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 선 상황에서 사진가 메리 매카트니가 자신의 아버지를 뷰파인더 안에 담았다. 올여름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로 공연하려던 폴 매카트니가 무대 위에서 보낸 지난 60년을 돌이켜본다.
존 레논의 새 매니저였던 지독한 앨런 클라인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폴 매카트니가 마지못해 선택한 것은 비틀스의 해체였다. 이후 50년간 ‘폴’(매카트니는 늘 이 이상의 공식적인 호칭으로 불리는 걸 꺼려왔다)은 자신의 과거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비틀스의 해산 직후, 그는 비틀스로서의 생활이 중요했다는 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이유를 굳이 설명하지 않더라도 팬들의 인정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다. 어쨌든 그는 비틀스였다. 단지 이 사실을 상기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이후 그의 명성이 높아지고, 그가 비틀스로 활동했던 7년보다 금세 더 유명해졌다는 공식적인 발표 이후, 매카트니는 자신의 과거를 인정하기 시작했다. 성가신 기자들이 그가 이룩한 ‘대걸레 헤어스타일’ 시절의 업적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도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약 25년간 그는 종종 밴드 이야기를 꺼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의 친구인 존 레논, 조지 해리슨, 링고 스타에 대해서 팬들이 늘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열정으로 말했다. 크레이그 브라운의 신간 <One Two Three Four:The Beatles In Time>의 성공은 비틀스의 꾸준한 인기를 설명한다. 그리고 2020년에 폴 매카트니가 하는 말을 듣는다면, 모든 비틀스 팬 중에서 그가 최고의 팬이라는 사실을 쉽게 믿게 될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아니, 어떻게 빌보드 차트에 다섯 장의 앨범을 동시에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어떻게 셰이 스타디움 역사상 가장 시끄러운 관중들에게 최상의 연주를 들려줄 수 있었을까? 혹은 어떻게 <페퍼상사>를 녹음했을까? ‘헤이 주드’나 ‘렛 잇 비’는? 어떻게 두 세대에게 가장 사랑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롤링 스톤스, 마이클 케인과 함께 1960년대를 주름잡은 최고의 존재가 될 수 있었을까? 여기, 그룹 라몬즈(폴 라몬은 매카트니의 옛 무대명이자 호텔 체크인 시 이름이다)에게 자신의 이름을 준 남자가 있다. ‘예스터데이’는 전 시대에 걸쳐 가장 인기 있는 곡(집계상 2,400개의 망가진 커버 버전이 있다)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1960년대 초에 믹 재거와 함께 파티를 했고,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났으며, 열다섯 명의 영국 총리와 열세 명의 미국 대통령을 지나온 사람이다. 매카트니는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할 때, 인간이 달에 착륙했을 때 이미 유명했던 사람이다. 레드 제플린, 데이비드 보위, 섹스 피스톨즈, 오아시스보다 오래 활동했지만, 일흔여덟의 나이에도 쉰 살처럼 보이는 사람이다. 팝 뮤직을 대표하는 느낌이 서사, 웅장함, 폭력성 등의 면에서 서부 영화와 닮았다면, 매카트니의 초기 솔로 음반은 매력이 넘치는 홈 무비에 가깝다. 한때 매카트니는 자신을 버라이어티 아티스트로 규정하곤 했다. 발라드뿐만 아니라 끈적끈적한 R&B 곡도 건드릴 수 있는 전통에 뿌리를 둔 만능 엔터테이너 말이다. 언제나 확고한 전통주의자였던 그는 이제껏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최근에 이르러 종종 로큰롤 초창기에 대한 다소 권위적인 향수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계속해서 통통 튄다. 그의 솔로 앨범 중 다수는 비틀스의 어느 앨범에나 수록되어 있는 존 레논의 거친 사이키델릭이나 조지 해리슨이 부분적으로 작곡한 곡 옆에 놓여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굿데이 선샤인’을 ‘렛츠 엠 인’(<윙스 앳 더 스피드 오브 사운드>, 1976)으로, 또는 ‘마사 마이 디어’를 ‘걸프렌드’(<런던 타운>, 1978)로 대체한다고 해보자. 화이트 앨범에 실린 ‘몽크베리 문 딜라이트’(<램>, 1971)나 <에비 로드>에 실린 ‘레팅 고’(1975년 싱글)를 상상해보자. 