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드벨벳은 아이돌의 혁명을 꿈꾸는가?

레드 벨벳은 팬들에게 애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저마다 레드벨벳을 다르게 이야기한다. 여느 걸그룹처럼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 있다. “뿌야”나 “삐삐삐”, “루키루키” 같은 귀여움 성분이 수시로 튀어나온다. (그렇다, 귀여워서 레드벨벳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 또한 많은 곡이 표면적으론 특이한 소재를 택할지언정 평범하고 고전적인 팝의 주제를 다룬다. ‘러시안 룰렛’은 사랑의 줄다리기를, ‘덤덤’은 연애의 현기증을, ‘7월 7일’은 아득한 그리움을 담고 있으니 말이다. (덜 알려진 곡이지만 <텔레몬스터> 삽입곡인 ‘여시주의’도 치명적인 매력을 뽐내는 내용이다.)

그러나 살벌하게 찢어지는 비트를 두들겨대는 ‘아이스크림 케이크’나, 집요하게 서로를 살해하려는 ‘러시안 룰렛’의 뮤직비디오는 영 심상치 않아 보인다. ‘행복’에선 ‘힙’하게 번쩍이는 만화경 이미지 앞에서 “어른들이 짠해 보여”라고 노래하기도 한다. ‘오토매틱’이나 ‘비 내추럴’처럼 묵직하고 고혹적인 알앤비를 들려주기도 한다. 사람들마다 다른 레드벨벳을 좋아하는 것이 가능하다.

반면 데뷔 3년이 돼가는 지금까지도 정체가 불분명한 게 약점이다. 웬만큼 잘하는 아이돌도 콘셉트가 선명하지 않으면 시류 속에 묻히고 마는 시장이다. ‘레드’와 ‘벨벳’ 콘셉트로 나눠서 활동한다는 기획부터 다소 불분명했는데, 거칠게 나누면 댄스와 알앤비-발라드로 해석될 수는 있으나 그 경계는 애매하다. 새 앨범이 나 올 때마다 “이번엔 레드와 벨벳을 함께…”라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콘셉트의 구분이 가능한 사람이 정말 있기는 한 건지도 의심스럽다. 다만 레드벨벳에 걸쳐 있는 그 모든 것을 소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SM 엔터테인먼트다.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이 레드벨벳에게서 (귀여운) 다섯 멤버보다 소속사의 강한 자의식을 먼저 읽는 것은 그래서인지 모른다.

이렇게 모든 것이 애매해 보이는 레드벨벳을 정의할 수 있는 한마디는 차라리 복잡성이다. 레드벨벳이 내놓는 콘텐츠에는 늘 여러 개의 층위가 복잡하게 깔려 있다. 일례로 ‘7월 7일’은 물과 어둠, 촛불, 좁은 복도 등의 이미지를 동원해 세월호 참사 추모곡이란 설이 자자했다. 아이돌 뮤직비디오의 흔하디흔한 단체컷조차 한 명이 자꾸 빠져 있거나 이동하거나해서 희생자와 생존자를 각각 상징한다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이것은 ‘설’이다. 무엇 하나 공식적으로 확인되지 않았으며, 아이돌 세계에서 공식 확인되지 않은 것은 곧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레드벨벳은 늘 모호한 지점들을 배치해 자꾸만 각자의 상상을 보태도록 유도한다. 걸그룹의 음반 커버에 단체 사진이 실리는데 한 명만 얼굴이 흐리게 나오다니? ‘그냥 어쩌다 보니’ 벌어지기엔 너무나 예외적인 일이 대체 무슨 필연으로 일어난 것일까, 같은 것이다.

의미심장한 곡은 그밖에도 여럿이다. ‘덤덤’은 사랑에 빠져 어쩔 줄 몰라 하며 바보 같아지는 마음을 표현한 곡이지만 뮤직비디오가 이를 그려내는 방식은 매우 특이하다. 공장에서 찍어낸 예쁘지만 뻣뻣한,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한 소녀들이다. 마치 아이돌 산업을 풍자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표면적으론 아찔한 연애 감정을 노래하는 ‘러시안 룰렛’은 한껏 무해해 보이는 소녀들이 과격한 연쇄 범죄를 일삼는다. 돌핀 팬츠와 테니스 스커트, 테니스공 등의 클리셰는 ‘청순’과 ‘무해’로 표상되는 걸 그룹 트렌드에 대한 교묘한 패러디로 보인다. 또한 그 천진한 표정은 위험을 실감하지 못하고 섬뜩한 장난을 저지르는 어린아이를 묘사한 듯하고, 어린 소녀들을 향한 관음에 경고를 던지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사람들은 아이돌 콘텐츠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대략 알고 있다. 모든 것은 기획자가 배후에서 내린 결정들이며, 그것은 가수의 ‘진심’과는 거리가 있다. 그렇다면 아이돌 기획자가 아이돌을 조종해 아이돌을 풍자하고 있나? 아이돌의 소외와 거짓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나?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나? 또는 그렇게 해도 장사에 지장이 없나? 감상자는 뭘 받아들이면 되나?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면 심박이 “삐삐삐”하고 커지듯 층위만 더해갈 뿐이다.

