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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난관에 직면한 나폴리의 전설적인 테일러 숍

2023.12.15김은희

지난 한 세기 동안 나폴리의 마스터 테일러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그들이 확립한 이탈리아의 테일러링 전통은 오늘날 젊은 세대가 서둘러 보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사라질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모든 전통은 나름의 역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전통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전통이 존재하는 이유나 의의는 매 순간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전통은 그것을 계승해야 할 필요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저 과거의 어떤 방식에 대한 헌사로만 남게되면 당장의 현실적 고려들에 의해 변형되고 변질되고 만다.

6월의 어느 따뜻하고 상쾌한 아침, 나는 마리아노 루비나치를 만나기 위해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다. 그의 아틀리에에서 내려다 보이는 자갈길은 나폴리의 작고도 고유한 비스포크 테일러링 세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셔츠와 타이를 판매하는 플래그십 스토어 위층에 마련된 루비나치의 사르토리아, 즉 양복점은 16세기에 지은 팔라초 첼라마레 Palazzo Cellamare에 자리 잡고 있다. 멀지 않은 곳에 나폴리만이 있기 때문인지 공방 입구는 내륙으로 향하는 지중해 바람의 내음이 맴돌았다. 실내로 들어서자 달콤하고 청량한 여름 공기와 질 좋은 커피, 고급 원단, 그리고 올드 머니 특유의 향이 한데 어우러지고 있었다. 나폴리는 이탈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지만 테일러링에 관해서라면 다른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를 입증하는 증거 자료도 있다. 루비나치의 공방 한쪽 벽에 걸린 화려한 액자에 담긴 낡은 문서는 1941년 피에몬테 왕자가 루비나치의 부친 젠나로를 이탈리아 왕실의 테일러로 지정했음을 알리는 임명장이다.

젠나로 루비나치가 그의 전설적인 사르토리아 런던 하우스를 개업한 건 1932년이다. 새빌 로의 테일러링 전통을 이탈리아에 소개하고 전파하는 것이 취지였다고 한다. 당시 나폴리에서 무게감 있는 영국식 수트는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귀족들이 여름마다 나폴리를 방문해 루비나치 가문과 같은 상류층과 교류를 했던 탓이다. 그러나 런던 하우스가 유명해진 이유는 7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나폴리의 테일러링 전통을 단순히 따르고 재현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본고장보다 따뜻한 지중해 기후를 고려해 영국식 수트의 일부 요소들을 덜어낸 덕이다. 그 시절 루비나치 공방의 수석 재단사였던 빈센초 아톨리니는 영국식 수트 재킷에 흔히 사용되던 말털, 캔버스, 그리고 어깨 패딩을 최초로 생략한 인물로 평가된다. 모던 나폴리탄 테일러링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톨리니는 소위 “돛단배” 포켓으로 통하는 바르케타 포켓 같은 본인만의 시그니처 요소를 시도하기도 했다. 가슴께의 바르케타 포켓은 그 각도가 작은 돛단배의 뱃머리를 연상시킨다는 데서 이름을 얻었다고 일각에서 주장하기도 한다. 그는 양질의 원단 외에 별다른 재료나 부자재의 도움 없이 나폴리탄 테일러링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가볍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실루엣을 완성시켰다.

젠나로가 세상을 떠난 1961년에 이르러 소프트 테일러링 기반의 셔츠처럼 가벼운 나폴리탄 재킷은 하나의 전통으로 확립되었고, 그 전통은 아톨리니를 비롯한 비스포크 테일러들이 계승했다.(비스포크는 ‘말하는 대로’라는 뜻으로 주문 제작형 수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원단을 고객의 요청에 따라 미리 주문하던 방식에서 비롯된 용어다.) 그들이 창안한 새로운 접근의 영향은 20여년이 지난 1980년대에 들어 조르지오 아르마니와 같은 디자이너들의 작업에서도 발견되었고, 해체주의적인 오버사이즈 수트를 탄생시키며 나아가 리처드 기어와 에릭 클랩튼을 비롯한 팬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우아함의 정의를 새롭게 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세계 무대에서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규모를 확보해야만 했고, 그렇기 때문에 아르마니 같은 유명 디자이너들도 결국 기성복 시장을 통해 사업 확대를 이뤄낼 수밖에 없었다. 제아무리 최고급 맞춤 수트를 제공한다 해도 기성 패턴을 사용하는 이상 선친의 뒤를 이어 마리아노가 운영하는 루비나치 공방의 비스포크 전통과 주문
제작형 패턴에 비한다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공방을 물려받았을 때 저는 열여덟 살이었죠. 저는 제가 하는 일에 자부심이 있고, 아버지가 시작하신 일을 이어나가는 데 진심이에요”라고 마리아노는 말한다. 올해로 여든 살인 마리아노는 그가 물려받은 사르토리아의 이름을 런던 하우스에서 루비나치로 바꾼 데다 밀란에 지점을 새로 열어 아들 루카에게 운영을 맡기기도 했다. 런던에 설립한 지점은 딸 키아라가 책임자로 있다. 나폴리에 위치한 마리아노의 공방을 방문한 날, 그는 안경과 색을 맞춘 브라운색 트라우저와 스웨이드 로퍼 차림으로 나를 맞이했다. 손목에는 롤렉스 시계를 찼고 드레스 셔츠의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원단 샘플이 수북이 쌓인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는 바람에 그는 아직 고객 응대에 한창이었다. 그 고객은 다름 아닌 캘빈 클라인이었는데, 마리아노가 들려준 얘기에 따르면 바니스 설립자의 손자이자 상속자인 진 프레스먼의 소개로 수년 전 루비나치와 처음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은발인 미국의 패션 아이콘 캘빈 클라인은 작업실 안쪽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 루비나치 가문이 대대로 일군 부가 자아내는 그윽한 분위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루비나치 가문은 순서대로 해상 운송과 골동품,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성복을 통해 가문을 키워낸 것으로 알려졌다. 배우와 재벌, 그리고 왕족을 포함하는 루비나치의 고객 대다수와 마찬가지로 클라인은 프라이버시를 중시한다. 수트 제작자의 역할은 “의사”와 비슷하다고 귀띔해준 마리아노는 그의 딸 알레산드라에게 나를 데리고 가 위층 작업장을 구경시켜주라고 부탁했다. 클라인에 대한 배려였으리라.