지난 50년간 매카트니가 쓴 많은 곡은 비틀스 시절 쓴 여느 곡만큼이나 좋다. ‘마이 브레이브 페이스’(<플라워스 인 더 더트>, 1989), ‘에브리 나이트’(<매카트니>, 1970), ‘영 보이’(1997년의 <플레이밍 파이>) 혹은 ‘썸 피플 네버 노우’(<와일드 라이프>, 1971)나 ‘에버 프레즌트 패스트’(<메모리 얼모스트 풀>, 2007) 등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애피타이저에 불과하다. <인디펜던트>의 기자, 리처드 윌리엄스가 “만약 ‘디어 프렌드’가 비틀스 이후 매카트니가 만든 가장 성공하지 못한 앨범인 <와일드 라이프>의 마지막 트랙이 아니라 화이트 앨범의 첫 번째 트랙에 수록되었다면, ‘예스터데이’만큼 알려진 곡이 되었을 것”이라고 한 말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매카트니가 1982년 히트곡 ‘테이크 잇 어웨이’의 마지막 부분에 경쾌한 브라스 소리를 쓴 것은 충분히 용서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앨범에서도 찾을 수 없는 가장 영광스러운 깨달음의 42초이기 때문이다.
매카트니가 시대마다 거듭 증명했듯이, 그는 가정적인 곡 쓰기의 달인이다. 대표적인 예는 1989년에 만든 <디스트랙션스>로 바깥 출입을 못하고 집에 있는 것의 기쁨을 비꼰 영리한 곡이었다. 최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봉쇄 조치가 내려지면서 더욱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매카트니는 이스트 서식스 농장에서 몇 달을 갇혀 지내왔음에도 불구하고 바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현재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하이 인 더 클라우드>(넷플릭스가 사들인 애니메이션 프로젝트)와 <플레이밍 파이>의 특별 재발매, 그의 첫 솔로 앨범 <매카트니>의 50주년 기념 한정판 발매 등이 있다. 또한 유명한 프랭크 카프라의 영화를 바탕으로 지난 3년 동안 작업한 뮤지컬 <잇츠 어 원더풀 라이프>의 막바지 작업도 하고 있다. 그는 지난해 전곡의 데모를 만들고 리허설 피아니스트가 사전 제작 때 배우와 맞춰볼 수 있게 데모를 악보로 바꾸었다. “다시 작업을 시작할 수 있을 때가 오면, 바로 할 준비가 되어 있을 거예요.”
이번 가을에는 열렬히 기다려온 피터 잭슨의 <비틀스: 겟 백>이 개봉했어야 했다. (현재 개봉이 2021년 8월로 미뤄졌다.) 비틀스의 멤버들이 함께 했던 마지막 한 해를 배경으로 한 새로운 다큐멘터리로 심오하면서도 음울했던 1970년 마이클 린제이 호그의 영화 <렛 잇 비>의 느낌을 상쇄시킨다. 피터 잭슨의 영화는 1969년 초 비틀스가 <렛 잇 비>로 기록을 세울 때 60시간 가까이 촬영된 영상들을 모으고, 런던의 새빌 로에서 열린 전설적인 루프톱 콘서트의 비하인드 클립을 포함해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을 담았다. 링고 스타는 이 새로운 영화를 마음에 들어 했다. 비틀스의 멤버들을 경쟁자가 아니라 진정한 협력자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인터뷰 전 주말, 나는 매카트니의 팬으로 돌아갔다. 마치 마카(매카트니의 별명)의 광팬처럼 지금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통해 다시 한번 그에 대해 속속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리라는 희망이 아니라, 단지 한동안 듣지 못했던 것들을 재확인하려 한 것이다. (23년 전에 발매되었으나, 최근 어마어마한 박스 세트로 재발매된) <플레이밍 파이>와 (아름다운 ‘디스 네버 해픈드 비포’를 수록한 2005년 앨범) <카오스 앤드 크리에이션 인 더 백야드> 그리고 (당대 모든 이가 주로 펑크나 디스코를 들었기 때문에) 1978년 발매되었을 때 과소평가되었던 고전 <런던 타운>을 집중해서 들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내자 매카트니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아이고, 지금쯤 나한테 질렸겠어요.” 매카트니는 머리색이 약간 잿빛으로 보이고 목소리가 좀 더 걸걸해졌지만, 상대방이 지나치게 냉소적이거나 친절하게 군다 싶으면 여전히 은유적인 의도로 눈썹을 치켜 올릴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떠드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격리 생활은 어떻습니까? 사실 저는 매우 운이 좋았어요. 올해 초, 휴가 중이었는데 우리가 돌아온 후에 봉쇄 조치가 시작되었어요. 그래서 영국으로 날아와 우리 딸 메리와 손자들과 농장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리 나쁘진 않았죠. 몇 가지 작곡할 곡이 있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끝내지 못했던 것을 마무리할 수 있었어요. 아시죠? 물티슈, 손 소독제, 사회적 거리 두기와 함께 녹음을 했어요.
