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새 집 증후군

2016.06.28이충걸

새집으로 이사하고 여태까지 매일 가구를 재배치하면서 수족이 바쁘게 보냈다. 할 말을 잃은 사람들이 눈길을 주는 공간마다 < 아키텍처럴 다이 제스트 >의 스프레드 컷으로 보이길 획책하면서 양쪽 벽이 책으로 덮인 복도와, 클로델 슈레더의 ‘Boy’가 걸린 서재와, 공원으로 향한 발코니 사이에서 교활한 파티를 열었다. 집만큼 새 출발하기 좋은 구실이 없으니 일생의 번뇌에 시달리는 것보다 그 안에서 빈둥거리는 게 속은 편했다. 그런데 집은 나의 심장. 그 박동은 다른 영역에서도 힘차게 뛰어야 할 텐데 틈만 나면 욕실 등을 바꿀까, 골몰하는 건 뭘까. 욕실은 위험 부담이 적은 장소니까 그 정도야 봐줄 만 하다 쳐도 그 무시무시한 계단 공사를 다시 할 거라고 눈에 핏발 세우는 건 문제는 문제다. 타일을 붙이는 동안, 삶의 너무 큰 부분이 떨어져 나갈 테니까.

울긋불긋 꽃대궐이건 잠시 들렀다 가는 휴게소건, 집은 뭔가 의기소침할 때 나에 대해 말해준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는지 거울보다 똑똑히 나를 비춘다. 소파에 걸친 담요는 내가 관계에 집착하는지, 직장 스트레스는 어느 정도인지 냉큼 일러준다. 탁자에 똑바로 놓인 메모지는 삶을 잘 접고 분류하는 성격을 드러내지만 계획이 틀어지면 정신 못차린다는 것도 암시한다. 일상의 세세한 영역을 너무 제어하려다 폭삭 망할 거라고. 폭풍우 속 부두처럼 삐꺽거리는 의자에 집착하는 덴 뭔가 다른 요소가 작용할 것이다. 미완성의 방은 여전히 학생이고 싶다는 무의식적 소망을 투영한다. 어른이 되길 회피하면서 불건강한 선회 경로에 묶인 거라고. 아무튼 집에 있는 하나하나가 일일이 나를 고자질한다면 물건이 아예 없어야만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불안을 느끼면 수동적으로 변한다. 그 수동성은 도저히 상쇄 할 수 없어서 내 마음을 다 아는 집 물건들이 가자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내가 페인트 떨어진 마루에 느끼는 바고, 마루가 나를 비난하며 “빨리 지워, 새끼야!” 무섭게 윽박지른다고 상상하는 이유다.

지금 당장은 집에 아무것도 더할 수 없다. 단순하게, 물건을 둘 공간이 없다. 청소도구함처럼 좁은 집은 아니지만, 라이프스타일 선택 조항으로 소유의 결핍을 차려입는다. 이 금욕주의엔 어쩜 종교적인 요소, 부족함에 대한 보상의 요소가 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예배당에 안 간다면, 회개하지 않는다면, 미래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면, 자제라는 기쁨을 주는 규율을 놓칠 거라고. 그래서 종교적인 절제 대신 금욕을 소매하려는 걸까.

울지 않고는 내가 애착을 가진 것들 이야기를 할 수 없다. 보이는 건 온통 실패의 풍경. 옛날 책꽂이에서 탈출한 책은 잭의 콩나무처럼 천장을 뚫고, 그 많은 티셔츠는 옷장 바닥에 개털로 만든 공처럼 뭉쳐 있다.