응접실을 내려다보는 계단 꼭대기에 가까워지자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 상호작용하는 현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지점이 있었다. 왼편 아래층은 최소 5천 달러에 달하는 비스포크 수트를 맞추러 온 고객들을 위해 루비나치가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처럼 피팅을 도와주는 영역이다. 오른편에 자리 잡은 2층 공간에서는 마스터 테일러 20여 명이 루비나치의 요구사항을 반영해 수트를 제작한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이러한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던 건, 그것이 전통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시장의 역학이 그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트가 필요한 젊은 청년은 으레 아버지의 단골 테일러를 찾고, 젊은 견습을 구하는 나이 든 테일러는 자신의 아들에게 눈을 돌리기 마련이다.

테일러링은 수년에 걸쳐 익히는 기술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마스터 테일러는 수트한 벌을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근래 들어 그러한 전통이 해체됨으로써 이탤리언 테일러링이라는 말 자체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젊은 세대 사이에서 테일러링을 기피하는 현상이 있어요”라고 말하면서 알레산드라는 “그럼에도 그 전통을 계승하는 건 너무나도 중요해요”라고 덧붙인다. 이처럼 이탤리언 테일러링의 미래가 불확실한 현실이 나를 나폴리로 이끌었다. 몇 년 전 도쿄에 살 때 접한 일본의 상황이 연상되기도 했다. 당시 일본은 출산율 저하와 고학력자 배출 경향이 특히 두드러졌는데, 그 탓에 가구, 도예, 금박 등 각종 분야의 장인들이 후계자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비스포크 이탤리언 테일러링의 세계에서도 같은 이유로 공급이 위축되는 실정이다. 수요는 여전히 건재한 데다 전 세계 백만장자의 수가 증가세를 보임에 따라 심지어 앞으로 수요가 늘어날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크레디트 스위스는 2026년까지 전 세계 백만장자의 수가 40퍼센트나 증가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탈리아 통계청의 2022년 발표에 따르면, 이탈리아는 인구 1천 명당 신생아가 7명도 안 되는 데 반해 사망자는 12명이 넘는다. 숙련된 테일러들이 후계자를 찾을 새도 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번 나폴리행은 테일러링 세계의 인재난이 얼마나 심각한지, 그리고 어떤 대응책이 모색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결심했다. 방문지는 총 세 곳. 세계적으로도 초일류로 평가받는 사르토리아 루비나치, 사르토리아 치아르디, 그리고 사르토리아 파니코를 내밀히 들여다보기로 했다.

로베르토 치아르디 (사진 속 왼쪽에서 두 번째)와 빈센초 치아르디 (사진 속 오른쪽에서 두 번째), 그리고 사르토리아의 직원들.

인력 부족은 루비나치의 2층 작업장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10년 전만 해도 이곳에서 해마다 약 1천5백 벌의 수트가 제작되었는데 올해는 생산량이 그 절반 정도밖에 안 될 것으로 보인다. 타개책의 일환으로 20~30대 위주로 테일러를 고용해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딱 맞는 인재를 구하려면 운이 따라야 해요. 테일러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를 갖고 있거든요. 서로 다른 말을 사용한다는 게 아니라 접근 방식이나 철학이 다르다는 뜻이에요”라고 루비나치가 설명한다. 그렇기에 캘빈 클라인을 위한 수트도 계속해서 똑같은 테일러가 담당하게 될 것이다. 테일러가 바뀌면 컨스트럭션이 달라지기 때문이란다. 각자의 전통과 기준, 그리고 비밀을 지키고 계승하는 건 테일러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오늘날 테일러링은 굉장히 어렵고 힘든 일이에요”라며 루비나치가 운을 띄운다. 수트 한 벌을 제작하는 데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나도 많은 탓이다. 비스포크 테일러들은 고객의 치수를 측정한 뒤 오리지널 패턴을 개발하고, 원단 커팅을 거쳐 스티칭을 준비하는 과정을 따른다. “수트를 판매하는 것 자체는 복잡할 것이 없지요. 하지만 수트 제작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어요. 40시간이 걸릴 수도 있고 60시간이 걸릴 수도 있어요.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으면 될 때까지 계속 다시 작업해야 하거든요.” 루비나치의 설명이다.