이번 일이 지나가면 사람들의 행동에 변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요? 단기적으로는 사람들의 행동이 달라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축구 경기나 콘서트, 극장에 가는 것은 어려울 테니, 이런 것이 우리 모두를 변화시킬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해요. 우리는 건강보험을 더욱 가치 있게 생각하게 되겠죠. 그동안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왔는데, 잘된 일이에요. 앞으로 간호사들이 좀 더 대우받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건강 진료 체계의 가치를 정말 이해하게 됐어요. 사람들이 좀 더 친절해질 것이라 생각해요.
공연과 투어 측면에서 음악 산업은 어떻게 될까요? 누구도 모르지 않을까 싶네요. 아시다시피 올해 글래스톤베리에 설 예정이었지만 6월까지도 이 위기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우려하고 있었는데, 결국 행사가 취소됐네요. 그렇지만 여름은 콘서트의 계절이에요. 함께 모여 공연하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면서 어떻게 공연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극장, 영화관 등 모든 것이 마찬가지예요. 이것이 라이브 콘서트의 끝을 의미하는가? 저도 모르겠어요.
엘튼 존처럼 라스베이거스에 살거나 브루스 스프링스틴처럼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나요? 그다지요. 어떤 이들은 제게 충분히 많은 이야기와 노래가 있다고 말하면서 브로드웨이에서 공연하길 바라지만, 한 가지 저를 망설이게 하는 것은 브루스가 그걸 방금 전에 했다는 거죠. 무슨 말인지 알죠? “아, 갑자기 나도 지금 해야겠어!” 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그의 전철을 밟거나 트렌드를 따르는 것이 좀 꺼려져요. 발상은 좋은데 저는 많은 관중을 대상으로 밴드와 함께 공연하는 것이 더 좋아요. 관중이 적어도 좋고요. 작은 클럽도 개의치 않아요. 그렇게 큰 공연을 하는 것을 제가 원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 것 같아요. 라스베이거스에서의 공연은 제가 평생 동안 피하려고 했어요. 확실히 제게 매력적인 제안은 아닙니다. 라스베이거스는 죽으러 가는 곳 아닌가요? 코끼리의 무덤이에요.
리버풀로 돌아가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인가요? 리버풀 존 레논 공항에 도착하면 저를 기다리는 차를 타고 거기서부터 직접 운전합니다. 운전을 좋아하는 데다가 다른 사람의 차를 타고 리버풀을 돌아다니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아시잖아요. 리버풀에 있는 길은 빠삭하게 잘 알아요. 대부분 리파(매카트니가 1996년 공동 설립한 리버풀 인스티튜트 포 퍼포밍 아트의 줄임말)로 운전해서 가는 길에 오래된 장소들을 지나가는데, 마치 스스로 여행 가이드가 되어 투어를 하는 기분이 들어요. “이곳은 존의 어머니 줄리아가 살던 곳입니다. 우리는 그녀를 자주 찾아 뵙곤 했죠. 그리고 이곳은 제가 첫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거리입니다. 저기는 우리가 소규모 첫 공연을 했던 곳이고요.” 이렇게 말하겠죠. 수백만 가지 기억이 홍수처럼 되살아나요.