< 샘터 >와 < 뿌리깊은 나무 >를 대학 때부터 가지고 있으면서 한 번도 들춰 본 적 없다는 게 희미하게 역겹다. 신지 않는 신발(나 다족류인가 봐), 아예 고사枯死한 향수(이젠 방향제로도 못 쓴다), 갑자기 필요할지 몰라서 산 일회용 밴드(인생은 나중에야 그 어딘가로 도달하는 여행이지), 6개월 안에 호텔을 지을 것도 아니면서 산 다량의 침구(삶은 지금이 아니라 호텔 부지를 사는 훗날 새로 시작되는 것이고 말고!), 금속의 아름다움에 홀려서 산 프라이팬(달걀 프라이 말고 뭘 만들어봤나?), 변강쇠를 닮은 양초 (그 긴 세월 살아도 정전 한 번 안 되더라), 날짜 지난 쿠폰(안 지났다 해도 쓰는 방법을 모른다), 정지한 지 오래인 예금 통장(어차피 저금할 돈도 없다), 첫 번째 책을 썼다는 이유로 안 버린 대만제 10인치 PC(다음 책은 평창 올림픽 때나 쓰려나…). 언젠가 정리할 거라고 입술을 깨물지만 그 한 시간을 내지 못했다. 팔이 네 개인 인도 브라흐마 신도 이걸 따로 치워줄 팔을 빌려줄 것 같지 않다. 대체 왜? 오래된 물건들이 주는 유대감이 그렇게 사무쳐서? 아이들의 담요처럼 처음 맞는 상황이 주는 불안을 방어해 줄 거라서? 집을 반창고 박물관으로 만들려고? 물건을 못 버리며 만사 미적대는 사람들은 관계 재고 조사를 해봐야 한다. 퇴색한 우정이나 망가진 로맨스처럼 진작 폐기해야 했으나 선반에 올려두는 게 손쉽단 이유로 간댕간댕 유지하는 관계들을. 한편, 세상은 안 읽을 책을 꽂을, 안 사도 그만인 책장을 만드는 회사 같아서, 죽을 때까지 사들여야 한다. 그것이야 말로 당신과 나의 원죄. 결국 안경을 어디 두었는지 아침마다 방구석을 헤집는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안경을 찾는 시스템을 갖고 태어났을 것이다. 아세테이트 냄새를 맡는 재능을.

주방 서랍에서 사과 씨를 쏙 도려내는 도구를 보니 사과 하나 깎아본 적이 없단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 사과잼을 만들진 모르지만 설탕은 싫다. 책상 밑을 치우다 다이얼 전화기를 발견하고 나니 이건 정리가 아니라 고고학이었다. 마침내 동네 개가 씹어버린 내 구두 뒤축이 기적적으로 다시 생겨나지 않으리란 걸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대용량 쓰레기 봉지에 싹 다 버리기로 했다. 섬세한 민감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하얗고, 멸균돼 있고, 벽에 아무것도 없는 데 말고 어디가 안전한 공간이란 말이야? 그래도 고해 신부의 자세는 불편해. 심미적이고 영양이 풍부한 순수와 높고 경건한 깨끗함으론 모든 얼룩은 반드시 지워야 하지만, 내 영혼이 얼마나 맑은 지는 나도 관심 없는걸. 나는 원하는 만큼 부패하고, 자기중심적이고, 위선적일 수 있어. 나의 외적 이미지가 깨끗한 것보다 더 깨끗하다면. 집 전체를 소독하듯 박박 문지르는 이의 피부가 얼마나 빛날진 몰라도, 그 순수는 피부 두께만큼이다. 먼지 덩어리를 쫓아다녀 봤자 함부로 사는 사람들의 풍부한 특징, 활기가 없다고. 그러니 집에는 몇 년간 내가 품어야 할 특정한 분량의 어린아이용 잡동사니가 있어야 해. 정리는 하나의 감정. 진정 마음의 상태. 중요한 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정리의 수준일 뿐.

이젠 터틀넥에 묻은 얼룩을 신경 쓰지 않고 서랍장을 연다. 그 터틀넥을 버렸기 때문에.(내 옷장은 오래된 터틀넥이 죽으러 오는 곳이었다.) 더 이상 복도에서 소리 지르지 않는다. 발에 채이던 아톰 피겨를 딴 데 치웠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다 말고 돌아와 5분 만에 안경을 찾고 나니 안경 찾기 대가인 친구들이 조금 슬퍼 보인다. 다른 일자릴 찾아야 해서. 하지만 이렇게 뭔가를 찾는 데 시간을 덜 쓰다 보면 잃어버린 나를 찾고 더 많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되도록 결정을 적게 내리도록 인생을 정리한 뒤엔 내가 만든 격언을 읊조려야지. 나는 거부한다! 하지만 아직 그림을 다 걸지 않았고, 우체통은 설치되지도 않았다.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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