인재난으로 인해 사르토리아들의 존재가 급격히 위협받게 된 작금의 상황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알레산드라는 대를 이어 함께 공방을 운영해온 오랜 전통에 대해 언급했지만, 현재 루비나치에 몸담고 있는 2세대 마스터 테일러는 단 한 명밖에 꼽지 못했다. 올해 마흔다섯 살인 페페는 루비나치의 마스터 테일러였던 부친을 따라 열두 살에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선대의 도움에 힘입어 조금씩 테일러로서 커리어를 쌓아왔다는 그는 부친의 뒤를 잇는 것이 본인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상 페페 자신의 뒤를 이을 아들이 있느냐는 질문에는 “아직 없다”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었다.

얼마 후 로비에서 재회한 루비나치는 소매가 내려가 있고 한때 빈센초 스타일로 알려졌던 브라운색 나폴리탄 재킷을 걸친 채였다. 그는 후계자를 구할 수 있어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나이를 생각한다면 루비나치가 그의 단골 고객들 중 일부와는 영영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부유층 고객들은 특히나 그럴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루비나치가 들려준 바에 따르면, 그들은 종종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수트를 주문하기 때문에 10년이 넘도록 새 수트를 맞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가업에 참여중인 아들 루카의 활약과 런던에서 성공적으로 사업을 이끌어가는 키아라, 그리고 이곳 나폴리의 사르토리아에서 근무 중인 알레산드라가 있기에 그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루비나치는 그런 그들이 자랑스럽다고 하지만, 사실 그들 또한 마리아노와 마찬가지로 지휘자일 뿐이다. 치수를 재고 작업을 지시하는 건 지휘자의 몫이지만 커팅과 스티칭은 어디까지나 마스터 테일러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 마찬가지로 단원이 있어야만 지휘자로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다.

모든 전통은 나름의 역설을 품고 있기 마련이다. 전통이 지켜지는 동안에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바로 그 전통이 존재하는 이유나 의의는 매 순간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전통은 그것을 계승해야 할 필요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저 과거의 어떤 방식에 대한 헌사로만 남게 되면 당장의 현실적 고려들에 의해 변형되고 변질되고 만다. 사회적, 인구통계학적 또는 경제적 요인은 언제든지 그리고 얼마든지 전통을 밀어낼 수 있고, 그렇게 어느 순간 마치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지듯 전통은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가에타노 알로이시오는 1963년 칼라브리아 남부에서 태어나 열한 살 때부터 방과 후에 견습으로 테일러링을 배우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에는 밀라노로 건너가 체사레 토시 사르토리아에서 4년에 걸쳐 테일러링을 배웠는데, 당시 그곳의 마스터 테일러는 엔니오 볼로네시였다고 한다. 밀라노를 뒤로하고 로마로 거처를 옮긴 알로이시오는 그 유명한 사르토리아 루치에서 일하며 낮에는 테일러링 학교를 다녔고, 스물두 살을 맞이한 1986년에는 이탈리아 전역의 동년배들을 제치고 저명한 황금가위상의 최연소 수상이라는 영예를 거머쥐었다. 이후 본인이 요시미 하세가와의 저서 <이탤리언 테일러링>에서 밝힌 바와 같이 황금가위상 수상은 “수상자의 운명을 결정짓는” 계기였다고 한다.