지금도 리버풀 사투리를 쓰나요? 그곳에 살지 않으면 별로 생각나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좀 사용해요. 만약 어떤 것이 좀 오래되었다면 ‘안트워키 Antwacky’라고 하고 누군가 ‘둘라리 Doolally’하다고 말하기도 해요. 좋은 표현이라 가끔씩 대화 중에 튀어나오긴 하는데 확실히 거기 살 때만큼은 아니죠. 얼마 전에 누군가 제게 리버풀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남쪽에서 더 오래 살았다고 상기시켜주더라고요. 제가 리버풀에 살았던 것은 고작 20년이에요. 하지만 저는 리버풀이 좋아요. 그곳의 역사가 좋고, 지금은 리파가 된 오래된 모교가 좋아요. 일 년에 두어 번 학교에 가서 작곡 수업을 진행하고 졸업식에도 참석하는데 올해는 아쉽게도 취소되었네요.
학창 시절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늘 학교 다닐 때 기억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비틀스의 반은 그곳에서 만들어졌다!”고 말하곤 하니까요. 저와 조지는 같은 학교를 다녔고 존은 옆의 예술 학교를 다녔는데 지금은 리파의 일부예요. 그러니 비틀스의 3/4은 어떻게든 리파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이 항상 뭔가를 떠오르게 해요. 졸업식에서 연설을 할 때마다, 어릴 때 제가 발표하는 학교 행사에 엄마, 아빠가 오던 모습이 늘 생각나요. 엄마, 아빠는 자식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했어요. 그래서 졸업식 연단에 서서 학부모와 아이들을 보면서 연설을 하려면 꽤나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요. 그곳에 수백만 가지 추억이 있고 대부분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입니다.
리버풀FC 팬들이 ‘올 유 니드 이스 클롭’을 부르곤 합니다. 이 외에 비틀스 노래 중에 응원곡으로 쓸 만한 가장 좋아하는 곡이 있나요? 진짜 모르겠네요. 1960년대 리버풀 팬들이 ‘쉬 러브스 유’를 부르면서 관중석이 전부 “오오오!” 하는 오래된 영상이 있어요. 애들까지 전부 같이요. 꽤나 감동적입니다. 카메라가 군중 위를 지나는데 이 애들이 전부 비틀스 헤어스타일을 따라 하고 다 같이 ‘쉬 러브스 유’를 크게 부르는 거예요. 사람들이 가사를 전부 알아요. 제가 좋아하는 영상 중 하나예요. 남미로 투어 공연을 가보면 관객들이 축구 경기처럼 뜨겁게 호응해줘요. 우리가 하는 일은 재빨리 음정을 파악해서 관객의 노래를 뒷받침하는 것이죠.
자랑스러운 에버턴 사람 Evertonian으로서, 이번 시즌 프리미어리그가 취소되어 리버풀이 챔피언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는데 어떠셨어요? 에버턴이 홈팀이지만 몇 년 전에 에버턴뿐 아니라 리버풀도 응원하기로 결심했어요. 손자 녀석 중 몇 명이 리버풀 팬이에요. 그래서 리버풀이 올해 프리미어 리그에서 우승해서 좋아요. 사람들이 어떻게 두 팀을 모두 응원하냐고 물으면, 저는 둘 다 사랑해서 교황께 특별 허가를 받았다고 말해요.
많은 사람이 당신이 기타 솔로를 잘 치는 연주자란 사실을 잘 몰라요. 가장 좋아하는 기타 솔로는 무엇인가요? 당장 떠오르는 것은 ‘택스맨’의 솔로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집트 스테이션> 앨범에는 실제로 전체 트랙을 직접 연주했는데 꽤 좋았어요.
가장 좋아하는 비틀스의 앨범은 레드 아니면 블루, 둘 중 어떤 건가요? 화이트!
