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 사이먼 도미닉은 거침없이 말한다. 꾸미지 않고 에두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입고 있는 후드 티에 ‘DARKROOM’, 암실暗室 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네요. 제 작업실 이름이에요. 2018년에 낸 앨범 제목이기도 하고. 작업실을 같이 쓰고 있는 룸메이트 정영목 디자이너가 보석으로 글자를 한 땀 한 땀 박아줬어요.
동행한 매니저가 입고 있는 점퍼도 직접 만든 건가요? 이번에 힙합 예능 <다모임>을 하면서 제작한 거예요. 단체복 같은 것이 있었으면 해서 대학교 ‘꽈잠’ 느낌으로 야구 점퍼를 만들자고 했어요. AOMG, VMC, 하이라이트 레코즈, 일리네어 레코즈, 염따의 박스 로고가 나란히 수놓여 있으면 정말 멋있을 것 같아서.
사이먼 도미닉, 딥플로우, 팔로알토, 더 콰이엇, 염따. 84년생들이 모여서 만든 콘텐츠 <다모임>이 작년 한 해 유튜브에서 화제를 모았죠. 조회수, 진정성, 음원 발매까지 삼박자가 잘 맞물렸어요. 그동안 동갑내기 뮤지션 친구들끼리 모일 기회가 생각보다 별로 없었어요. 요즘은 작업 방식도 온라인으로 비트 하나 메일로 쏴주면 들어본 다음 각자의 작업실에서 녹음해서 보내주면 되니까요. 확실히 예전보다는 편하게 음악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죠. 음악을 만든다는 건 이제 굳이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 되었어요. 친구들이 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인스타그램을 보면 알 수 있고요. 그래서인지 또래 동료 뮤지션들과 어울리고 싶다는 마음이 조금씩 커졌고, 이왕이면 모여서 뭔가 생산적인 것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름 그대로 힙합 하는 사람들이 다 모인 거죠.
힙합 대부들이 거침없이 망가지고, 사나운 맹수인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고양이처럼 그르렁거리는 의외의 모습이 대중들의 코드와 맞아떨어진 것 같아요. <쇼미더머니>보다 훨씬 재밌죠. 저희들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으니까요. 아마 촬영하는 시간보다 회의하는 시간이 더 길었을 거예요. 그래도 나름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은, 성공한 사람들인데 이렇게 유치한 걸 해도 외면당하지 않았잖아요. 재미있자고 시작한 건데 그것조차 멋이 된 거죠. 다모임도 일부러 우리 완전히 아재 같은 것, 구린 걸로 작정하고 해보자고 지은 이름이었거든요. CD, MP3로 음악 듣던 시절을 지나 이제 유튜브, 틱톡까지 이어지는 격변하는 한 시대를 겪은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트렌디한 걸 해도 옛날 감성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와요.
트렌드를 얼마나 의식하는 편인가요? 음악을 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현재 유행하고 있는 스타일이나 장르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트렌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절대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요. 요즘 어린 래퍼들이 하는 것을 잘 새겨 듣고 즐기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옛날에 제가 좋아하던 스타일과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을 적절히 섞어서 음악을 만들 수 있는 거죠. 그래서 음반을 낼 때마다 트렌디하다는 평가를 아직도 들을 수 있는 것 같고요. 음악이든 사람이든 스타일이든 시간이 지날수록 촌스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일부러 더 촌스럽게 해버리면 오히려 그게 더 신선하게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요.
과거의 랩 스타일과 지금은 어떻게 달라졌다고 생각해요? 저는 지금이 제일 좋아요. 그리고 제일 잘한다고 생각하고요. 가끔 옛날 톤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굳이 그때로 다시 돌아와 달라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어요. 옛날에 했던 랩을 요즘 다시 들어보면 신선하게 느껴지는 지점도 있지만, 반면에 손발이 오그라들 만큼 부끄러운 순간도 있어요. 그 모든 것이 충돌하고 융합되어 지금의 제가 있는 거거든요. 유행이 제아무리 돌고 돌아도 진짜 좋았던 것은 결국 다시 나오게 되어 있어요.
다시 돌아온 유행 중 반갑게 느껴지는 것도 있나요? 90년대 황금기에 유행했던 붐뱁 비트에 랩을 하는 요즘 어린 래퍼들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병웅, 이 친구는 옛날 래퍼들이 했던 붐뱁 스타일을 제대로 보여주죠. 우리 세대가 올드 스쿨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요즘 어린 친구들에게는 뉴 스쿨이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주목하는 뮤지션이 있나요? 씨잼의 음악적 행보가 기대돼요. 일단 너무 멋있어요. 랩도 엄청나게 잘하는 친구인데 요즘은 힙합에 록적인 요소를 섞어서 얼터너티브한 음악을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리고 요즘 미국에서는 여성 래퍼들이 대세예요. 카디 비, 시티걸즈, 러비 로즈의 음악도 정말 좋아요. 전 세계적으로 현재 힙합 신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성들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도 좋은 여성 래퍼들이 활발하게 활동했으면 좋겠어요. 눈치 안 보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애쉬비의 <BOOTY>도 최근에 즐겨 들은 음반이에요. 애쉬비와 친하게 지내는 퀸와사비의 음악도 굉장히 세고 노골적인데, 저는 이런 음악도 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색 있고 자기 캐릭터가 확실한 음악을 더 많이 듣고 싶어요.