다른 저명한 이탈리아 출신 테일러들과 마찬가지로 알로이시오 또한 결국에는 외국을 중심으로 고객을 형성하게 되었다. 다만 그의 경우에는 이탈리아 경제의 극심한 부침이 원인이 아니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오히려 1990년대 초 전국적인 부정부패 척결 작업이 알로이시오의 국내 사업에 결정타가 되었다. 그의 첫 아틀리에는 오픈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마니 풀리테(mani pulite; 이탈리아어로 ‘깨끗한 손’이라는 의미)의 대대적인 시행을 맞이했는데, 이때 정치가와 공무원 그리고 기업 중역들이 그제껏 저지른 비리에 대한 엄격한 단속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탄젠토폴리 혹은 “뇌물의 도시”라는 표현까지 언론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던 이 거대한 스캔들의 여파는 이탈리아의 럭셔리 제품 시장에 위기를 불러일으켰다. 알로이시오의 주요 고객은 주로 정치가들이었는데, 비록 비리 사건에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다 해도 당분간 숨죽여 지낼 수밖에 없었던 분위기 탓에 알로이시오는 1993년과 1994년 사이 고객의 약 60퍼센트를 잃었다. 그는 임대료가 낮은 지역으로 아틀리에를 이전함으로써 비용을 줄이는 한편, 가만히 앉아 기다리는 대신 유럽과 중동에서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잠재 고객을 직접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1998년이 되자 알로이시오의 사업은 이전의 규모를 회복했을 뿐 아니라 국내 정치 상황 등의 영향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판매 규모는 매해 꾸준히 성장해왔다고 알로이시오는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성장세가 어찌나 꾸준히 이어졌던지 근래의 인재난을 겪으며 그는 비스포크 수트에 대한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생산 공정을 바꿔야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트 한 벌을 테일러 한 명이 처음부터 끝까지 담당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일종의 조립 라인을 도입했다는데, 그 덕에 신입 테일러를 기존보다 적은 양의 훈련만 거쳐 바로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 마스터 테일러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던 것과 달리 조립 라인에 투입되는 신입 테일러들은 수트의 각 부위를 전부 제작할 필요가 없고, 따라서 마스터 테일러로 성장한다는 보장도 없기 때문에 알로이시오는 그들이 독립할 걱정으로부터도 자유롭다. 오히려 그의 우려는 더 많은 마스터 테일러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업계에 이러한 미봉책이 장기적으로 악영향을 미칠 가능성에 있다.

알로이시오의 걱정은 다분히 실질적이기도 하다. 그가 로마에 위치한 이탈리아 국립 테일러 아카데미의 학장을 역임하며 3년제로 구성된 명망 있는 테일러 양성 프로그램을 관장하기 때문이다. “테일러링을 배우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주 어릴 때 시작하는 거예요”라고 알로이시오는 설명한다. 하지만 오늘날 그건 더 이상 가능한 방식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테일러링 학교에 등록하는 것이 차선책이 될 수 있다고 하면서도, 3년짜리 과정을 통해 온전한 몫을 해내는 테일러를 배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 테일러 학교의 운영을 맡은 알로이시오는 그 덕에 테일러링 업계의 인재난을 심화시키는 여러 요인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갖출 수 있었다고 말한다. 지난 몇 년에 걸쳐 그는 젊은층의 유입을 이끌어가는 데 각별히 중점을 두어왔다. 테일러링이라는 분야 자체를 따분하고 재미 없다고 단정 짓는 경우가 일반적인 청년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알로이시오는 “엄청난 성공”의 가능성을 전달하는 접근법을 취한다. 수트 제작은 고된 과정이지만 관련된 수치들은 더욱 심각한 상황이다. 이탈리아 경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비스포크 테일러의 평균 연봉은 2만에서 3만2천 유로 사이라고 한다. 배관공 평균 연봉보다 조금 적은 수준이다.

2017년 작고한 레나토 치아르디의 사진 액자가 원단 스와치 더미 위에 걸려 있다.

그러나 놀랍게도 테일러링 아카데미에 등록하는 젊은 학생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알로이시오는 말한다. 학생이 증가한 이유 중 하나는 어쩌면 요즘 인스타그램을 위시한 SNS에서 이탈리아의 유명 사르토리아들의 계정이 수만에서 수십만에 달하는 팔로워를 거느린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마리아노 루비나치가 캘빈 클라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SNS에 올라올 리야 없겠지만, 40대 중반인 루카 루비나치는 자신의 페라리나 럭셔리 시계 컬렉션과 같은 사진을 종종 포스팅하곤 한다. 변화는 단순히 지망생의 숫자 증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알로이시오는 인구통계학적으로도 상황이 바뀌고 있음이 보인다고 말한다. 과거와 달리 노동자 계층이 아닌 안정적인 중산층, 심지어는 부유층에서도 테일러가 되겠다는 이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그러나 알로이시오가 깨달은 건 이들에게는 아카데미 졸업 이후 견습 생활을 감내할 의지도, 그리고 마스터 테일러로 거듭나기 위해 공방 뒤쪽에서 몇 년씩 고생할 각오도 없다는 것이다. “요즘 청년들은 기다리고 싶어 하지 않죠. 우수한 테일러가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공부해야 한다는 사실도 이해하지 못해요”라고 알로이시오는 평한다. 어느 정도 가진, 혹은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상태에서 인생을 시작했기 때문에 기초 지식만을 활용해 갈수록 커져만 가는 럭셔리 의류 시장의 빈 구석에서 그저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지 의문이 들었다.

