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저녁, 조규찬을 만났다. 그는 얼마 전 아홉번째 앨범을 발표했고, 곧 유학을 떠난다. 행복하다는 말이 빗방울처럼 흩날렸다.
해이는 어떤 여자인가? 어머니 같은 아내.
본인의 어머니 같다는 말인가? 그렇다기보다 어머니가 갖는 보편적 정서가 있지 않나? 세상의 어머니, 엄마의 정서. 그런 걸 떠올리면 된다. 너그러움, 지혜로움, 연약하지만 내가정, 남편, 아이 앞에서 한없이 강한 그런 어머니.
아들은 호가 벌써 여섯 살이다. 7집의 ‘언젠가 이 노래를 듣게 될 내 아이에게’라든가 이번의 ‘April Song’ 같은, 자기를 위해 만든 노래를 알아들을 나이 아닌가? 들으면 뭐라고 하나? 본인 노래엔 별 관심이 없다. ‘Jessie’라든가 ‘Morning’ 같은 밝은 노래를 좋아한다. 어릴 때 비틀스를 많이 들었다. 비틀스 노래들이 단순하면서 경쾌한 곡이 많지 않나. 그런 기억이 남아 있는지, ‘Morning’ 같은걸 흥얼거리며 아빠한테 불러보라고 시킨다.
당신도 함께 밝아졌기 때문은 아닐까?
노래할 때 여유가 부쩍 생겼다. 사막에서 네온사인이 걸어가고 아마존이 소멸되고 이런 치열한 얘길 하던 사람이 이제 ‘Jessie’라는 가상의 보트를 만들어 여행을 떠날 만큼. 내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기보다 곡마다 각각의 곡과 어울리는 장치를 쓴 거다. 예컨대 ‘풍선’에서 음의 꺾임 같은 것들. 일부러 정확한 피치로 안 부른 것도 있다. 우연으로 부른 게 아니라 그야말로 연출이다. 연기자가 하나의 캐릭터를 무대 위에서 완성하기 위해 실제로 그런 삶을 경험하듯 실제가 아닌 어떤 모습을 재현하는 거다. 물론 아까 말했듯이 나는 지금 매우 행복한 상태고, 그러다 보니 똑같은 C코드, Dm코드를 잡고 불러도 좀 더 풍성하고 여유로운 소리가 나온다거나 하는 건 있을 거다.
연기로 치면 메소드 연기 같은건가? 그런 연기를 좋아하나?
겪은 경험이나 타고난 면면 이외의 어떤 상황을 훌륭하게 연기하는 배우가 정말 좋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사람들이 철저하게 속을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간혹 직접 겪지 않은 일에 대한 가사나 글을 쓰는 사람에게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을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예술에서 진정성은 관념적인 진정성과 좀 다르다고 본다. 나는 진정성이 있는데 표현이 부족해서 공감이 안 이루어지면 그건 진정성이 아니다. 공감될 수 있는 형태의 기호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림은 어떤가? 미대 출신이기도 하고. 지난 리메이크 앨범의 부클릿 디자인도 당신이 직접 그렸다.
잡지에 연재하는 글에 삽화를 그리고 있다 . ‘육아일기’ 같은 걸 연재하고 있는데, 유학 때문에 계속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글이나 그림에서 어떤 재미를 느끼나? 어떤 측면에선 음악보다 더 재미있다.
본업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도 일이다. 글 쓰고 책 쓰는 것도 일이다. 일기 쓰는 게 아니니까.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독자를 기만하는 거다. 음악이든 글이든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해선 끊임없이 생각하고 말하고 고민해야 한다.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것, 그냥 말로 할 수 있는 걸 글로 옮기는 일 같은 건 어떤 의미에서 창작이라보기 힘들다. 정말 창작이 이루어지려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정확히 알아야 한다. 음악이든 글이든 그런 부분에서 재미를 느낀다.
올해로 22년 차다. 물론 좋으니까 그만큼 해왔겠지만, 하기 싫은 부분도 분명 있을 거다. 어떤 부분에 질리거나 하진 않나? 음악은 꾸준히 좋다. 단, 음악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은 싫다.
음악을 하기 위해 해야 하는 일? 예를 들면 타이틀 곡 뮤직비디오를 틀어준다는 약속과 함께 출연해야 했던 예능 프로그램. 물론 가서는 또 즐겁게 즐기고 왔지만,
인터뷰도 하기 싫은 일 중 하난가?
그렇지 않다. 사실 이 인터뷰는 해이가 꼭 하라고 했다. 하하. 인터뷰라는 건 지면을 빌려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 앨범에 관심을 갖고 나를 기억해주는 사람들에게 하는 거다.좋고 나쁘고를 떠나 꼭 해야 되는 일이라고 본다. 필요 이상의 폐쇄성을 가질 이유는 없다.
실제로 좀 성격이 까다로운 편인가? 조규찬은 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라는 편견이 있다.
