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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과 삶, 사람과 사랑에 관하여

2024.05.02전희란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과 삶과 사람과 사랑을 담은 책들이 내어주는 사유의 찰나.

글/ 박정훈(번역가, 작가)

여기 아주 간단한 등식이 있다. 삶+사랑=살다. 영어에도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식이 있다. life+love=live. 삶에 사랑을 더하면 산다는 뜻이 된다. 다르게 말해 삶에 사랑이 없으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동사 ‘살다’에 살을 입히면 사람이라는 구체 명사가 된다. 즉, 살다와 사람은 품사는 다르지만 뜻이 같은 하나의 낱말이다. 때문에 살다의 자리에 사람이 와도 의미상 아무런 걸림이 없다. 삶+사랑=사람. 사람은 사랑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존 레논이 노래한다.“Love is Wanting, Asking, Needing to be Loved.” 사랑하는 것은 곧 사랑받는 것이니 사람은 사랑받는 삶을 원하고, 요구하고, 갈구할 때 진정한 사람이 된다.

사랑은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살을 맞대고 사는 일에 다름 아니다. “Love is touch, touch is love.” 살과 살의 만남이라는 사랑의 실재에 온갖 긍정적인 혹은 그 반대되는 속성을 덧입혀서는 안 된다. 소망, 욕망, 원망, 희망, 절망에 함몰되어 어느 하나만 투영하는 것은 이상이나 관념이지 실재가 아니다. 살은 따뜻하고 부드럽다. 하지만 세월과 관계의 풍화가 살을 차갑고 거칠게 만들기도 한다. 살은 따스하고 촉촉한 남풍이 되어살을 보듬고 마음을 환히 열게도 하지만, 싸늘하고 메마른 북풍이 되어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엄히 여미게도 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기형도

사랑과 상처는 서로 멀리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하나 때로는 거울을 마주 보듯 가까워 상처가 사랑의 반영이 되기도 한다. 치유 역시 그러하다. 사랑은 때로 둘 모두를 비치기도 하고, 이따금씩 그 모두에게서 등을 돌리기도 한다. 사랑은 사람의 마음만큼이나 순일한 것으로 헤아릴 수 없는 모순의 그 무엇. 내 의지의 방향과는 아랑곳 없이 바람처럼 지나고 비처럼 내리는 것. 그러니 사랑을 붙잡으려 들지 말고 사랑에 나를 맡기는 수밖에, 들판의 꽃들이 그러하듯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사랑은 핏기 없이 파리한 한갓 관념이 아니라, 모니터를 끄면 네트워크 너머로 사라지는 허상 따위가 아니라 손 닿는 곳에 있는 살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나 또한 사랑은 내 살을 기쁘게 내주고 네 살을 기꺼이 즐기는 물리적인 교감이다. 이 교감은 사람 사이뿐만 아니라 다른 생명체, 심지어 사물과의 사이에서도 이루어진다. 사랑은 대상을 한정 짓지 않는다. 하여 내가 어루만지고 또한 나를 어루만지는 대상은, 맞닿음의 과정을 거치면서 더 이상 상대이기를 그치고 서서히 내 몸 깊숙이 들어와 나의 절대가 되기에 이른다.

만년필의 노쇠와 함께 내 몸의 노쇠 현상이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했다. 글만 쓰려면 허리가 비비 꼬이게 아프고, 늑간이 뜨끔뜨끔 쑤시면서 누울 자리만 보이고, 글쓰기가 죽기보다도 싫어지는 것이었다.
<나의 만년필>, 박완서

패스트 패션, 유튜브 먹방, 아파트 재개발 현상에서 드러나듯 우리는 의식주를 삶의 동반자로서 존중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맹종하듯 섬긴다. 집착하지만 애착을 갖지 않는다. 의식주 사이의 성긴 틈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사물들에도 그러하다. 사물과 사람 사이, 검질긴 숙성의 시간을 두고 서로의 살을 나누는 속정 깊은 관계를, 그리고 그 관계의 수명이 다했을 때 저녁놀처럼 마음을 검붉게 물들이는 상실감을 우리는 잊고 산 지, 잃어버린 지 오래. 다른 사람과 생명과 사물들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가짐, 그 진중한 삶의 태도는 유물에 지나지 않는 걸까.