“요즘 테일러링의 세계에 발을 들이는 젊은이들은 좋은 테일러 숍에서 일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게 아니에요. 그들은 사업을 하고 싶어 하죠. 우리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젊은 학생들이 우리 같은 테일러나 테일러 숍 곁에 남아 미래의 인재가 되어줄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어요”라고 알로이시오는 털어놓는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건 아니다. 가명인 듯하지만 아닌 이반 아메리카노라는 이름의 한 학생은 이탈리아 남부 바실리카타에서 자랐다. 스물아홉 살인 그는 국립 테일러 아카데미에 등록하기 전 LVMH 계열 브랜드인 에밀리오 푸치에 얼마간 근무한 이력이 있으며, 아카데미 학생 시절부터 알로이시오 밑에서 일을 시작해 알로이시오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가장 중요하고 모두가 탐내는 자리”인 세컨드 커터 자리를 맡고 있다. 루비나치는 테일러들에 대해 “경계심이 매우 강한” 본성을 지닌 자들이라 평한 바 있다. 본인만의 비법과 기술을 지키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친자식에게조차도 전수해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아카데미 재학 시절 이반은 운이 좋았다. 그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강사들이 운영하는 공방에서 일을 배우며 빠르게 성장했고, 이제 그는 다른 일부 동료들과 달리 수트 한 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직접만들 실력을 갖추었다. 이반은 커팅만 하는 게 아니라 피팅에도 참여하고 때로는 고객을 상대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반은 자신이 대형 럭셔리 브랜드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은 경위에 대해 “날로 확장하는 우리 왕국의 경영을 언젠가 제가 물려받을 수 있다면 영광일 거예요”라고 얘기한다.

다른 이들은 발렌시아가나 구찌 같은 럭셔리 브랜드에 근무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겠다. 대형 브랜드는 아카데미 졸업생을 패션에 대한 공부를 마친 인재로 대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스포크 테일러링의 세계에서 아카데미 졸업생은 이제 막 첫발을 뗀 존재로 간주된다. 각자가 지닌 기술과 자격이 검증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다른 어느 업계에서도 이런 경우는 드물다. “요즘 젊은이들은 다들 너무 급해요. 기다리는 걸 싫어하죠. 하지만 테일러가 되려면 그 작업과 직업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하거든요”라고 알로이시오는 말한다. 예비 테일러들은 자신의 숍을 보유한 유명 테일러를 보며 그가 초년생 시절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몇십 년까지 주목받지 못하고 남 밑에서 일을 해왔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 이유일 수 있고, 또는 선배 테일러들을 따라 견습 생활을 하거나 다른 테일러의 숍 뒤편에서 기술을 갈고 닦는 대신 곧장 자기 사업을 시작하려는 욕심이 큰 탓일 수도 있다. 그 때문일까, 알로이시오가 두려워하는 건 테일러링의 소멸이 아니라 오히려 다음 세대 테일러들이 평범한 수준에 머무르고 마는 상황이라고 한다.

이번 나폴리행에서 만난 네 명의 테일러가 고객을 관찰해온 시간은 모두 합쳐 약 2백 년이나 된다. 내가 밟은 것과 똑같은 문턱을 드나든 고객들의 걸음걸이, 자세, 신체 비율 등을 면밀히 뜯어보며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알아내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의류학적 심리 분석에서 높은 점수를 노리기보다는 차라리 잘 차려입기를 포기해버리고 말았다. 내가 만난 이들은 내가 어떤 옷을 걸쳤다 해도 꿰뚫어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루비나치를 방문한 날은 내가 장거리 비행할 때 입는 것과 똑같이 칼하트 워크 팬츠에 민무늬 티셔츠 차림으로 갔다. 사르토리아 치아르디에는 그보다 더하게 입고 갔다는 사실에서 엄청난 해방감을 맛보기도 했다.

런던 하우스가 나폴리탄 테일러링의 현대적 기원을 상징한다면, 그 황금기의 모습을 가장 충실하게 간직한 건 아마도 치아르디일 테다. 1934년생으로 현재는 작고한 설립자 레나토 치아르디는 고향인 나폴리의 마스터 테일러 안젤로 블라시 아래에서 테일러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3년간 로마에 머무르며 기성 여성복 판매점 슈베르트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치아르디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사르토리아를 처음 세운 건 1954년이었는데, 당시 “나폴리에는 테일러가 9천 명이나 있었고 모두가 훌륭한 실력을 갖췄었다”고 요시미 하세가와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치아르디는 신체의 자연스러운 굴곡을 부각시키는 기술을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가 제작한 재킷은 어깨의 완만한 굴곡과 슬림하게 처리한 허리 부분 사이로 착용자의 등을 따라 원단이 깔끔하게 흘러내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처럼 수 미주라(이탈리아어로 착용자의 사이즈에 맞춘다는 뜻) 서비스에 대한 철저한 고집 덕에 치아르디는 이탈리아의 스타 배우들을 비롯해 발레리노 루돌프 누레예프나 마피아 두목 러키 루치아노마저 단골로 거느리고, 나아가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2017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현역이었던 그의 뒤는 현재 두 아들 빈센초와 로베르토가 잇는 중이다.