평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까다롭지도 않고 특별히 너그럽지도 않고, 너무 착하지도, 너무 못되지도 않은 사람. 대중이든 어떤 누구든 만날 기회가 적다는 게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누가 나에 대해 안 좋은 이야기를 했다는 말을 들을 때가 있다. 그런데 난 그 말을 한 사람을 모른다. 그러니까 화가 안 난다. 모르는 얘기니까, 굳이 해명할 필요도 못느끼고. 그러기엔 너무 음악에 바쁘다.
만날 기회가 없긴 하다. 상대적으로 90년대 초중반에 사람들이 같이 거론하던 유희열, 윤종신, 김현철 같은 뮤지션 중 당신이 가장 대중에게서 멀어져 있다는 느낌이 있다. 가장 꾸준히 음악을 하고 있는 건 당신인데.
누구를 대중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뒤집어질 수 있다고 본다. 오히려 내가 더 가까이 있을 수 있다. 오롯이 음악만으로. 아마 좀 더 많은 대다수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건 나일 거다. 그렇지만 그것이 음악이라는 본질에 끼치는 영향은 없다. 만약 관련이 있다면 노출될 기회가 줄어드는 것 정도겠지.
대다수의 사람들이 조규찬이 멀어졌다고 생각해도 별 상관이 없다는 말인가?
대다수가 내가 멀어졌다는 의식조차 못한다고 생각한다. 날 아예 인지를 못하는 거다. 날인지하는 분들은 내 음악을 찾는 분들이고, 나는 그분들과 가는 거다. 1천만과 함께 걷는 연예인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1만 명하고만 걸어가는 사람도 있어야지. 길게 봤으면 좋겠다. 음반이 진짜로 평가받는 시점은 10년은 지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좀 과장을보태면 내 1집을 지금 얘기하는 게 맞다고 본다. 그만큼 음악이라는 것의 호흡은 길고,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결과를 그 안에 이미 잉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뮤지션들의 음악 프로그램 외 TV 출연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 선택의 문제다. 자기가 안 한다고 해서 가짜 가수다, 가수도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자극적이고 원색적인 인터뷰를 많이 봤다. 그건 책임감 없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사람의 인생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다. 예능 한다고 갑자기 음악적 감각이 떨어지나?
(예정된 인터뷰 시간이 1시간 초과되었고, 몇 번인가 그를 찾는 전화가 왔다.) 휴대폰이 아주 옛날 모델이다.
난 스마트폰 같은 거 쓸 능력이 없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정보량을 담보하는 툴이 너무 빠르다. 너무 방대하고 너무 획기적이라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예를 들어 작은 스테이크 한 점이 있으면 나는 그걸 예순 번 씹어야삼킬 수 있다. 그런데 옆에서 남산만 한 고깃덩어리를 막 급하게 불을 때서 빨리 먹어야된다고 한다. 난 못 먹겠는데, 사람들은 그런 걸 다 먹어치우고 있다. 잘 씹고 그 맛을 음미하고 이럴 새가 없다. 내가 능력이 된다면 그런 큰 고기를 먹겠지만 능력이 안 돼서 그냥 하던 대로 작은 고기 살점을 씹는다.
그런가? 언젠가 당신에겐 ‘X세대’같은 구석이 있었다. 새로운 젊음, 새로운 음악. ‘상어’ 같은 노래는 파격적이었고.
그건 새로움에 대한 갈망이라기보다 시대를 역류하는 모습에 더 가까웠다. 그런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생각의 젊음,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자세, 주된 흐름을 거스르려는 욕망. 그렇다고 그게 꼭 정치적이거나 사회 참여적인 건 아니다. 인간이라면 한번쯤 그리는 절대 자유, 이데아 같은 것들에 더 집중한다. 지금은 표현하는 방법이 좀 달라졌다. 에둘러 말하고, 좀 더 참을 수 있게 되었다. 대신 옛날보다 좀 더 다양한 단서들을 숨기고, 전혀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기고, 계속 재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런 결과물를 통해 기존의 것에 부딪힌다. 옛날처럼 직접 톱을 들이대고 하진 않는다.
당신의 이데아는 뭔가? 이데아가 뭔지 비로소 알아낸 순간이 이데아다. 정확한 이데아를알아낸 사람은 거의 반쯤 신이 아닐까. 아마 남들이 얘기하는 이데아를 취합해서 말은 할수 있을 거다. 그러나 그건 내 것이 아니다.
행복하지만, 아직 이데아는 찾지 못한 걸까? 충분히 행복하다. 내 아들. 내 아내. 그리고 가정. 내가 진정 편히 나를 누일 수 있고 쉴 수있고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행복이 묻어있는 웃음이 뿜어져 나오는 순간들. 만약 그 순간순간을 붙잡아 멈춰 놓을 수 있다면, 그 곳이 이데아겠지.
- 에디터
- 유지성
- 포토그래퍼
- 김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