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dget

오직 40명만 경험한 SUV, 벤틀리 벤테이가

2016.02.12GQ

스페인 남부 마르벨라에서 벤틀리 벤테이가를 시승한 사람은 전 세계에서 딱 40명뿐이다. 벤테이가는 벤틀리 최초의 SUV이자 현존하는 가장 강력하고 빠른 SUV다.

Dragon Red 5

스페인 남녘 끝에 자리한 휴양도시 마르벨라에서 세계 최초로 벤틀리 벤테이가를 시승했다. 이번 행사 내내 벤틀리 CEO 볼프강 뒤르하이머가 함께 했다. 그는 “전 세계에서 딱 40명의 자동차 저널리스트만 초청한 아주 특별한 기회”라고 거듭 강조했다. 일본, 중국, 미국 등과 함께 두 번째 그룹으로 마르벨라를 찾았다.

아침이 밝자마자 프레젠테이션이 예정된 해변 특설 부스 앞에 장관이 펼쳐졌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벤틀리 벤테이가 10대가 코끝을 맞춰 도열해 있었다. 벤테이가는 사진보다 실물이 나았다. 웅장하고 격조 높은 외모다. 벤테이가는 과연 거대하기도 하다. 길이는 5미터를 넘고, 너비는 2미터를 꽉 채운다.

DETAIL

 

여느 벤틀리처럼 벤테이가도 그릴 양쪽으로 네눈박이 LED 조명을 심었다. 안쪽 두 개는 헤드램프다. 바깥쪽 두 개는 주간 주행등인데, 테두리에서만 빛이 난다. 가운데 동그란 부위엔 헤드램프 워셔가 숨어 있다. 작동시킬 때만 튀어나온다. 앞바퀴를 감싼 펜더는 알루미늄 패널을 섭씨 500도의 공기로 달궈 ‘쾅’ 찍은 뒤 급속 냉각시키는 ‘슈퍼 포밍’ 기법으로 만들었다.

옆면엔 벤틀리 컨티넨탈 시리즈 고유의 라인이 흐른다. 벤테이가에 쓴 옆면 패널은 자동차용으로 프레스한 알루미늄 패널 가운데 세계에서 가장 크다. 이 크기의 패널을 찍을 프레스기는 전 세계에 딱 두 대뿐인데, 그중 하나를 벤틀리가 쓴다. 테일램프엔 벤틀리를 상징하는 ‘B’ 모양의 LED 그래픽을 넣었다. 옵션으로 앞뒤 범퍼 밑에 카본으로 만든 립 스포일러와 디퓨저도 달 수 있다.

뒷모습은 껑충한 키를 빼면 플라잉스퍼와 비슷한 분위기다. 머플러도 다른 벤틀리처럼 좌우로 길고 넓적하게 늘린 타원형 팁으로 감쌌다. 비율만 SUV일 뿐, 전반적인 디자인이나 요소요소의 세부는 영락없는 벤틀리다. ‘SUV의 제왕’이란 상징성을 감안해 좀 더 화려하게 꾸밀 법도 한데, 벤틀리 디자인팀은 지나친 장식을 자제하고 정갈하게 빚었다. 차체는 알루미늄 모노코크로 짰다. 향후 포르쉐 카이엔, 폭스바겐 투아렉 등과 나눌 뼈대다. 언더보디 일부와 외부 패널은 알루미늄, 나머지는 다양한 강도의 고장력 강으로 구성했다. 스틸로 만들 때보다 무게를 236킬로그램이나 줄였다. 그래도 벤테이가의 공차 중량은 2.4 톤이 넘는다. 거대하고 위풍당당한 몸집과 W12기통 엔진 때문이다.

도어는 벤테이가의 크기에서 연상할 수 있듯 여닫는 느낌까지 묵직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외관을 보고 기대했던만큼 실내가 광활하진 않다. 덩치도 크지만 시트, 대시보드 등 인테리어의 구성 요소 역시 큼직큼직한 탓이다. 기존 벤틀리의 실내를 1.2배율의 확대경으로 보는 기분이다. 고급스러운 감각도 한층 두드러진다. 벤틀리의 고집대로 실제 가죽과 진짜 원목, 진짜 금속을 짝지어 꾸몄다. 그야말로 호화 응접실 같다.