사르토리아 치아르디를 찾아간 날, 빈센초 치아르디가 블루진에 스니커즈 그리고 소매가 접힌 오픈 칼라 드레스 셔츠로 캐주얼한 차림을 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전일 들른 루비나치에서는 옷차림에 신경을 쓰지 않은 탓인지 따가운 눈총을 받았기 때문이다. 빈센초의 안내로 치아르디 응접실에서 마시는 에스프레소는 목 넘김도 한결 부드러운 듯했다. 로베르토는 옆방에서 원단 거래처를 만나는 중이었다. 사방에 널린 원단과 빈센초의 목에 풀어헤친 넥타이처럼 걸린 노란색 줄자가 아니었다면 그를 화가나 조각가로 오해했을 것이다. 손이 단단하고 약간의 야성미가 엿보이는 것이 마치 예술가 같았기 때문이다.

올해 여든 살인 마리아노 루비나치는 열여덟 살에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았다.

빈센초가 부친으로부터 처음 일을 배우기 시작한 건 열여덟 살 때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 합류한 로베르토는 빈센초보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가 약간 더 크고, 일을 시작한 것도 열일곱 살 때부터로 형보다 조금 먼저였다. 각각 50대 중반과 후반인 두 형제는 사르토리아 운영에 필요한 모든 지식을 옛날 방식으로 익혔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굉장히 천천히, 30여 년에 걸쳐 조금씩 배워나갔다는 것이다. 일류 테일러라면 고된 훈련과 그보다 힘든 작업 탓에 마흔 살이 될 무렵 이미 지쳐 있다는 말을 그들의 선친이 생전에 남긴 적 있는데, 초일류 테일러인 빈센초와 로베르토는 이 얘기를 언급하자 웃음으로 화답했다. 로베르토는 자신들이 계속해서 이 일을 할 수 있는 건 열정 덕택이라고 말한다.

피팅을 마친 후 치수와 지시사항을 테일러들에게 전달하기만 하는 루비나치와 반대로 치아르디 형제는 소수의 직원들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작업한다. 치아르디의 직원 중 둘은 일흔 살을 넘겼는데, 그들이 은퇴하고 나면 빈자리를 메우는 것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한다. 고도의 기술을 갖춘 테일러를 찾는 것 자체도 물론 어렵겠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이 분야에 50년간 몸담으며 축적한 경험과 본능을 대체할 무언가가 없다는 사실이다. 원로 테일러 수준의 지식과 노하우는 스스로 익혀야 하는 것이지 누가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아니다. 향후 몇 년 혹은 몇십 년 안에 원로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우리가 현재 아는 비스포크 테일러링은 그대로 사장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내가 만나본 테일러들은 하나같이 서로에 대한 말은 삼가면서도 각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비스포크 수트의 기준에 대해서는 완고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고 옛날 방식을 배신하는 사례들에 대해 사적인 자리에서까지 비판적이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빈센초는 진정한 수 미주라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학교의 환경 자체가 공장과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유다. 그 증거로 반쯤 완성된 재킷을 한 벌 집어 들더니 칼라와 라이닝을 가리키며 많은 테일러 학교나 공장들에서 학생을 위해 이렇게 어느 정도 사전 제작한 제품을 제공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우리 공방은 전통을 고수하죠. 30년 전이나 40년 전과 똑같이 수트를 제작해요”라는 게 그의 말이다. 두 형제가 입을 모아 강조했다시피 이런 방식은 오늘날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긴 견습 생활을 통해서만 지킬 수 있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시행착오를 겪고 기술을 연마하며 스승의 고객들과 진실된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각자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감이 들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 물어보자, 빈센초로부터 15년간 고된 훈련 끝에 비로소 자신감이 들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로베르토는 아직도 매일 새롭게 배우고 있다고 한다.

치아르디 형제는 밝은 천장 조명 아래 치수 측정과 커팅, 그리고 스티칭이 이뤄지는 응접실 밑 아늑한 지하 공방에서 테일러링을 배웠다. 수트를 제작하는 것과 판매하는 일은 완전히 다른 분야이고, 장인의 세계와 영업사원의 세계 또한 다르기 마련이다. 동일인이 제작과 판매를 겸한다 해도 말이다. 나무와 가죽, 원단과 미술품으로 가득한 응접실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라보라토리오는 흡사 라커룸과도 같은 공간이다. 벽에는 신문에서 오려낸 축구 스타 사진들이 레나토 치아르디의 사진이 담긴 액자들과 나란히 붙어 있다. 아직 제작 단계에 놓인 제품의 가치는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제아무리 화려하고 멋진 옷이라 해도 완성되기 전까지는 마치 고양이가 옷장에서 끄집어내 갈기갈기 찢어놓는 것처럼 볼품없다고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천 유로어치 원단 롤도 모르는 이의 눈에는 누군가 선반에 처박아둔 낡은 카펫으로 보일 수 있다.

