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시즌 프로야구는 상하위권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순위 싸움이 치열하다. 그런데 누가 더 뛰어난지가 아니라, 누가 덜 못하느냐를 겨룬다.
6월 12일 현재, 올 시즌 프로야구 207경기의 누적 관중은 약 333만 명이다. 목표치인 700만을 넘어 800만까지 바라볼 기세다. 6월 2일엔 전국 4개 구장의 표가 전부 매진됐다. 벌써 시즌 4번째다. 롯데는 6월 10일, 무려 11번째 매진을 달성했다. 꽉 찬 경기장과는 별 인연이 없던 넥센까지 10번을 넘겼다. 전문가들은 치열한 순위 싸움, 박찬호를 비롯한 해외파들의 국내 복귀, 역전을 거듭하는 타격전이 흥행의 이유라고 평가한다.
피 말리는 순위 다툼은 분명 프로 스포츠 흥행의 필수 요건이다. 그러나 경기 내용을 보면 의문이 생긴다. 김정준 SBS ESPN 해설위원은 최근 트위터에 “못해도 나보다 더 못하는 팀이 있다면 승부에서 이길 수도 있다. 잘해도 나보다 더 잘하는 팀이 있다면 또 반대로 승부에서 질 수도 있다. 승부는 엄연한 상대성 논리에서 이뤄지지만 전체 리그의 수준으로 볼 때 전자와 후자의 차이는 엄청 크다”고 썼다. 올해 프로야구는 아무래도 전자 쪽에 가까워 보인다. 누가 더 잘하느냐가 아닌 누가 덜 못하느냐의 대결. 1위 SK도 다른 팀보다 유별나게 잘한다고 보긴 어렵다. 쉬쉬하며 말하지 않을 뿐, 분명한 하향평준화다.
올 시즌을 앞두고 프로야구 감독들의 연령대가 한꺼번에 젊어졌다. 8개 팀 중 6개 팀의 감독이 3년 차 이하 초보 사령탑이다. 긴 시즌은 고사하고 한 경기에서도 후반까지 내다보는 치밀한 운용을 보기 힘들다. 승부를 지나치게 빨리 걸거나, 반대로 움직여야 할 타이밍에 결단을 내리지 못해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가장 눈에 띄는 전술이라 할 수 있는 투수 교체부터 납득이 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단순히 투타 상대 기록이나 실점 여부만을 근거로 투수를 바꾼다. 선발이 일찍 무너지고 마무리는 없으니 허리의 부담이 가중된다. 불펜 투수들이 두둘겨 맞는 경기 후반은 역전의 역전, 널뛰기판이다. 주말만 되면 투수가 없어 난타전이 벌어진다. 언론은 감독이 모든 걸 조종하는 대신 선수에게 맡기는 야구가 프로야구의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고 선전하지만, 글쎄. 김성근, 김경문 감독의 치열한 지략 대결, 선동열의 ‘지키는 야구’, 로이스터의 ‘노 피어’ 등 감독들이 확실히 서로와 구별되는 야구를 구사하던 게 불과 2년 전이다.
선수들도 예년 같지 않다. 특히 투수진은 심각하다. 당장 내년 WBC 대표팀 마운드 구성조차 힘들어 보인다. 류현진, 윤석민이 국내 에이스 역할을 하고 있지만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다. 김광현과 양현종은 부상을 완전히 떨쳤다고 보기 어렵다. “니퍼트와 주키치를 귀화시켜야 하는 게 아닌가”란 말이 나올 정도다. 몇몇 외국인 투수를 제외하면 확실한 에이스를 보유한 팀도, 철벽 마무리를 갖춘 팀도 흔치 않다. 한두 경기 ‘깜짝 호투’하는 투수만 근근히 나올 뿐. 연패를 끊을 에이스가 없기 때문에 3연전을 모두 패하거나 승리하는 스윕 시리즈가 이어진다. 현재 8개 구단 모두 3연패 또는 3연승을 5번 이상씩이나 기록했다. 김태균이 4할을 치고 이승엽이 펄펄 나는 데는 국내 프로야구의 얇은 투수층도 꽤 큰 몫을 하고 있다. 모 구단 스카우트는 “떨어지는 변화구를 제대로 던지는 투수가 거의 없다. 몸 쪽 공 제구를 마음대로 하는 투수도 드물다. 일본에서 뛰다 온 선수들에게는 편한 환경”이라고 말했다. 돌아온 해외파들의 맹활약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이유다.