INTERIOR

 

벤테이가는 시트 구성과 옵션에 따라 인테리어에 최대 15개의 원목 패널을 쓴다. 이 작업을 위해 벤틀리는 본사가 있는 영국 크루 공장에 58명의 목공 장인을 투입했다. 이들은 오직 벤테이가에만 쓸 원목을 가공한다. 벤틀리가 벤테이가에 기울이는 정성을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단서다. 이처럼 수작업 공정이 많아서 벤테이가 한 대를 만드는 데 130시간이 걸린다. 따라서 당장 주문해도 몇 개월 대기는 기본이다. 벤테이가의 감성 품질이 장인의 수작업만으로 완성되는 건 아니다. 첨단 설계와 조립 기술도 뒷받침된다. 벤틀리에 따르면, 벤테이가 실내 트림의 조립 허용 오차는 0.1밀리미터 이하다. 오차라는 건 거의 없다는 뜻이다. 앞과 옆 창은 이중 유리 사이에 어쿠스틱 유리를 끼워 넣었다. 앞 유리엔 투명한 금속 레이어를 심었다. 운전석과 조수석에 들이치는 자외선과 적외선을 막아주고 열선 역할도 한다. 하지만 전혀 눈에 띄지는 않는다.

계기판 서체, 황소 눈Bull’s eye이란 애칭으로 부르는 송풍구, 아날로그 시계 등 벤틀리 고유의 아이템도 빠짐없이 챙겼다. 시계는 브라이틀링인데, 옵션으로 ‘뮬리너 투르비옹’도 고를 수 있다. 8개의 다이아몬드와 금으로 꾸민 이 기계식 시계의 가격은 벤테이가 자체보다 비싸다.

천장엔 파노라마 선루프를 씌웠다. 유리로 덮은 면적이 1.35제곱미터다. 전체 천장의 60퍼센트를 차지한다. 유리는 두 조각으로 나눴다. 앞쪽 절반을 기울여서 숨통을 틔우거나 뒤쪽 유리 위로 슬라이딩시켜 열 수 있다. 벤틀리는 “시속 300킬로미터로 달리면서도 작동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다”고 강조했다. 전동식 롤러 블라인드로 선루프 전체를 덮어 햇빛을 가릴 수도 있다. 좌석은 넉넉하고 포근하다. 유난히 결이 고운 가죽을 씌우고, 벤틀리 고유의 다이아몬드 모양 퀼팅 박음질로 마감했다. 앞좌석은 사양에 따라 16방향 또는 22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다. 뒷좌석은 독립식 혹은 벤치식 가운데 고를 수 있다. 독립식의 경우 18방향으로 조절할 수 있다. 마사지 기능도 기본이다.

드디어 출발할 시간. 10대의 벤테이가가 순서대로 해변을 빠져 나갔다. 벤틀리 CEO 볼프강 뒤르하이머가 교통정리를 맡았다. 구경꾼을 막고 우리가 나갈 길을 차례차례 터줬다. 덩치가 만만치 않아 좁은 길을 빠져나갈 땐 퍽 조심스러웠다. 좌우 미러를 살피고 때론 차 주위 360도 풍경을 비추는 ‘톱 뷰’를 들여다보며 리조트 사이의 미로 같은 골목을 살금살금 빠져나왔다. 우린 시내를 벗어나 곧장 고속도로를 탔다. 좁은 골목에서 엉금엉금 육중하게 움직이던 벤테이가들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가속 특성은 전형적인 벤틀리다. 무려 91.7kg.m에 이르는 최대토크를 엔진 회전수 1,350~4,500rpm에 터지도록 단단히 뭉쳐 놨다. 그래서 가속페달을 깊숙이 밟고 잠시 기다렸다 속도를 높이는 상황은 경험할 수 없다. 발가락만 꼼지락거려도 마치 발작하듯, 벌컥벌컥 뛰쳐나간다.

GQS_Motoring-ok

엔진은 W12 6.0리터 트윈터보로 608마력을 낸다. 벤틀리 벤테이가의 개발은 전 폭스바겐 회장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주도했다. 하나의 블록에 실린더를 엇갈리게 판 협각 V6 두 개를 붙인 형태다. 그래서 V12보다 길이가 24퍼센트 짧다. 벤테이가에 얹기 위해 재설계해 효율을 11.9퍼센트 높였다.