빈센초는 공방 안쪽의 선반에서 겨울 코트를 한 벌 집어 들어 내게 만져보길 권유한다. 세네갈에서 들어온 주문인데 현재 제작 중인 제품이란다. 원단으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값비싼 비쿠냐 울을 사용했다는데, 분명 근사하긴 해도 괜찮은 자동차 한 대 값이 나가는 이 코트와 빈센초가 이어서 보여준 리넨 재킷이 어떻게 다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선반에 놓인 모습으로만 봐서는 둘 다 똑같이 럭셔리 의류에 불과하다. 옷의 가치를 이끌어내는 건 착용자의 몫인 것이다.

엄청난 가격대의 하이엔드 기성복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럭셔리 패션 재벌 휘하 스텔스 웰스 브랜드들과 비스포크 테일러링의 차이는, 후자의 경우 고객이 희망할 때만 희귀한 고급 원단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나폴리의 테일러들은 럭셔리가 아닌 우아함을 논하며, 빈센초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바로 “자유로움”이다. 피부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쿨하게 무심한 스프레차투라를 반영한, 그리고 맞춤 제작의 정점을 대변하는 수트를 탄생시키는 것이 목적이라는 말이다. 나폴리탄 테일러링은 날이 갈수록 해외 고객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빈센초는 해마다 두어 번씩 한국과 일본으로 출장을 다녀온다. 금융계와 산업계 고객들의 피팅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중동의 주요 고객들은 이따금 나폴리를 직접 찾아 치아르디에서 수트를 제작한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름을 대면 알 만한 배우나 기업 중역, 사업가들이 치아르디의 고객군을 형성한다.


공방을 나서는 길, 레나토 치아르디와 안토니오 파니코가 함께 찍힌 사진을 지나며 이탈리아의 테일러링 명가들이 직면한 후계자 위기를 다시 떠올렸다. 인재난과는 성격이 다른 문제인데, 그 원인은 아마도 가업을 승계해야 할 세대가 누리는 유복함에 있지 않나 짐작된다. 로베르토 치아르디는 자신의 딸이 현재 대학 재학 중이며 열네 살 난 아들은 아직 진로를 정하지 못했다고 밝힌다. 치아르디의 자식들은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테일러로서 견습 생활을 시작하는 것보다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선호할 것임이 분명해 보였다. 알레산드라 루비나치의 경우 아직 자녀의 진로가 정해지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요즘 젊은이들은 전부 틱톡 인플루언서가 되는 데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안토니오 파니코는 열한 살에 테일러링을 배우기 시작했다. 현재는 은퇴하고 아들 루이지와 딸 파올라에게 가업을 물려줬지만 여전히 매일같이 사르토리아를 찾아간다.

나폴리에서의 마지막 날 안토니오 파니코를 만났다. 그는 이탈리아의 기사 작위나 마찬가지인 노동훈장을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나폴리 외곽 테일러 마을로 알려진 지역 출생인 그는 1941년생으로 열한 살 때부터 견습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그게 전통이었어요. 수천 명의 소년이 여덟아홉 살 혹은 열 살 때부터 테일러링에 뛰어들었죠”라고 그는 회상한다. 알고 보니 파니코의 첫 스승은 주세페 루오톨로였고 다음으로는 니콜라스 블라시, 최종적으로 나폴리에서 로베르토 콤바텐테 밑에서 일을 배웠다. 모두 전설적인 거장들이다.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젊은 세대의 등장으로 테일러링 전통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굉장히 어린 나이에 테일러가 되기 위한 발을 뗀 콤바텐테와 마찬가지로 파키노 또한 본인의 기량을 일찌감치 내보였다. 견습 생활을 마쳤을 때 그는 열일곱 살밖에 안 되었고,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신의 간판을 내걸었다. 1970년 루비나치에서 일하기 시작한 뒤 얼마 되지 않아 헤드 커터 자리에 오름으로써 빈센초 아톨리니의 그림자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한 패션 매거진과의 2017년 인터뷰에서 마리아노 루비나치는 파니코가 제작한 재킷과 관련된 일화를 언급하며 그의 천재성을 설명한 바 있다. 당시만 해도 재킷의 중량은 최소 9온스였고 7온스 재킷을 만드는 건 불가능했지만, 파니코는 기존 사파리 셔츠 제작에 쓰이던 극도로 가벼운 가바딘 울을 사용해 재킷을 만들어보라는 루비나치의 주문을 실현함으로써 과연 7온스짜리 재킷이 가능함을 증명해냈다고 한다. “파니코는 말도 안 되는 블레이저를 만들어냈지요. 음속을 돌파한 것과 마찬가지였어요”라고 루비나치가 말했다.