비틀스 멤버 중 누가 옷을 가장 잘 입었나요? 우리는 다 옷을 잘 입었던 것 같아요. 20대 젊은 나이에 리버풀에서 런던으로 내려와서 킹스 로드와 풀헴 로드에서 세실 지 Cecil Gee를 포함해 모든 상점을 발견했으니 정말 대단했어요. 근사한 옷과 소품을 찾는 것은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해요. 그러니 우리 모두가 개성을 살려서 잘 입었다고 생각해요. 다들 정말 말쑥했어요. 저를 제외하고 누구 하나를 뽑기는 정말 어렵네요.
두 번째로 좋아하는 제임스 본드 주제곡은 무엇인가요? ‘골드 핑거’요. 제임스 본드 주제곡은 영화의 정신을 포착해서 아주 기억에 잘 남는 것이 특징이에요. 사실 빌리 아일리시의 노래가 좋았어요. 그녀와 그녀의 오빠 피니어스가 침실에서 그걸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정말 잘 해냈다고 생각해요. 영화 속에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어쨌든 그녀가 정말 잘했다고 생각해요. 끝에 피니어스가 본드 시리즈 특유의 화음을 쓴 그 부분이 좋아요. “딩!” 이 부분요.
버디 홀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할 기회가 있다면, 어떤 것을 물어보겠어요? 아마도, “‘댓 윌 비 더 데이’의 리프는 어떻게 쓴 거야?” 정도? 하지만 우리는 그걸 해결했어요. 그리고 왜 하필 그 비행기를 탔냐고 물어볼 거예요.
수백 대의 기타를 가지고 있어요.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나요? 가장 좋아하는 기타는 에피폰 카지노예요. 최고의 기타는 아니지만 1960년대에 산 기타거든요. 채링 크로스로드에 있는 악기점에 가서 피드백을 할 만한 기타가 있냐고 직원에게 물어봤어요. 그때 지미 헨드릭스에 빠졌었거든요. 그런 스타일을 좋아해서 누구도 할 수 없는 나만의 피드백을 줄 기타를 원했어요. 그랬더니 카지노를 보여주더라고요. 보디가 비어 있어서 피드백하기 쉽다면서요. 그 기타로 정말 재미있게 연주했어요. ‘택스맨’ 솔로와 ‘페이퍼백 라이터’의 리프를 연주했던 그 기타예요. 여전히 제가 가장 좋아하는 기타죠.
과거에 가끔씩 존 레논의 꿈을 꾼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장 최근은 언제인가요? 세어보지는 않지만 아마 한 달 전이었던것 같아요. 평소에 무대 위에 서거나 대기실에서 공연을 준비하거나 녹음실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꿈을 자주 꿔요. 아마 많은 연주자가 그럴 거예요. 그래서 존이나 조지가 꿈에 종종 나와요. 별다른 생각 없이 정말 평범하게 수다 떨고, 우리가 작업하는 것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좋아요. 저는 그때 그 소년들을 여전히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죽기 전에 존을 훨씬 자주 만났죠? 그런 점에서 저는 운이 정말 좋았어요. 우리는 불화를 정리했고 자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어요. 끝까지 우린 친구였어요.
항상 흑인 음악의 열렬한 옹호자였어요. 당신에게 블랙 라이브즈 매터 BLM 운동은 어떤 의미인가요? BLM 운동은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는 심한 편견을 상기시키기 위해 중요합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할 때마다 이토록 무지한 잔혹함을 사회로부터 뿌리 뽑기 위해 얼마나 많은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 일어나요. BLM이 그 예입니다.
음악 산업은 가장 다양한 창조 산업 중 하나일 텐데요. 앞으로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흑인 음악가들은 좋은 음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고, 그렇게 인정받아서 결과적으로 충분한 성공을 누릴 수 있었죠. 그들의 성공의 수혜를 입을 수 있는 우리는 운이 좋은 겁니다. 그걸 받아들여야 해요.