제대로 된 포수가 없는 것도 투수들이 힘을 못 쓰는 큰 원인이다. 넥센, 한화, KIA엔 주전 포수의 개념이 희박하다. 올스타 투표에서 서군 포수 부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넥센 허도환의 타율은 1할대다. 게다가 투표가 막 시작된 뒤엔 2군으로 내려갔다. 그 자리는 신인 지재옥과 지난해 2차 드래프트에 나왔지만 지명받지 못했던 최경철이 메우고 있다. 이런 환경이라면, ‘포스트 박경완’은 기대하기 어렵다. 강민호나 양의지는 박경완보다는 이만수 쪽에 가까워 보인다.
리그 전체적인 수비력 역시 하락세다. 실책 숫자는 예년과 큰 차이가 없지만, 경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클러치 에러’나 집중력 부족으로 인한 어이없는 실책이 늘어났다. 실책보다 좀 더 적극적인 의미의 수비 지표인 수비효율(DER) 수치는 지난해보다 크게 떨어졌다. DER은 수비수들이 인플레이 타구를 얼마나 아웃으로 잡아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6월 13일까지 DER 수치를 보면 SK는 .704로 작년 .719보다 1푼 5리가 떨어졌고, KIA는 작년 .691에서 올해는 .670으로 2푼 이상 하락했다. LG 역시 작년엔 .694, 올해는 .674다. 예전 같으면 1군에서 뛰지 못할 수준의 선수들이 여러 사정으로 1군 라인업에 포함된 결과다. 여름이면 수비수들이 지치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수치는 계속 떨어질 것이다. 그렇다고 화끈한 공격야구가 펼쳐지고 있다 말하기도 어렵다. 2000년대 전후처럼 홈런이 많지도 않고, 2000년대 중후반처럼 ‘발야구’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점수는 많이 나는데 특색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프로야구가 지금 같은 인기를 얻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었다. 김경문 감독과 젊은 선수들이 합작한 대표팀의 야구는 스피드와 힘이 넘쳤고, 색깔도 명료했다. 금메달도 땄다. 야구를 모르는 사람까지 빠져들게 할 만큼 매력적이었다. 때마침 SK와 두산의 경쟁이 펼쳐지고 류현진, 윤석민 등 젊은 스타들도 등장했다. TV에선 매일 열리는 모든 경기를 중계하기 시작했다. 언론에서는 한국 야구의 수준을 메이저리그나 일본 야구와 동등하게 비교했다. 타자들의 커트 능력, 선구안, 수비력, 주루 플레이 등은 한국이 미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주장이 공감을 얻게 했다. 당시엔 어느 정도 맞는 얘기였다. 문제는 그때가 바로 한국 야구가 ‘피크’에 도달한 시기였다는 점이다. 2009년 WBC를 마지막으로 한국 야구의 경기력은 서서히 하향 곡선을 그렸다. 올해는 남아 있던 거품이 급속도로 가라앉고 있다.
김성근 감독과 SK가 독주하는 동안 야구계 일각에선 “꼭 저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비난과 “저렇게 해선 오래갈 수 없다”는 냉소가 뒤따랐다. 하지만 지옥훈련과 상대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김성근의 방식이 성공을 거두고, 다른 팀들도 이 방식을 따르면서 프로야구의 경기력이 향상된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김성근 감독 경질 후 김성근과는 다른 방식을 추구하는 사령탑이 속속 등장했다. 훈련량은 줄이고, 자율을 표방하며, 선수에게 맡기는 지도자들이다. 어쩌면 한국 야구가 빈약한 인프라와 인적 자원으로 세계 수준의 경기력을 펼칠 수 있었던 건 김성근 방식이라 가능했던 게 아닐까? 어쩌면 한국 야구의 경쟁력은 혹독한 훈련과 벤치의 개입을 통해서만 지탱할 수 있을 정도로 기반이 취약한 게 아니었을까? 방식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한국 프로야구의 전성기는 김성근 방식이 리그 전체를 지배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한국 야구는 김성근 모델을 벗어나서도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낙관적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내년 초에는 제3회 WBC가 예정되어 있다. 과연 한국 야구는 ‘팬들이 알고 있던’ 수준의 경기력을 보일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후에도 프로야구가 지금과 같은 호황을 이어갈 수 있을까? 야구 전문가들이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찬스 뒤에 오는 것이 위기”라는 말을 따르자면, 지금 프로야구는 거대한 위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감독부터 배트걸까지 모두가 800만이란 숫자에 현혹되어 눈치 채지 못하고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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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배지헌(야구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