오늘날 스타일리시한 것으로 유명한 나폴리에서도 가장 스타일리시한 것으로 정평이 난 이들은 바로 원로 테일러들이다. 화이트 팬츠와 스트라이프 드레스 셔츠 차림에 다크 블루 블레이저를 걸친 파니코는 애연가 특유의 따스하고 낮은 목소리로 나를 맞이했다. 셔츠 소매와 칼라의 라인은 마치 짙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물보라가 일렁이는 듯했다. 테일러링이 하나의 예술 형식이라는 사실은 다른 어떤 사르토리아에서보다 파니코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테이블과 바닥은 크고 작은 조각품으로 장식되어 있고, 벽에는 십수 점의 아름다운 그림이 걸려 있었다. 메인 응접실을 지나면 원단더미로 꽉 찬 높다란 목재 캐비닛을 둔 방이 등장하고, 다시 그 방을 지나면 자연광이 듬뿍 쏟아지는 피팅룸이 자리 잡고 있다. 파니코는 피팅룸 한쪽 벽에 걸린 사진을 가리켰다. 2016년 열린 테일러링 심포지움에서 찍은 사진인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테일러들”의 회합이 기록된 사진이라며 자부심을 담아 설명했다. 사진 속에서 에드워드 섹스턴을 찾아볼 수 있었다. 새빌로의 테일러인 섹스턴은 믹 재거, 비틀스, 요코 오노 등의 수트를 제작해준 장본인이다. 로렌조 치포넬리의 모습도 보였다. 파리에 아틀리에를 둔 그는 이탤리언 테일러링의 전통을 프랑스에서 이어가는 가장 유명한 테일러 중 하나다. 사진에는 물론 파니코 본인도 있었다.

파니코의 수트는 사르토리아가 위치한 건물 안에서 커팅과 스티칭까지 전부 이뤄진다. 안쪽 아틀리에에서 커팅을 담당하는 건 아들 루이지다. 나이 든 거장인 파니코는 몇 년 전 은퇴한 몸이지만, 그럼에도 테일러링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떼려야 뗄 수가 없다고 말한다. 매료의 대상은 결과물이 아닌 수트 제작 과정임이 틀림없다. 파니코는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수트에 대해 버튼 하나까 지도 정확히 기억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지나치게 감상적인 건 아니다. 그저 또 하나의 수트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떤 마스터 테일러라도 가장 중요한 수트는 아직 만들어보지 못한 수트라고 말할 것이다. 파니코는 은퇴했어도 매일 가장 먼저 사르토리아를 방문함으로써 하루를 시작한다. 이곳에서 패브릭 커터인 아들 루이지의 작업 진척을 챙기고 고객을 응대한다. 루이지 또한 안토니오와 비슷하게 이른 나이인 열네 살에 테일러 훈련을 받기 시작했지만, 그가 앞으로 이끌어갈 사르토리아 파니코는 어떤 경우에도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성장해나갈 것이다. 물론 루이지가 원단을 커팅하고 치수를 재기 위해 우아한 동작으로 줄자를 휘두를 때마다 부친은 물론이고 그가 지금껏 함께 일해온 마스터 테일러들의 흔적이 어느 정도는 늘 엿보이겠지만 말이다.

올해 쉰여섯 살로 누이 파올라의 도움을 받아 공방을 운영하는 루이지는 안토니오가 지금껏 쌓아 올린 기준과 수준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그가 부친의 공백을 얼마나 잘 메우는지는 이탈리아 테일러링 업계의 인재난이 어떻게 해소되는가에 달렸다. 파니코에서 제작하는 모든 수트는 루이지의 예리한 안목과 커팅 실력만큼이나 숙련된 직인의 스티칭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테일러링이 옛날처럼 수년간의 훈련과 견습 생활에 기반을 둔 노동계급의 직업으로 존재하기를 그치고 그 자리를 조립 라인과 유사한 작업 방식이 대신한다면, 비스포크 테일러링 업계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테일러라는 직업은 사장되고 말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10년이 지나고 나면 마스터 테일러의 정의 혹은 비스포크 수트의 개념 둘 중 하나는 바뀌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인터뷰 시작 전 안토니오 파니코와 함께 앉아 나는 말없이 커피를 홀짝였고 그는 나를 이리저리 뜯어보고 있었는데, 나폴리에서 일주일간 만나본 모든 테일러의 손을 들여다본 끝에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마스터 테일러의 세대교체가 일어날 때 물러나는 세대와 함께 잃어버리는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들의 눈이라는 사실이다. 전통이란 결국 다시 말해 하나의 방식이 표준이 되기 이전에 이미 그것을 알아보는 일종의 관점이기 때문이다. 마스터 테일러에게 수트 제작이란 새로움을 실현하기 위해 풀어야만 하는 과제이자 숙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원단을 가공해 어떤 새로움을 창조해내려면 상대가 미처 스스로도 알지 못한 부분까지 일깨울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하게 꿰뚫어보는 눈이 필요하다. 미래를 내다볼 안목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안토니오 파니코는 그의 긴 인생에서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상을 명확하게 그려내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디터
    JOSHUA HUNT
    포토그래퍼
    SAM GREG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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