카니예 웨스트와 함께 작업하면서 무엇을 배웠나요? 녹음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어요. 그는 모든 아이디어를 전시하고 한데 모아서 때론 큰 성공을 거두죠. 그걸 일깨워줬어요.
리한나의 앨범에 피처링으로 참여한 적 있어요. 함께 작업하면서 배운 점은요? 그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가진 사람도 아주 쿨한 여자일 수 있다는 점.
오늘날 채식주의는 사실상 정설이 되었습니다. 다소나마 정당성을 인정받았다고 느끼십니까? 예전에는 채식주의자 되기가 어려웠어요. 채식주의자를 비웃는 분위기였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서 구할 수 있는 환상적인 음식과 특유의 라이프스타일을 채택한 멋진 사람들을 볼 수 있어서 정말 행복합니다.
당신의 가족 중 여럿이 가족이라는 이유로 명성을 얻었습니다. 왕조처럼 보이는 가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왕조를 만들자는 생각에서 출발한 건 아니지만 애들이 잘되면 행복하죠.
자신의 위치의 독특함을 곱씹어본 적이 있나요? 설마요! 중요한 것은 저희는 처음에 정말 별로였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그다지 잘하지 않았어요. 그러다 함부르크에서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연습을 통해 나아졌어요. 누군가가 “메리 이모에게 존 삼촌에 대해 말할 거야’라고 말하면 우리는 무슨 음정을 쓸지 어리둥절해하며 서로를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냥 ‘짠!’하고 모두가 알았어요. “쾅! 이건 ‘롱 톨 샐리’야. 자 간다.” 우리에겐 음악적인 부분에서 공통점이 많았어요. 그리고 다른 측면도 마찬가지예요. 비틀스는 일종의 예술 밴드였어요.
직접 쓴 음악을 자주 듣나요? 늘 일을 병행하는 휴가 아닌가요? 그렇게 자주 듣지는 않는데 라디오에서 제 노래를 들으면 기분 좋게 놀라요. 그리고 음향 확인을 위해 제 곡이나 비틀스의 리마스터링한 곡을 들으면 언제나 행복의 추억 열차를 탑니다.
자신이 밴드 할 사람이라는 것을 언제 처음 알았나요? 함부르크에서요. 우리는 친구였어요. 그 전에 존이 있던 작은 그룹, 더 쿼리멘 시절부터 존과 알던 사이였는데 같은 밴드는 아니었어요. 조지하고도 친구였죠. 히치하이킹도 하고, 서로 가까이 살았고. 그러나 밴드로서 함부르크에 초청받았을 때야 비로소 우리를 한 무리로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우리는 서로 아주 가까이 살아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아니라 사회적 붐비기였어요. 네 명이 한 방에서 담요를 찾고 꽁꽁 어는 영국의 겨울에 난방이 고장 난 승합차 뒷좌석에 같이 앉고, 겹겹이 쌓여 누워야 하고. 이런 것들이 우리를 친구로 만들어주었어요.
당신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무엇입니까? 너무 많아요. 비틀스가 해산할 때 아마도 우리끼리 서로 싫어한다는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제가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인데 우리는 가족이었어요. 가족은 말다툼을 하고 투닥거려요. 누구는 이걸 하고 싶고, 누구는 저걸 하고 싶어 해요. ‘비틀스와 애플’을 구하고 앤솔로지와 비틀스 앨범의 리마스터를 발매하고 피터 잭슨의 <겟 백>을 제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밴드를 고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고소하지 않았다면 모두 앨런 클라인에게 넘어갔을 거예요. 상상하시는 것처럼 참혹했고, 저에게는 끔찍한 시간이었어요. 술도 과하게 마셨고, 약물도 과하게 했어요. 미친 짓이었지만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어요. 평생 그렇게 열심히 이룬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을 볼 수는 없었거든요. 제가 비틀스를 해산시켰고, 동료들을 고소한 어리석은 배신자라고 여기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믿었어요. 그 점이 가장 이상해요. 소문이 너무 퍼져서 몇 년 동안 스스로를 비난할 뻔했으니까요. 그런 생각이 너무 바보 같다는 것을 깨달았고, 결국 우리는 다시 모였어요.
