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한 구절 맛보겠소 | 지큐 코리아 (GQ Korea)

음식 한 구절 맛보겠소

2021-09-29T17:25:13+00:00 |food|

이 계절에 품고 싶은 한국 문학 속 음식들.

평양냉면을 담은 수제 굴곡 볼, 이도. 옻칠 마연 젓가락, 정은진 작가 at 솔루나리빙.

평양냉면 김소저, 1929년 12월 <별건곤>, ‘사철 명물 평양 냉면’ “함박눈이 더벅더벅 내릴 때 (중략) ‘국수요~’ 하는 큰 목소리와 같이 방문을 열고 들여놓는 것은 타래타래 지은 냉면이다. 꽁꽁 언 김치죽을 뚜르고 살얼음이 뜬 진장김치국에다 한 젓가락 두 젓가락 풀어먹고 우르르 떨려서 온돌방 아랫목으로 가는 맛! 평양냉면의 이 맛을 못 본 이요! 상상이 어떻소!” 당대 칼럼니스트 김소저가 잡지 <별건곤>에 자랑한 평양냉면 상상에 속이 찌르르, 등짝이 뜨끈해진다. 글이 실린 잡지 <별건곤>이 다음과 같은 취지와 함께 ‘취미 잡지’라 자칭한 점도 즐겁다. “취미라고 무책임한 독물 讀物만을 늘어놓는다든지, 혹은 방탕한 오락물만을 기사로 쓴다든지 하는 등 비열한 정서를 조장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취미는 할 수 있는 대로 박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취미 잡지를 시작하였다.” 내일은 지루한 권태를 박멸하기 위해 겨울보다 먼저, 육수를 담은 주전자에서 살얼음이 콸콸 나오는 을밀대나 그 퉁퉁한 메밀면이 엉덩이를 자꾸만 끌어 앉히는 서북면옥을 맞이하러 가야겠다. 평양냉면이 취미, 특기는 먹기.

분청 찻잔, 이강효 작가 at 솔루나리빙.

계피주 이규보, 1241년, <동국이상국집> 이규보를 두고 학계에서는 광세의 문인인가, 시대의 아부꾼인가 평가가 오간다고 한다. 무엇이 됐든 술을 좋아한 문인으로는 이견 없이 꼽히는데, 그가 술에 대해 남긴 문장을 옮겨보면 이렇다. “근래엔 술마저 말라버려 온 집 안에 가뭄이 든 것 같았네.”(술을 보내준 친구에게), “나는 노련한 의원이라 병을 잘 진단하지. 지금 술병이 누구 때문인가 하면 틀림없이 누룩 귀신일 걸세.”(숙취로 고생하는 친구에게), “죽는 날에 가서야 비로소 술잔을 놓으리라”(시 ‘명일우작’). 술 냄새가 들큰하다. 풍류를 사랑한 이규보 선생을 따라 “마른 입술 축일 길 없고”, “어깨는 산처럼 솟는” 이 가을에는 계피주를 마셔봐야겠다. 참고로 1924년에 출간 된 한국요리책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 계피주로서 계피정 4그램, 단사리별(설탕 시럽) 1그램, 물 1백 그램을 병에 넣고 잘 봉하여 3~4일 후에 마시라고 전한다. “푸른빛 계피주 잔질하여 향기롭고 / 가을 과실의 붉은빛은 깎여서 사라지네 … 그대는 지금 사람들의 사귀는 것을 보라 / 나부끼는 가을 구름과 같다네”.

설렁탕을 담은 보랏빛 ‘파우더 글라스’, 이도.

설렁탕 현진건, 1924년, <운수 좋은 날> 국밥 맛을 알아버렸다. 피자, 햄버거 무엇이든 먹어버리고 싶은 가짜 식욕이 탕진된 기력 따라 희미해지면 도리어 선명해지는 간절한 소망. 아, 국밥 한 그릇 하고 싶다. 개중에서도 곰탕보다 뽀얗고 해장국보다 담백한 설렁탕은 주저없이 기대고 싶은 맛이다. 한국식생활문화학회지가 이르는 “조선 풍속화 중 주막이나 장터에서는 으레 주모가 큰 가마솥을 걸어놓고 국밥을 떠주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국밥은 예로부터 전쟁터나 노역장의 많은 사람에게 간편하게 급식할 수 있는 메뉴였다”는 설명을 보면, 노동 후 국밥 한 그릇은 손톱 끝까지 채워진 기운이 새겨온 본능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 첨지가 “새침하게 흐린 품이 눈이 올 듯 하더니 눈은 아니 오고 얼다가 만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컬컬한 목에 모주 한 잔도 적실 수 있거니와 그보다도 앓는 아내에게 설렁탕 한 그릇도 사다 줄 수” 있던 그날의 돈은 80전. 그 돈을 벌기 위해 남대문으로, 인사동으로, 비 내리는 겨울 자락을 뛰어다니던 그의 뒷모습이 어른거려서, 아, 국밥 한 그릇 또 하고 싶다.

가자미를 담은 대나무 옻칠 함, 솔루나리빙.

가자미 백석, 1936년 9월 3일자 <조선일보>, ‘가제미’ 엄마가 항구에서 갓 사온 가자미회를 먹을 때면 입을 조심조심 우물거려야 했는데, 곱게 뜬 이름 모를 생선들과 달리 가자미는 늘 뼈째 숭덩숭덩 썰려 있어서다. 박력 있게 콱 물어버리거나 살살 달래가며 으깨거나. 어떻게 먹든 씹을 때마다 고소해지는 듬직한 식감이 마음에 들었다. 백석도 가자미가 좋았나 보다. 1936년 가을에 ‘가제미’란 제목의 글을 남겼다. “동해 가까운 거리로 와서 나는 가제미와 가장 친하다. 광어, 문어, 고등어, 평메, 횟대…. 생선이 많지만 모두 한두 끼에 나를 물리게 하고 만다. 그저 한없이 착하고 정다운 가제미만이 흰밥과 빨간 고치장과 함께 가난하고 쓸쓸한 내 상에 한 끼도 빠지지 않고 오른다.” 고추장을 올려 먹는 정다운 가자미라. 가자미를 구워 먹었나 튀겨 먹었나 모르겠으나, 한두 끼에 물리기 십상인 입맛의 백석이라면 단연 뼈째 썬 담백한 회로 즐기지 않았을까 싶다. “음력 8월 초승이 되어서야 이 내 친한 것이 온다”며 백석이 오매불망 가자미를 기다리던 그 계절이 왔다. 달이 차오르고 가자미가 살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