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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리지만 강렬한 레드 와인, 피노 누아 입문 가이드 -3

2020.10.14GQ

다른 나라에서 피노 누아 찾기.

레드타이 버건디 그랑 크뤼, 리델.

미국
필드 레코딩스 원더월 피노 누아 피노 누아는 가을 같다. 사계절 중 호불호가 가장 없는 계절. 올해를 돌아보며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계절. 피노 누아는 만날 때마다 그런 느낌을 나에게 준다. 은은하고, 마음이 차분해지고, 많은 생각이 들게 하지만 정리도 해주는 와인. 미국 캘리포니아 센트럴 코스트에서 만든 이 피노 누아는, 형광색 레이블 테두리에 두 소녀가 싸우는 듯한 사진이 담겨 있다. 마치 피노 누아를 대표하는 2가지 아로마가 서로 더 돋보이겠다며 주먹다짐을 하는 것 같다. 신선한 딸기 향과 분홍 장미 향, 서로 우열을 가릴 수 없다. 부르고뉴산 피노 누아처럼 신선한 산도와 미국산 특유 과일 캔디의 부드러운 감미의 밸런스가 훌륭한 와인이다. 오레곤 지역의 피노 누아는 흙내음과 같은 흙냄새 Earthy 노트가 두드러지는 반면, 미국 캘리포니아 센트럴 코스트의 피노 누아는 직설적인 과일 향이 무척 사랑스럽다. 양념 치킨과 함께 즐기면 은은한 마늘 향의 달콤한 소스와 피노 누아의 과일 향이 복합미를 만들어낸다. 다가오는 가을에 꼭 마셔야 하는 와인.
양윤주(하프패스트텐 오너 소믈리에)

뉴질랜드
화이트 헤븐 피노 누아
와인 초심자가 제일 좋아하는 품종으로 피노 누아를 꼽는 경우는 드물다. 과일이 지배적인 뉘앙스를 차지하는 많은 품종과 달리 가죽이나 여러 향신료 같은 복잡한 풍미의 첫인상은 당황스럽기 마련이다. 막상 입맛을 들이더라도 까다로운 재배와 양조 때문에 가산 탕진하기 딱 좋은 비싼 가격을 자랑하는 것도 문턱을 높인다. 그러나 그 세계에 발을 들이면 다시 빠져 나오지 못할 만큼 할 이야기도 많고, 오랜 시간을 즐기기에 좋은 품종은 역시 피노 누아가 유일무이하다. 뉴질랜드는 부르고뉴를 제외하면 ‘피노 누아스러운’ 포도를 재배하는 데 최적화된 지역이다. 명확하게 붉은 과실과 향신료, 그리고 부드러운 질감으로 함축되는 피노 누아의 특성들을 잘 보여준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만드는 스타일은 아닐 수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강점이다. 피노 누아를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음식과 무난하게 즐기고 싶어하는 이들에게 부담 없이 추천할 수 있다. 푸아그라 테린이나 콩포트를 곁들인 오리 가슴살 구이와 함께라면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가을이다.
박보경(루뽀, 보틀러 소믈리에)

호주
데블스 코너 피노 누아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은 와인을 “병 안에 든 시”라 했다. 좋은 피노 누아를 마시다 보면 누구나 자신 안에 잠들어 있던 시인이 불쑥 뛰쳐나올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은 그저 은유가 아니다. “신이 카베르네 소비뇽을 만들었다면, 피노 누아는 악마의 소행”이라 했던 와인 메이커 앙드레 첼리스체프의 말은 또 얼마나 정확한지. 잔병치레 잦고 예민한 이 포도는 근사한 레드 와인으로 변신해 상냥하게 유혹한다. 호주는 쉬라즈로 친숙한 와인 생산국이지만 빅토리아주나 태즈메이니아섬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서늘한 이곳은 쉬라즈 대신 피노 누아를 식재하며 빛을 보기 시작했다. 이 지역에서도 부르고뉴 뺨친다는 소릴 들으려면 상당히 고가라는 게 딜레마. 적당한 가격대에서 마시기 좋은 와인을 꼽으면, 브라운 브라더스가 태즈메이니아에서 생산한 데블스 코너다. 체리, 석류, 딸기 향이 또렷하게 올라오고 산도는 상큼. 로즈메리 향이 밴 닭 가슴살 스테이크와 잘 어울린다.
강은영(<와인리뷰> 편집장)

‘오피노누아’ 라는 이름의 와인 바
@au_pinot_noir

피노 누아를 좋아하는 두 친구가 오픈한 귀여운 와인 바. 서로 함께 즐겨 마시던 품종은 어엿한 간판이 되었다. 이태원에서 해 질 녘 석양을 바라보며 근사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테라스가 있는 아담한 공간에는 두 사람의 일관된 취향이 스며들어 있다. “섬세하면서도 깊이가 있어요. 와인을 오픈해서 마시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다채롭게 변화해가죠.” 홍콩에서 와인 수입하는 일을 했던 박경미 대표가 말했다. 갤러리를 운영했던 임채진 대표는 피노 누아의 매력에 대해 “하나의 품종 안에서 복합적인 아로마가 피어 오르는 점”을 꼽는다. 클래식한 붉은 벽돌 사이엔 그가 큐레이션한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다. 부르고뉴, 뉴질랜드, 미국 등 다채로운 지역의 피노 누아 와인을 마셔볼 수 있다. 코르시카 피노 누아를 하우스 와인으로 사용하는 점이 특이하다. 부르고뉴의 유명한 와인 메이커 프랑수아 라베가 지중해 아름다운 섬의 독특한 기후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와인이다. 꽃과 붉은 열매, 그리고 흙냄새와 톡 쏘는 상큼한 느낌까지 전해준다. 치즈, 트러플 감자칩, 말린 버섯 등과 같은 단순하지만 자꾸 손이 가는 안주와 함께 짙어진 가을밤을 피노 누아로 물들여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