비틀스 해산 이후에 겪은 우울증에 대해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명성을 좇는 과정과 음악 산업의 압박이 정신 건강에 영향을 미쳤나요? 사실 그냥 술을 진탕 마셨어요. 정신 건강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어요. 매우 우울한 시기였기 때문에 그랬다고 확신해요. 참 웃긴 것이, 제가 처음 린다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이 하나를 데리고 이혼한 상태로 뉴욕에서 혼자 힘으로 살아야 했어요. 린다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는데, 혼자 힘으로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했어요. “나 스스로 여기서 벗어나야 해요. 내가 우울증을 앓으면 다른 사람들 손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죠. 그런 일이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거에요.” 그때 저도 우울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뭔가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스스로의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이 저만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우울함과 의심에 굴복하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라고 자신을 설득시키면서 빠져나왔어요. 그러나 이것은 흔한 현상이에요. 여전히 곡을 쓸 때마다 “이건 쓰레기야. 끔찍하네. 제발 좀” 이런 말이 나와요. 저는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더 잘할 수 있어. 형편없으면 더 낫게 만들어야지”라고 말해요. 그리고 때로는 존경하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아니야. 이 곡은 대단해. 걱정하지마”라고 말하며 제가 생각지 못한 부분을 알려주죠. 연주자로서 종종 ‘진짜 좋은가? 별로인가? 너무 진부한가?’ 같은 고민을 해요. 작곡가로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결국에는 다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죠. 한 가지 좋은 점은 제가 신경을 쓴다는 것입니다. 항상 헛소리만 내뱉는 게 아니에요. 좋은 곡을 만들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요. 항상 성공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이게 좋아요. 그래서 계속 음악을 하는 겁니다.
1960년대의 명성과 지금은 무엇이 다른 것 같습니까? 너무 많아요. 1960년대의 명성은 완전히 딴판이었어요. 그때는 새로웠고, 순수했고, 흥미로웠어요. 누군가 사인을 청할 때마다 “네! 두 장 해드릴게요!”라고 말하게 되는 것처럼요. 그렇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게 점점 닳아 사라지기 시작할 때, 성가신 마음이 들어요. 저녁을 먹는데 사람들이 갑자기 와서 사인을 부탁을 하면 “식사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시겠어요?”라고 정색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점차 핼쑥해지면서 명성은 전과 달리 매력을 잃게 될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저는 지금처럼 소셜 미디어 같은 것들로 유명해지고 싶지는 않아요. 우리 가족도 다들 인스타그램을 하는데 제가 말해요. “이런 짓을 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매번 포스팅을 올릴 때마다 뭔가 기발한 말을 떠올려야 하잖니.” 지구상 최악의 압박입니다. 사실 인스타그램 계정도 갖고 있고 가끔씩 무언가를 올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진짜 제가 하는 게 아닙니다. 저희 팀에서 하는 일이예요. 그들이 하는 일을 지지하고 제가 참여하기도 해요. 특히 누군가의 생일이나 사망같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한번은 기네스 팰트로와 저녁을 먹는데 제게 페이스북 페이지가 있냐고 묻길래 있긴 한데 자주 보진 않는다고 답했어요. 