이해의 이理는 다스린다는 뜻이다. 해解는 헤친다는 뜻이다. 영어 단어Comprehend는 완전히 com 붙잡다 prehend는 뜻이다. 상대를 내 의지로 파악하려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적용되는 단어다. 롤랑 바르트는 이해를 “당신을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힘으로 정의하려” 드는 것이라 지적했다. 그러하니 이해는 사랑의 선결조건이 될 수 없다. 사랑하면 더 알고자 하지만, 더 많은 앎과 이해가 사랑의 깊이까지 더해주지는 않는다. 사랑은 전면적인 받아들임이다. 동시에 절대적인 내어 드림이다. 오체투지의 순례길. 이 길이 우릴 이끄는 곳은 알 수 없는 앎에 다다른, 부지不知가 아닌 무지無知의 경지다.

사랑하면 할수록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사랑의 행위를 통해 내가 체득하는 지혜는, 그 사람은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미지의 누군가를, 그리고 영원히 그렇게 남아 있을 누군가를열 광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나는 알 수 없는 것의 앎에 도달한다. 알 수 없는 대상 때문에 자신을 소모하고 동분서주하는 것은 순전히 종교적인 행위다. 수수께끼로 만든다는 것은 곧 그를 신으로 축성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나는그가 던지는 질문을 결코 풀어헤칠 수가 없다. 따라서 내게 남은 일이라곤 내무지를 진실로 바꾸는 일뿐이다.<사랑의 단상>, 롤랑 바르트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을 하기에 앞서 예수는 무릎 꿇고 허리 굽혀 제자들의 더러운 발을 손수 씻겨주었다. 그로 인해 서로 사랑하라는, 무심히 흘려 넘길 수도 있는 예사로운 말에 결코 심상치 않은 근엄함의 무게가 더해졌다. 사랑하기 힘든 것을, 사랑할 수 없는 이를 사랑하라는 깊은 뜻도 진하게 배어들었다. 이 낮은 언명이 오랜 세월을 거쳐 지금까지 그윽이 빛날 뿐만 아니라 따스함까지 전해주는 건 그 손의 온기가 아직 남아 우리의 발을 어루만지고있기 때문이리라.

빛과 그늘은 어디에나 있다. 세상 안에도 있고 자기의 삶 안에도 있다. 그늘보다는 빛을 사랑하고 밝은 곳을 찾아가는 것이 세상과 사람 사는 일의 당연한 순리다. 하지만 때로 세상의 그늘진 곳들을 눈여겨보는 일이 필요하다. 지금은 망각해버린 찬란한 세상에의 꿈을 거기에서 다시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병든 몸처럼 삶이 처한 그늘진 곳을 새삼 돌아보는 일도 중요하다. 다름 아닌 거기가 그동안 살아보지 못한 다른 삶이 날개를 푸덕이는 둥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낯선 기억들>, 김진영

철학자는 병마로 고통 받는 자신의 몸을 사랑했다. 그렇지 않고야 삶이 자신을 놓을 때까지 손에서 펜을, 사유의 끈을 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어둔 밤 창틀에 켜둔 작은 램프 같은 사랑의 언명: 그늘진 곳을 사랑하자. 이 나직한 빛은 한 사람의 병든 몸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세상 안으로, 저마다의 삶 안으로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왜일까, 빛이 아닌 그늘을 품어야 하는 건. 찬란함이란 찰나의 절정처럼 한순간 빛나고 덧없이 사라지지만 음예의 공간은 이 빛을 파수꾼처럼 머금고 간직해 아름다움을 온전히 되찾게 해주는 둥지이기 때문이다. 그늘을 품는건 그 둥지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이다. 밤새워 폭우 지나고 찾아온 빛들의 충만함. 이는 곧 사랑의 환희. 사랑의 환희는 성공과 행복을 약속하는 광휘로 충만한 환영의 세계와는 다르다.

Love is Real, Real is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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