양자관계가 아니라 삼각관계이다. 삼각형의 세 번째 꼭지점은 원래의 텍스트가 쓰여지기 전 그 단어들 뒤에 놓여 있던 것이다. 진정한 번역은 말해지기 전의 무언가로 돌아가야 한다. 번역가는 원 텍스트를 읽고 또 읽으며 그것을 뚫고 나아가 그 텍스트를 낳은 비전이나 경험에 닿으려 애쓴다. 그런 다음 거기서 찾은 것을 모으고 거의 말없이 떨리는 이 무엇을 가지고 와 번역의 결과가 되는 언어 뒤에 놓는다. ” 텍스트를 단지 문법의 지배를 받는 단어의 배열로 본다면 이러한 노력은 무용하다. 그러나 텍스트는 한 문화의 집적체인 언어로 이루어진 까닭에 그 언어를 낳은 여러 조건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온전히 해석되지 않는다.


5 ― 번역은 해석이다. 번역은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옮기는 데 그치는 독해가 아니다. 피아니스트들이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자신만의 피아니즘으로 해석하듯이, 번역가는 스스로 쌓은 경험과 지식으로, 달리 말해 수많은 차이를 수용함으로써 외국어 텍스트라는 악보를 해석하고 연주한다. 동의하든 이의를 제기하든, 찬사를 보내든 의문을 품든 해석에 참여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러한 참여가 곧 독자의 해석이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나쓰메 소세키는 “I love you”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독해하지 않았다. 그는 이 말을 “달이 아름답네요”라고 해석했다. 많은 일본인이 소세키의 해석에 감명했기에 이 표현은 애정 고백의 대사로 널리 사용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해석은 그 누구와도 공명하지 못한 채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이내 사라졌을 것이다.
6 ― 모든 번역서는 번역가의 주석이 달려 있지 않더라도 기본적으로 주석서이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나 노자의 <도덕경>처럼 지금의 우리와 시간적, 공간적, 언어적으로 먼 텍스트에만 번역가의 주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번역가가 해석한 것을 상세히 밝혀야 할 땐 필시 주석이 붙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주석은 단어와 문장과 행간 속에 녹아 들어간다. 때로는 번역가의 손길을 알아볼 수 있는 물리적 종합으로, 때로는 원 텍스트와 구별하기 어려운 화학적 용해로.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하늘을 sky나 空(소라)으로 옮기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의 하늘을 heaven이나 天(덴)으로 옮기는 것은 윤동주에게 이 하늘과 저 하늘이 언어적, 심정적으로 구분됨을 영어권이나 일본어권 독자들에게 별다른 주석 없이 설명한다. 우리말에 “하늘이 부끄럽지도 않나”라는 관용 표현이 있다는 것과 시인이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는 해설을 더불어 적어준다면 그에게 이르는 다리는 좀 더 넓어질 것이다.


7 ― 인공지능이 바흐의 스타일을 학습해 만든 곡이 바흐의 작품과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에 도달했다고 한다. 바흐풍의 칸타타를 흘러가는 대로만 듣고자 한다면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딥바흐 Deep Bach가 ‘창작’한 곡을 듣는다 해도 큰 아쉬움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매주 한 작품씩 써내야 하는 생계 유지의 노동에서 나온, 그럼에도 영성으로 충만한 그의 칸타타에 공명하고 싶다면 딥바흐는 분명 답이 될 수 없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오류 없는 번역기가 등장할 것은 누구나 예상하고 있다. 인공지능이 수십 권에 달하는 우리말 <논어>의 패턴을 학습하게 되면 고전어 번역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번역에서 기대하는 것이 두 언어 간의 완전무결한 변환은 아닐 것이다. 미스터치 하나 없는 완벽한 연주를 들으려면 자동연주 피아노나 가상악기를 접하면 되겠지만, 우리가 연주자의 소리를 찾아 듣는 이유는 그만이 낼 수 있는 고유의 음색 때문이다. 그 음색을 내기 위해 연주자가 겪었을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을 자기 한계와 마주하는 과정을 추체험하려는 것이다. 우리는 번역의 결과물인 책을 주어지는 대로 읽기만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텍스트를 해석함으로써 번역의 과정에 참여한다. 그렇게 두 언어 사이의 다리를 건너간다. 글 / 박정훈(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