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VR 게임의 등장

2020.06.05GQ

현실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던 VR 기술이 드디어 안착했다. 실재보다 진짜 같은 가상 현실의 등장은 시간문제다.

게임 트렌드는 수작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스타크래프트는 RTS 장르의 시대를 활짝 연 동시에 아류작들이 지향해야 할 기준점이 됐다. 배틀그라운드에서 출발한 배틀로얄 장르는 전 세계를 휩쓸었다. 여러 명이 시작해 최후의 한 명을 가리는 배틀로얄은 처음엔 유저 제작 모드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룰을 정립하고 문법을 다듬어 엄연한 게임 장르로 완성됐다. 리그오브레전드 역시 MOBA 장르의 개척자가 됐다. 일부 마니아만 즐기는 번외판 모드가 단 하나의 게임, 대중적인 장르로 발전한 좋은 예다.

발전 가능성과 대중의 관심에 비해 그다지 기를 펴지 못했던 VR 슈팅 장르에도 판도를 뒤엎을 게임이 등장했다. 1백만원이 넘는 고가에도 불구하고 자사의 VR 기기 판매량을 하루아침에 끌어올린 <하프라이프: 알릭스>다. 게임 플랫폼인 ‘스팀’에서 VR 게임 접속자 수를 갑자기 증가시켰다. VR이 없으면 사서라도 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격정적인 반응이 게임 전문 매체와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 우수수 쏟아졌다.

가정용 VR 기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2016년. 몇 년 안에 VR이 게임 개발에서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라는 예측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게임 업계뿐 아니라 산업과 실생활 모든 영역에서 VR을 활용하려는 움직임 역시 시작됐다. VR을 통한 교육, 관광, 영상, 엔터테인먼트 등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응용법이 등장했다. 현실과 공존하는 VR 속의 또 다른 세계.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에서 그려진 세상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VR 콘텐츠는 처음에는 신기했지만 이내 단점이 드러났다. 호기심 때문에 지불하기엔 기계의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쌌다. VR만의 킬러 타이틀이 없다는 점도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요소였다. 개인 방송이나 관련 업체라면 모를까, 개인이 즐길 만한 콘텐츠가 전무했다. 마땅한 활용법을 찾기 어려웠다.

상황은 게임도 마찬가지였다. 초반에는 이동과 사격을 반복하는 레일슈터 게임이 주목받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획기적이면서 독창적인 게임 환경을 제시하진 못했다. 고개를 돌릴 수 있다는 점만 빼면 <하우스 오브 데드> 같은 오락실 건슈팅 게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사각에서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는 데다 이동을 통한 회피도 불가능했다. FPS 게임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VR 체험방에서 가끔 플레이하는 정도로는 나쁘지 않았지만, 집에서 플레이하기 위해 고가의 기기까지 구매할 만큼의 매력은 찾을 수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을 내포한 영역은 공포 게임이었다. 어둠 속에 몰린 플레이어를 향해 좀비나 귀신이 튀어나오는 장면을 상상해보면 VR이 게임에 어떻게 양념을 칠지 쉽게 이해가 간다. 다만 공포 게임은 절대 극복할 수 없는 취약점이 있다. 대중성이다. 귀신을 영접하려고 일부러 VR 기기를 뒤집어쓸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마니아들의 선택 이상으로 뻗어나갈 리 없었다. 한참 부족한 완성도 탓에, 장르적 한계 탓에 공포 게임은 VR 체험방에서나 잠깐씩 즐기는 이색 오락거리가 됐다. 그마저도 게임 자체를 즐기기보단 좀비에 놀라 혼비백산한 일행이 허우적대는 모습을 구경하려고 가는 곳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하프라이프: 알릭스>가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배회하던 VR의 위상을 완전히 뒤바꿔 놓을 듯하다. 성장과 쇄락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던 VR이 후반전을 펼칠 기회를 얻은 셈이다. 알릭스는 모든 면에서 수준급 퀄리티를 달성한 VR 최초의 AAA급 게임이라 봐도 무방하다. 기존의 단점을 해소하고 장점을 극대화했다.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입을 모아 “드디어 VR 기기를 살 때가 됐다”고 말한다. 정가 9백99달러, 국내 가격은 1백70만원 정도지만 그마저도 물건이 없어 웃돈을 줘야 하는 형편이다.

