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가격표가 불러오는 오해와 진실 | 지큐 코리아 (GQ Korea)

와인 가격표가 불러오는 오해와 진실

2021-05-24T11:59:02+00:00 |drink|

와인 가격표가 불러오는 착각이 항상 비극적인 것은 아니다. 상대 미각이 우리를 즐거움으로 어지럽힐 수도 있으니까.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하나씩 있다. 나쁜 소식은 비싼 와인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2002년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 발타자르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생겼다. 직원의 실수로 당시 레스토랑 와인 리스트에서 가장 고가였던 2천 달러(2백23만원)짜리 샤토 무통 로칠드 1989 와인을 18달러(2만원)짜리 가장 저렴한 와인을 주문한 젊은 커플에게 가져다준 것이다. 모양이 동일한 디캔터에 와인을 부어 제공하다가 벌어진 실수였다. 레스토랑 매니저가 실수를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고가의 와인을 주문한 월스트리트 사업가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자신의 손님들에게 18달러짜리 와인의 맛을 극찬하는 중이었다. 젊은 커플은 정말로 비싼 와인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하고 그저 장난스럽게 비싼 와인을 마시는 척하고 있었다. 레스토랑 경영자는 젊은 커플에게 실수로 나간 와인을 빼앗는 건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해 결국 양쪽 모두에게 사실을 밝히고 동일한 고가 와인을 제공했다. 사업가는 그제야 자신은 이 와인이 무통 로칠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며 말을 바꿨다. 거의 공짜로 2백만원대 고가 와인을 마신 젊은 커플은 당연히 열광했다.
겨우 2만원짜리 와인을 마시면서 2백만원대 와인이라는 착각에 빠진 사업가의 모습이 우습게 보인다고? 하지만 와인에 더 비싼 가격을 붙이면 더 좋아하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가령 원래 10달러인 와인 가격을 네 배 더 비싼 40달러로 속이면 사람들은 그 와인을 더 즐기고 좋아하게 된다. 지난 3월 스위스 바젤 대학에서 140명의 일반인 참가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실험 결과다. 연구팀은 3종의 레드 와인을 선택했다. 와인 전문가에게 평가받은 적 없는 소매 가격 10달러인 저가 와인(Montepulciano d’Abruzzo DOC, 2013, Bisanzio, Citra), 저명한 와인 평론가 제임스 서클링에게 100점 만점에 94점을 받은 32달러 중간 가격의 와인(Bolgheri DOC, 2013, Villa Donoratico, Tenuta Argentiera), 마지막으로 제임스 서클링에게 98점을 받은 65달러짜리 고가의 와인(Toscana IGT, 2013, Saffredi, Fattoria Le Pupille)이었다. 연구팀은 참가자들에게 와인 병을 보여주지 않고 잔에 따른 와인을 제공하면서 가격을 알려줬다. 중간 가격 와인은 그대로 두고 비싼 와인은 원래 가격보다 1/4 낮추어 16달러로, 저가 와인은 원래 가격의 네 배인 40달러로 보여주고 사람들의 평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지켜봤다. 실험 결과 와인의 풍미가 얼마나 진한가에 대한 평가는 가격을 속여도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저가 와인 가격을 네 배 더 비싼 걸로 속였을 때 사람들이 그 와인을 더 즐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싼 와인 가격을 1/4로 낮췄을 때는 와인을 즐기는 정도에 별 차이가 없었다.
전문가는 다를 거라고? 가격에 평가가 흔들리는 건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프랑스 보르도 대학교의 프레드릭 브로셰가 실험을 통해 증명한 사실이다. 그는 57명의 와인 전문가를 두 차례 초대해서 와인의 맛을 평가하게 했다. 첫 실험에서는 최상급 그랑 크뤼 와인을 제공하고 두 번째 실험에서는 그저 평범한 테이블 와인을 주었다. 실험에 참가한 전문가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실은 두 종류의 와인 모두 병만 다를 뿐 내용물은 똑같았다. 중간급 보르도 와인을 미리 각기 다른 라벨이 붙은 병에 옮겨 담았던 것이다.