그랬더니 겁에 질려 저를 쳐다보면서 말하는 거예요. “그건 아주 위험할 수 있어요.” 제가 대답했죠. “글쎄,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귀찮아지지 않잖아.” 저도 슬쩍 보곤 하지만, 전혀 매력적이지 않아요. 차라리 구석에 가서 곡을 쓰겠어요. 그러니까 오늘날의 명성은 이런 모든 이슈가 작용하는 거대한 판이 되었어요. 저는 비욘세나 리한나보다 더 많은 히트곡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그런 게임을 하고 싶지 않아요. 그다지 관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 여러분. 저는 식당에 있어요. 여긴 쿠알리노스라는 곳인데 이런 걸 먹고 있어요.” 자기가 어디 있었는지 왜 아무한테나 말하려고 해요? 왜 내가 뭘 먹는지 말하고 싶어 합니까? 저는 반대입니다. 저는 사람들이 제가 뭘 먹는지 몰랐으면 좋겠어요. 그건 사적인 일이잖아요. 안 그러면 사생활이 없어져요. 저로서는 1960년대에 순수했던 시절을 지내와서 다행이에요. 그다지 순수하진 않았어도 명성을 보는 시선은 그랬거든요. 유명해지는 것이 좋았고 그 후엔 조금 닳아 없어지고, 저처럼 오랫동안 유명하게 지내면 때로는 전율이 일고, 때로는 귀찮은 일이 돼요. 하지만 전략이 있었어요. 저는 사진을 찍지 않는 부류의 사람 중 하나예요. 길거리를 가는데 누가 “폴! 폴!” 부르며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아이폰을 꺼내려고 한다는 걸 알죠. 그러면 말해요. “죄송합니다. 저는 사진은 안 찍습니다.” 그러고는 말하죠. “실례가 안 된다면 차라리 같이 수다를 떨까요?” 그러고 나서 사진을 찍으면 갑자기 나 같지 않게 느껴진다고 설명하면서 5분의 시간을 보내요. 유명인이 된 기분이에요. 그리고 제가 항상 뭐라고 말하는 줄 아세요? 와서 원숭이와 함께 사진 찍으라는 남부 프랑스가 생각난다고 말해요. 갑자기 그런 기분이 들어요. 나는 나 자신이 되어야 해요.
공공장소에 드러나는 걸 싫어하는 것은 아니시죠? 어렸을 때는 버스를 타고 서너 정거장만 가서 내리고 주위를 둘러봤어요. 나중에 조지 해리슨이 묻더군요. “요즘도 버스 타고 다녀?” 제 대답은 “그럼. 나는 버스가 좋아. 평범하잖아”였어요. 실제로 버스를 좋아해요. 멋진 차도 좋아하고 운전도 좋아해요. 그러나 평범함에는 무언가가 있어요. 제가 너무 유명해서 평범함이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저의 내면에는 그런 느낌이 있어요. 그 내면은 매우 중요합니다. 롱아일랜드에서 뉴욕까지 지트니라고 불리는 버스를 탄 적이 있어요. 3시간 정도 걸려요. 정말 좋았어요. 다 읽으려던 긴 장편소설, 디킨스의 <니콜라스 니클비>가 있었거든요. 그 책에 푹 빠져서 읽을 시간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지트니를 타고 사람들이 제 옆에 앉아서 말을 걸면 대답했어요. “괜찮으시다면 이 책을 다 읽고 싶어요.” 어쨌든 지트니가 뉴욕에 도착했는데 제가 가려던 곳에서 몇 블록 떨어진 곳이었어요. 그래서 나머지 구간은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놀랍게도 잔돈이 딱 맞아서 다음 버스를 탔어요. 모든 사람이 저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그러나 아무도 저에게 말을 걸지 않았죠. 그들은 뉴요커예요. 제가 버스에 탔다는 것을 눈치챘는데도 모두 앞만 봤어요. 그때 버스 뒤쪽에 있던 한 여자가 갑자기 말을 걸었어요. “폴 매카트니 아닌가요?” 그래서 “네, 저 맞아요”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버스에서 뭐 하세요?”라고 물어서 “왜 환호성을 지르면서 제 옆으로 오지 않는 거예요?”라고 답했어요. 순간 거기에 있던 사람들의 어깨가 들썩거렸어요. 모두 좋아했어요. 그녀는 제게 어딜 가냐고 물었어요. 전 그녀가 여동생을 만나러 업타운으로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우리는 사랑스러운 대화를 나누었어요. 이것이 제가 제대로 된 대화를 좋아하는 이유입니다. 저는 평범함이 좋아요. 제게는 정말 많은 것을 의미해요. 버스에 올라타서 제 자신을 알리고 싶은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안녕하세요. 폴 매카트니입니다!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늘을 날지 못하듯이 그렇게 말하진 못합니다.
- 글
- Dylan Jones
- 사진
- Mary McCartney
- 프로듀서
- Grace Guppy
- 메이크업
- Jo Bu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