AOMG에도 젠지 세대에 속하는 젊은 뮤지션들이 계속해서 영입되고 있어요. 우원재, 펀치넬로, 소금 등등. 그들을 보면서 나와 다르다고 느껴지는 지점도 있나요? 원재를 만나면서 느낀 건 어린 친구들의 우울증이랄까요? 뭐가 그렇게 힘들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생각해보면 제가 20대 초중반이던 시절에는 이렇게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래퍼 친구가 많지 않았거든요. 한번은 다모임 멤버들과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우리 때 우울증을 겪은 래퍼가 주변에 있었나? 그걸 가사로 쓰는 사람이 있었나? 과거에는 인터넷도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았고 이토록 많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거든요. 좋은 것도 많이 보지만 반면에 안 좋은 콘텐츠에도 너무 노출되다 보니 점점 더 정신적으로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때때로 뮤지션들은 그런 슬픈 감정을 음악으로 승화시키곤 하죠. 아이러니하게도 그랬을 때 음악이 좋거든요. 자신의 힘듦을 진심으로 표현했기 때문에 마음에 와 닿는 감정의 폭이 엄청 클 수밖에 없죠. 아픈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게 본인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인데, 오히려 사람들은 그걸 듣고 힘을 얻거나 위로를 받아요. 저 역시도 힘든 시기를 겪었고 그때 앨범 <다크룸>을 만들었어요. 그러면서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마음이 아픈 후배들의 음악을 들으면서 가사에 공감을 많이 했어요.
답답할 때 음악 말고 어떤 탈출구가 있어요? 최근에 위스키의 매력을 알아가고 있어요. 며칠 전에도 작업하다 답답해서 즐겨 가는 레코드 바에 가서 위스키를 종류별로 마셨어요. 위스키는 그런 술인 것 같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얼음이 점점 녹으면서 맛도 부드러워지고, 그러면서 대화의 밀도와 어색한 분위기마저도 점점 무르익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다모임 친구들과 한국소아암재단에 1억을 기부하는 걸 보면서 돈은 이렇게 쓰는 거라고 제대로 선례를 남겼다는 생각을 했어요. 친구들과 좋은 일을 해보자고 의견을 모았어요. 우리도 제대로 돈을 써서 기부로 슈퍼 플렉스를 한번 해보자고. 플렉스에 대한 사람들의 호불호가 좀 있잖아요. 사실 플렉스는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벌어들인 만큼 쓰는 건데 이제 나를 위해 쓰는 돈에는 큰 욕심이 없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 쓰는 기쁨이 또 있거든요. 그것에 대한 선한 영향력을 누군가 또 받는다면 그 사람도 언제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거겠죠.
플렉스를 이야기하면 염따를 빼놓을 수 없죠. 염따는 2019년 올해의 남자였다고 생각해요.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상에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비춰지지만 실제로 만나보면 정말 생각이 깊고 진중해요. 염따의 인터뷰를 볼 때마다 깜짝 놀라요.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하나 싶을 정도로 말을 잘해요. 옆에 있으면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예요. 같이 있으면 좋은 에너지를 많이 받죠. 주변 사람들을 으쌰으쌰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어요.
사이먼 도미닉에게 ‘슈가맨’ 같은 존재가 있는지 궁금해요. 지금은 그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는 장소가 부산에 있었어요. 클럽 투팍이라는 곳인데 진짜로 벽 한 면에 ‘R U Still Down?’ 그라피티가 그려져 있었어요. 처음 들어갔을 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죠. 제가 처음으로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섰던 곳이기도 해요. 거기서 만난 누나를 통해 힙합 듀오 더스티의 혁건을 알게 됐어요. 그분의 전화번호를 어렵게 받았고, 돈만 생기면 전부 동전으로 바꿔서 떨리는 마음으로 매일 밤 공중전화 부스로 달려갔어요. 1시간 넘게 수화기를 붙잡고 프리스타일 랩도 들려주고, 그러다 너무 보고 싶어서 서울까지 올라와서 만난 적도 있어요. 제게 음악적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이기도 해요. 혁건이 형이 랩을 정말 잘했거든요. 대학에 들어가 다른 힙합 크루를 만나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서로가 페이드아웃되었는데 요즘 그 형을 정말 찾고 싶어요.
‘정진철’이란 곡으로 삼촌을 찾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꼭 만나기를 바라요.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변화도 있나요? 눈물이 많아졌어요. 한국 드라마의 애청자예요. 유행하는 드라마는 거의 다 봐요. 어제도 집에서 혼자 넷플릭스로 <사랑의 불시착>을 보면서 오열했어요. 침대에 누워서 보는데 얼마나 많이 울었으면 나중에는 베개가 흥건하게 젖더라고요. 저도 드라마 OST 잘 부를 수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