와인 전문가들의 평가는 어땠을까? 최상급 그랑 크뤼 병에 담긴 와인은 맛이 풍부하고 복합적이면서도 균형 잡힌 훌륭한 와인이라고 평가했다. 반면 평범한 병에 담긴 와인은 미약하고, 부족하며, 맛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라는 비평이 쏟아졌다. 실제로는 중간급 와인임에도 불구하고 비싼 가격을 매긴 와인을 호평한 전문가는 40명이나 됐지만 싸구려 와인을 맛있다고 한 사람은 12명에 불과했다.
가격에만 흔들리는 게 아니다. 색깔만으로도 엄청난 영향을 받는다. 와인 전문가 54명을 대상으로 한 브로셰의 실험은 전설적이다. 브로셰는 54명의 전문가에게 진짜 레드 와인과 진짜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와인의 아로마를 묘사하라고 했다. 며칠 뒤 두 번째 시음에서는 두 종류의 레드 와인을 제공하고 평가하게 했다. 하지만 두 가지 레드 와인 중 한 잔은 사실 이전 실험에서 사용한 화이트 와인에 식용 색소를 타서 레드 와인처럼 보이게 한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실험 참가자들은 붉게 물들인 화이트 와인의 아로마를 진짜 레드 와인을 마셨을 때와 비슷한 용어로 묘사했다. 영국의 유명 와인 칼럼니스트 제이미 구드의 책 제목 <I Taste Red>는 브로셰의 이 실험에서 따온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시각 중심적이다. 맛이나 향은 시각에 따라 흔들린다. 와인이 진한 색깔이면 맛과 향도 진하게 느끼기 쉽다. 와인을 마실 때 먼저 눈을 감고 맛보길 권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 좋은 소식을 알아볼 차례다. 이 역시, 비싼 와인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가격에 흔들리고 시각에 흔들리는 상대 미각을 가졌다. 고개를 갸우뚱할 법하다. 미식가가 되려면 예민한 절대 미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각이 예민하면 오히려 음식 맛을 즐기기 어려울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유전적으로 쓴맛을 더 잘 느끼는 슈퍼테이스터는 채소를 즐기기 어렵다. 조금만 쓴맛이 나도 더 예민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식과 와인을 페어링하는 것도 맛과 향을 분석하는 차원에서는 별로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음식과 와인을 함께 먹으면 그 속의 수많은 향기 물질이 뒤섞여 섬세한 향미를 감별하기 어렵다. 게다가 음식 속 단백질과 와인의 풍미 물질이 결합해 휘발하지 못하게 되면 향기 자체가 줄어든다. 치즈를 먼저 시식하도록 한 다음 와인 맛을 평가하게 하면 전문가들도 힘들어하는 이유다. 와인 맛을 제대로 분석하려면 조용한 공간에서 아무 음식도 없이 혼자 마셔야 한다. 하지만 맛 좋은 음식과 함께 멋진 음악을 들으면서 와인을 마시는 게 더 즐거운 일이다. 가장 맛 좋은 와인은 좋은 사람과 함께 마시는 와인이라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의 감각은 상대적이어서 좋은 사람과 함께 있거나 멋진 경치만 바라봐도 맛이 더 좋게 느껴진다. 미식은 절대적 맛을 분석하는 일이 아니라 시간, 공간, 인간이 음식과 함께 만들어내는 경험이다. 상대 미각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래서 좋은 소식이다. (옆 테이블에서 무례하게 떠드는 손님 때문에 음식 맛이 떨어질 때는 조금 불행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다수 전문가가 붉게 물들인 화이트 와인을 가려내지 못하거나 와인 병 라벨 사기에 속아 넘어갔다. 그렇다고 모든 전문가가 와인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고가의 와인을 마셔도 맛이 없으면 인상이 찌푸려지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수 있다. 다른 모두가 좋아하는 영화라도 예술적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비평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처음 볼 땐 졸리기만 했던 지루한 영화를 자세한 배경 설명을 듣고 난 뒤에 보면 흥미롭게 즐길 수 있듯 음식과 와인도 그렇다. 처음에는 혀에 감기지 않는 맛이었지만 여러 번 맛보고 더 잘 알게 될수록 더 즐겁게 느껴질 수 있다. 나쁜 소식인 줄로만 알았던 미각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이 알고 보면 좋은 소식인 것처럼.
글 / 정재훈(약사, 푸드라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