알릭스가 일으킨 파급은 게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동안 VR 콘텐츠들이 확보하려고 애쓴 요소들을 거의 모두 포괄한다. 가상 현실이 추구하는 바는 말 그대로 현실이다. 때문에 최근 VR 기기와 콘텐츠에 적용된 기술은 머리에 착용하는 디스플레이 장치인 HMD(Head Mounted Display)를 통해 보는 세상과 현실의 위화감을 줄일 수 있는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알릭스의 강점인 직관적인 조작과 다양한 오브젝트 상호작용에서 오는 자유도다.

VR 기기를 쓰고 게임을 시작하면 공중에 떠다니는 두 손이 플레이어를 반겨준다. 이 두 손이 게이머의 손과 마찬가지로 움직인다. 손가락 인식이 가능한 VR 기기를 사용하면 말 그대로 ‘내 손처럼’ 움직인다. 팔을 뻗고, 손가락을 펴고, 다시 오므려 물건을 잡고, 들어 올린다. 그 어느 게임 개발사도 구현하지 못한 정교한 과정이다. 자유로운 조작은 다양한 오브젝트 상호작용과 만나 시너지 효과를 냈다. HMD 너머 눈에 보이는 거의 모든 물건을 만질 수 있다. 단순히 드는 수준을 넘어 펜으로 유리창에 글씨를 쓰거나 바닥의 철판을 들어 달려드는 몬스터를 막는 행동도 가능하다. 멀리 있는 물건을 끌어오는 ‘중력 장갑’을 이용해 전투 중 가스통을 당겨오면서 총으로 쏴 터뜨리는 창의적인 플레이 역시 알릭스의 강점이다.

놓여 있는 물건이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면 몰입도와 집중도가 높아진다. 예를 들어 길게 뻗은 복도, 양쪽 문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퀴 달린 캐리어가 눈앞에 있다고 하자. 앞으로 쭉 밀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살필 수 있지만, 쪼그려 앉아 천천히 걸어가는 방법을 선택할 수도 있다. 주변 사물의 활용, 캐릭터 행동의 결정권을 유저에게 맡기는 점은 현실과 가상의 괴리감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게임 바깥 세상에서 캐릭터를 조작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 그 자체가 된다.

의도적으로 느리게 설정한 이동 속도는 VR로 인한 멀미 현상을 현저히 줄였다. 하지만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한 발 한 발 마음을 졸여가며 움직이는 방식으로 긴장감을 극대화시킨다. 수동적으로 감상만 한다면 좋은 TV나 모니터가 더 적합하다. VR은 말 그대로 가상 현실이다. 현실에서 할 수 있는,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키보드와 마우스가 아니라 내 손으로 직접 하는 곳이 바로 가상 현실 VR이다. 알릭스가 만든 곳이 그런 세상이고.

VR 기술은 ‘화면 너머 세상을 얼마나 현실처럼 만드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발전 중이다. HMD의 화질과 지연 시간을 개선해 더 현실 같은 화면을 제공하려는 노력은 기본이다. 장갑 형태의 컨트롤러로 HMD 너머 키보드를 누를 수 있을 정도로 손가락을 더 정확하게 인식하는 제품도 개발 중이다. 특수한 플랫폼에 올라가면 동작을 인식, 달리기나 걷기, 심지어 뛰거나 앉는 행동까지 인식하는 시스템도 시연된 적이 있다. 이런 기술이 발전을 거듭하면 무한한 영역에서 응용할 수 있다. 영화 <블랙 팬서>처럼 원거리에서 자동차나 비행기를 현실과 동일한 감각으로 운전하는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더 이상 허무맹랑한 공상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이 서서히 입증되고 있다. 2020년을 기점으로 VR 게임의 상향 평준화는 물론 VR 기기의 활용 영역까지 비약적으로 넓어질 것이다. 미래를 먼저 경험한다는 이유만으로도 VR을 구매할 동기는 이미 충분하다. 오래 걸렸지만,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글 / 김강욱(게임 칼럼니스트)

    피쳐 에디터
    이재현

    SNS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