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으로의 초대.
Junior Lodge Suite
칠링한 뉴질랜드산 소비뇽 블랑을 오픈하고, 풍경 앞에 선다. 뉴질랜드 북섬의 타우포 호수 인근의 후카 로지.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이곳 스위트룸에 묵으며 송어 낚시를 즐겼고, 네덜란드, 벨기에, 덴마크, 룩셈부르크의 왕족, 귀족들도 이곳을 단골 삼았다. 와인 셀러가 있는 지하 동굴, 6만8천 제곱미터 규모의 정원, 로지 스타일의 프라이빗 다이닝도 다 그럴 만한 이유의 하나지만, 백미는 매년 5월부터 9월에 팔뚝만 한 무지개송어와 갈색 송어를 낚아 올릴 수 있는 로지 앞 ‘와이카토강’. 손꼽히는 플라이 피싱 지역으로, 개인 낚시 가이드를 동반하고 제대로 된 손맛을 볼 수 있다. 낚시가 뜻대로 되지 않아도 위안은 있다. 풍경이다. 소비뇽 블랑 한 잔을 비우고 다음 잔을 따를 때쯤 되니, 장면으로부터 강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The Hemingway Presidential Suite
헤밍웨이는 <강을 건너 숲속에서>에서 그리티 팰리스를 이렇게 묘사한다. “최고의 호텔이 모인 도시에서도 최고인 호텔.”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서머싯 몸, 존 러스킨 등 대문호가 즐겨 묵은 베네치아 전설의 호텔. 영화 에서는 우디 앨런이 줄리아 로버츠와 함께 대운하가 바라다보이는 이곳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고, 헤밍웨이 스위트룸에서 묵었다. 모히토, 민트 줄렙을 사랑했다고 알려진 헤밍웨이지만, 이곳에서만은 클래식한 레시피로 만든 마티니를 마시지 않았을까? 로마에 가면 로마법, 베네치아에선 베네치아법을 따라야 하니까.
Executive King Room
라스베이거스의 밤 풍경은 그 자체로 쇼 무대 같다. 누가 누가 더 멋지고 화려한가를 뽐내는 대륙의 귀여운 탐욕은 빌딩 디자인과 네온사인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시저스 팰리스의 플라밍고 호텔에서는 저 멀리 하이롤러가 엽서처럼 창에 걸린다. 그 곁에는 블링블링하게 치장한 건물들이 한껏 제 빛을 뿜어낸다. 카지노에는 영 관심이 없어 라스베이거스의 밤에 의 샬롯 같은 고독을 느끼는 여행자에게 이런 풍경들은 감사할 따름이다. 플라밍고 호텔의 이그제큐티브 키 룸의 하룻밤 가격은 1백달러 남짓. 이 화려한 풍경을 밤새 볼 수 있는 가격치고는 너무 싸다.
Caroline Astor Suite
영화보다 영화 같은 스토리. 알프레드 히치콕은 5층 스위트룸에 최소 12번 이상 머물렀고, 살바도르 달리는 1934년부터 40년 동안 매년 겨울마다 아내와 함께 1601호에 투숙했다. <7년 만의 외출> 촬영 당시 마릴린 먼로는 남편 디마지오와 크게 다투었는데, 싸움은 호텔의 1105호에 투숙할 때까지 이어졌다.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 함께 묵으며 ‘Happy Christmas’를 녹음했다. 호텔은 여러 차례 리모델링을 거쳐 역사는 뒤죽박죽되었을지 모르나 하나 분명한 건, 모두 호텔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 블러드 메리 칵테일이 탄생한 이 호텔에서는 뉴욕 풍경을 바라보며 블러드 메리를 마셔야 마땅할 것이다.