좋다, 레드벨벳은 아무튼 복잡하다. 골치 아픈 세상에서 아이돌 걸그룹마저 복잡하다니 속 시끄럽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레드벨벳이 지지 받아야 할 이유는 따로 있다. 켜켜이 쌓인 층위들 속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레드벨벳은 ‘다른 아이돌보다 복잡한 것’이 아니다. 다른 아이돌과 확연한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그 복잡성이 필요한 것이다.

‘루키’의 무대 마지막에는 얼굴을 중심으로 팔을 휘두르는 동작이 등장한다. 귀엽다. 이를 걸그룹의 애교라고 받아들여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곡은 연애 상대에게 “좀 더 바짝 다가와” 달라는 요청을 하면서 “그래 옳지 옳지” 라고 격려한다. 상대의 매력에 흔들리는 자신을 노래하지만 분명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다른 부분의 안무는 전혀 다르다. 같은 구절이라도 곡의 전반부에는 훨씬 절도 있는 안무가 배치돼 있고, 나머지 시간 동안 레드벨벳은 좌우로 활기차게 뛰어다닌다. 선배 그룹 에프엑스의 일렉트로닉 노선과 애써 구별 짓던 힙합 기반의 사운드 속에서, 결국 이 ‘애교’는 관객을 향한 어필이라기보다, 곡에서 노래하는 상대를 내려다보는 행동이다. 마치 어른이 아기 앞에서 방긋 웃으며 아기 목소리로 말을 걸 듯이.

그러고 보면 무대에서의 얼굴 표정도 어딘가 이색적이다. 다채로운 표정을 드러내며 웃는 것은 주로 슬기와 웬디다. 반면 조이와 아이린은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순간이 많다. 즐겁고 유쾌한 감상을 전달하는 것은 대부분의 걸그룹에게 기본이고 레드벨벳도 이를 잘 해낸다. 하지만 이들은 관객에게 애교를 부려 즐겁게 해주는 역할은 좀처럼 맡지 않는다. 비교적 ‘착한’ 미녀상인 멤버들이 다소간 뻣뻣한 모습을 보이며 벽을 칠 때, 눈빛이 예리하며 쾌활하고 씩씩한 멤버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유쾌한지 보여준다. 그렇게 이들의 무대는 일방향이다. 데뷔곡 ‘행복’에서 연인의 존재를 아예 삭제한 채 “난 나라서 행복해”라고 노래하던 그것이다. 레드벨벳은 자존감을 지켜내는 가수다. “버튼은 내가 Push”한다며 받아들이라고 하는가 하면(‘러시안 룰렛’), “맘이 두근두근”거리는 것도 “네 허릴 감싸는 내 손” 때문이다(‘아이스크림 케이크’). 레드벨벳은 관객에게 친밀한 여자친구가 돼주지도 않고, 마음의 문을 두들길 기회를 주지도 않는다. 그저 간신히 귀여운 사람들이 활달하게 뛰어다니며 공연하는 것을 감상할 권리만 허락한다. 미로 같은 콘텐츠를 향해, 확답 받지 못할 상상력을 발휘해 가면서 즐길 수 있도록.

팬과 대중은 아이돌에게 점점 더 노력과 헌신을 기대한다. 지금 아이돌은 무대에서 넘어져도 몇 번이고 일어나며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고 폭언을 들어도 웃어야 한다. 업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들에게도 애교는 필수 요소이고, 그것만으로 점철된 콘텐츠여도 좋다. 부당한 요구조차 ‘소비자 권리’로 이해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아이돌은 무대 위의 공연자에서 점점 더 낮은 곳에 임하는 서비스업 종사자가 되고 있다. 레드벨벳은 이 지위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귀여운 행동을 통해 사랑받길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매력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걸 공연으로 보여줄 뿐이다. 무대 위의 공연자로 남고자 하는 것이다. 우상으로서의 아이돌은 낡은 개념이 되었다. 원래 가수라는 존재는 무대가 끝날 때까지, 객석의 어떤 요구도 들어주지 않았다. 레드벨벳은 그것을 유지하려 한다.

레드벨벳은 시대를 거스르는 아이돌의 역성혁명을 꿈꾸는가? 무리한 가정일 것이다. 레드벨벳의 콘텐츠가 보여주는 복잡성은, 변화하는 아이돌의 위상과 그로 인한 부작용들 속에서 어찌 보면 보수적인 가치를 지켜내고자 궁리하는 과정으로 읽힌다. 마침 결과물이 흥미롭고 매력적이기까지 하다. 레드벨벳이 지지 받아 마땅한 이유는 바로 거기 있다. 이 시도의 성패에 따라 앞으로 한국 대중음악에서 만나게 될 새로운 아이돌의 자세가 달라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너무 멀리 내다볼 의향이 없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아이돌이 숙이고 들어오지 않기 위해 여기까지 하는데, 힘을 보태주고 싶어지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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