가속 성능은 세계 최강의 SUV답다. 벤틀리가 밝힌 벤테이가의 시속 100킬로미터 가속 시간은 4.1초다. 그런데 비슷한 성능의 스포츠카에서 경험했던 가속과는 느낌이 전연 딴판이다. 2.4톤의 거대한 덩치로 보이지 않는, 공기의 벽을 박살내며 몰아치는 가속은 박력 그 자체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이처럼 살벌한 가속을 섬뜩한 정적 속에서 해치운다. 벤테이가는 성능만큼 정숙성 역시 동급 최고다. 악착같이 틀어막았다. 책 한 권만 한 사이드미러가 자리한 A필러 부위마저 침묵을 지킨다. 이 때문에 벤테이가를 몰다 보면 속도감이 흐릿해진다. 그런데 벤틀리는 노이즈와 함께 사운드까지 몽땅 지웠다. 같은 엔진을 얹은 벤틀리 컨티넨탈 GT에서 들었던,

북소리처럼 웅장한 음색을 즐길 수 없는 점은 아쉬웠다. 차단과 분리야말로 벤테이가의 핵심이었다. 전자식 파워스티어링은 조향 감각이 매끈하고 부드러웠던 반면 노면의 정보를 전하는 덴 별 관심이 없었다. 전자식 액티브 롤링 제어 기술이 스며 있는 서스펜션은 기울기를 엄격히 억제하면서 나긋한 승차감을 한순간도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거의 마법에 가까운 기술이다.

하지만 벤테이가엔 첨단 기술로도 감출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무게와 덩치에 발목을 잡힌 몸놀림이다. 시승 중 만난 굽잇길에서 토크를 잔뜩 실어 뛰어들었다. 신통방통한 서스펜션 덕분에 차체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는 않았지만, 의도한 궤적을 따르면서 속도까지 높이는 데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욕심이 지나쳤을 땐 언더스티어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그 즉시 주행안정장치에 제압당했다. 제원상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까지 가속하는 시간이 정확히 같은 포르쉐 카이엔 터보 S와의 결정적 차이도 여기에 있었다. 카이엔 터보 S의 성능이야말로 실존적 가치다. 원하는 대로 100퍼센트를 휘두를 수 있다. 그럴 때 진짜 의미를 갖는 차이기도 하다. 반면 벤테이가의 성능은 상징적 가치다. 아득히 높은 잠재력은 자신감과 우월감을 북돋는 장치다. 성능의 정점을 찌르기보단 긴장을 풀고 느슨한 템포로 다룰 때가 가장 즐겁다.

벤테이가는 모든 모델 중 효율에 가장 많이 신경 쓴 벤틀리이기도 하다. 가령 3~8단, 엔진 회전수는 3,000rpm 이하, 토크 30.6kg.m 이하에선 엔진의 절반을 쉬며 6기통으로만 달린다. 벤틀리는 가변 배기량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5~8단 주행 중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면 엔진과 변속기의 연결을 끊어 관성으로 달린다. 스타트 스톱 시스템은 차가 거의 멈출 때쯤 미리 엔진을 끈다.

벤테이가는 총 8가지의 운전 모드를 갖췄다. 현존하는 SUV 중 제일 많다. 다이얼을 돌리는 방식으로 간단히 선택할 수 있다. 온로드 모드는 스포츠와 컴포트, 벤틀리, 커스텀 등 4가지다. 스포츠와 컴포트에서 파워트레인의 반응은 확연히 다르다. 하지만 승차감 차이는 크지 않다. 벤틀리 모드는 벤틀리 본사의 섀시 엔지니어가 추천하는 세팅의 모범 답안이다. 실제로도 가장 만족스러웠다. 오프로드 모드도 눈과 풀밭, 흙길과 자갈길, 진흙과 다진 길, 모래 등 4가지를 마련했다. 시승 중, 벤틀리는 오프로드 주행 세션도 따로 마련했다. 특설 코스에서 진행했다. 운전 모드를 오프로드로 바꾸면 모니터는 상황판으로 바뀐다. 지상고와 가로 및 세로 경사, 각 휠의 서스펜션 트래블(바퀴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거리), 앞바퀴 조향 각도, 해발고도, 방위 등의 정보를 깨알같이 띄운다.