Girijaala Suite
평화로운 산. ‘아만기리’는 산스크리트어로 이토록 낭만적인 이름을 지녔다. 아만 기리의 기리자라 스위트 Girijaala Suite에 들어서면, 그랜드캐니언과 이어지는 끝 모를 협곡과 붉은 사막의 풍경이 방 안으로 스민다. 호텔은 풍경의 일부요, 풍경은 그 자체로 호텔의 DNA다. 리조트보다 더 오래 이곳에 살아온 바위의 형상을 훼손하지 않은 채 수영장을 설계한 배려만 봐도 리조트가 지향하는 바를 쉬이 짐작할 수 있다. 방 안에 거대한 그림처럼 들어오는 풍경을 한없이 바라보며 밥 딜런의 크래프트 버번위스키 ‘헤븐스 도어’를 한잔 들이켠다. 포크 록의 향을 맡는 기분으로, 시보다 아름다운 그의 노랫말을 삼키는 느낌으로. 그렇게 들이켜다 보면, 황량한 사막의 처절한 아름다움까지 내게 온다.
Corner Room
모든 관광객이 떠나고, 마침내 산 위의 고요가 찾아온다. 구름이 빚은 끝없이 하얀 바다는 불멸의 눈으로 덮인 산과 접히듯 마주하며 서늘하고 눈부신 광경을 이룬다. 리기산 꼭대기 유일의 호텔, 리기 쿨름 창밖의 광경이다. 1878년 8월, 스위스 베기스로부터 리기 쿨름에 당도한 마크 트웨인은 이 호텔에 머물며 일출을 바라본 경험을 자신의 유랑기에 소상히 적는다. “우리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거의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었다. 술에 취한 듯한 황홀경 속에서 다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풍경을 삼켰다.” 그 취할 듯 숨막히는 풍경의 미학 앞에서 그는 술조차 필요치 않았던 모양이다.
Tsukihashi
풍경이 그림으로 박제되는 방. 호시노야 교토의 츠키하시 객실은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만으로 충분한 방이다. 커다란 창밖으로 오이 Oi강의 사계절은 화장기 없는 민낯으로 시시각각 담긴다. 강 위를 총총 떠다니는 배와 매일, 매 시각 조금씩 다른 풍경이 정적인 방을 영화보다 더 생생한 공간으로 바꾼다. 서로 다른 초록빛에 1백 가지라도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 같은 초여름의 오후 2시에는 교토 옆동네 나라에서 난 하루시카의 카라구치 사케를 샴페인처럼 칠링해 마시고, 오구라 Ogura산의 단풍나무에 붉은빛이 스미는 가을의 새벽 2시에는 히비키 21년을 니트로 홀짝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Estate View Suite
“와인은 병에 담긴 시.” 로버트 루이 스티븐슨은 나파밸리를 방문한 뒤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했던가. 알릴라 나파밸리, 그중에서도 에스테이트 뷰 스위트룸에 당도하면 명화가 눈앞에서 살랑살랑 재생되는 기분이다. 나파밸리에서 가장 오래된 포도밭, 베링거 빈야드가 발코니 너머 펼쳐지는 이 객실에 묵는 동안은 마치 내가 근사한 포도밭 주인이라도 된 기분이 든다. 살랑 불어오는 포도밭의 향기를 맡으며 시를 읽는 기분으로 와인을 마시고, 포도 따는 풍경을 눈으로 담는다. 낮에는 오크 향 폴폴 나는 샤도네이로 환호하고, 밤에는 묵직한 카베르네 소비뇽 한잔을 들고 아웃도어 벽난로 앞으로 간다.
Premium Gehry Room
창으로 실려 들어오는 향기마저 풍경의 일부가 될 수 있을까. 와인의 도시 ‘엘시에고’의 호텔 마르케스 드 리스칼 럭셔리 컬렉션 엘시에고에서는 어쩌면 그렇다. 천재적이다 못해 때로는 미치광이처럼 느껴지는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스페인 왕실 지정 와인인 ‘마르케스 데 리스칼’의 오랜 와인 셀러를 호텔로 탈바꿈시켰다. 게리 스위트, 디럭스 게리, 프리미엄 게리 등의 룸 이름만 봐도 짐작되듯 모든 객실에는 건축가의 아이덴티티가 오롯이 녹아 있다. 사각이 아닌 구부러진 프레임 안에서 빚어진 기묘한 풍경을 벗 삼아 로컬 와인을 훌훌 들이켠다. 어떤 와인이든 이 호텔의 선택이라면 그것이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