벤테이가 서스펜션의 최대 트래블은 225밀리미터다. 에어 서스펜션을 늘려 키를 최대한 키우면 최저지상고가 245밀리미터까지 치솟는다. 이 상태에선 50센티미터 깊이의 물길도 망설임 없이 헤친다. 벤테이가는 꿀렁꿀렁, 험로를 잘도 누볐다. 바퀴 하나가 공중에 떠도 가속페달을 지그시 밟고 있으면 알아서 나머지 바퀴로 구동력을 옮겼다. 운전자가 신경 쓸 건 혹여나 차에 날지 모르는 상처뿐이었다.

벤테이가는 ‘정상의 SUV’답게 갖가지 장비도 풍성하다. 어댑티브 크루즈 콘트롤 기능은 내비게이션의 데이터와 센서, 카메라를 이용해 다가오는 코너나 도로의 속도 제한까지 예상해 차의 속도를 알아서 조절한다. 평행과 직각 주차를 돕는 파크 어시스트도 옵션으로 마련했다. 오디오는 최상급을 고를 경우 스피커 20개와 출력 1,950와트의 앰프를 짝지은 나임 시스템이 들어간다. 헤드업 디스플레이도 있다.

벤틀리 벤테이가는 눈부시게 고급스럽고 가슴 철렁하게 빠르며, 기대 이상 편안하고 놀라울 만큼 안정적이다. 상징성이 짙은 최고속도처럼, 모든 면에서 압도적이며 갖가지 유쾌한 과잉으로 넘쳐난다. 최대 22인치의 휠과 245밀미리터의 최저지상고로 온로드와 오프로드를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든다. 벤틀리의 활동 범위는 그야말로 광활해졌다. 그러면서도 풍성한 토크, 황홀한 승차감 등 벤틀리 고유의 가치는 고스란히 지켰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트럭이구만.” 에토레 부가티는 1930년 프랑스 그랑프리에서 자신의 경주차를 이긴 벤틀리를 이렇게 조롱하며 스스로를 위안 했다. 그의 예언은 85년이 지나 벤틀리 벤테이가를 맞아 비로소 적중한 것처럼 보인다. 벤틀리 모터스의 창업자 월터 오웬 벤틀리의 신념처럼, 벤테이가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빠른 SUV로 태어났다. 문득 궁금해졌다. 에토레 부가티가 2016년의 벤틀리 벤테이가를 본다면 또 어떤 독설을 남길지.

본격적인 시장 확장에 나선 벤틀리 벤틀리는 벤테이가 출시와 더불어 대대적인 확장 전략을 시작한다. 2014~2016년 벤틀리는 제품과 시설에 8억 4천만 파운드, 약 1조 4천7백52억원을 투자한다. 대부분은 벤테이가를 위해 쓸 예정이다. 아울러 현재 영국 크루 본사와 공장 건너편 부지에 새 디자인과 연구개발 센터를 짓는다. 볼프강 뒤르하이머는 “벤테이가 뼈대로 또 다른 차종 개발을 고려 중”이라고 밝혔다. 외신들은 V8 4.0리터 가솔린 트윈터보 엔진을 얹는 중형 SUV로 예상했다.

DSC_2292

출격 대기 중인 벤테이가의 라이벌 벤틀리 관계자에 따르면, 벤테이가는 몇 년 내로 수많은 맞수와 싸우게 된다. 우선 숙명의 라이벌 롤스로이스가 컬리넌이란 이름의 SUV를 개발 중이다. 창사 이래 SUV 한우물만을 파온 랜드로버 역시 레인지로버 위급의 초호화 SUV를 준비 중이다. 다임러 역시 메르세데스-마이바흐 브랜드의 SUV를 개발하고 있다. 람보르기니는 우루스, 마세라티는 르반떼를 내놓을 예정이다. 따라서 호화 SUV 시장에 하루가 다르게 전운이 감돌고 있다.

GQS_Motoring-ok2

벤틀리 역사상 가장 엄격한 테스트 벤틀리는 벤테이가에 브랜드 역사상 가장 엄격하고 방대한 테스트 프로그램를 적용했다. 영국과 미국, 남아공, 독일, 두바이, 뉴질랜드, 중국, 북극 등 영하 30도~영상 50도의 5개 대륙을 돌며 시험 주행했다. 주행보조 시스템은 전 세계의 도시와 고속도로에서 테스트하고 조율했다. 독일 뉘르부르크링 노르드슐라이페도 4백 바퀴 이상 달렸다. 벤테이가 프로토타입의 총 누적 주행거리는 1백60만 킬로미터에 달했다.

    에디터
    컨트리뷰팅 에디터 / 김기범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