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무술인 아니면 모범생, 할리우드의 동양인 캐릭터

2017.04.19GQ

무시할 수 없는 중국 시장과 다양성에 대한 화두 때문에 할리우드 영화 속 동양인 캐릭터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같이 무술을 잘하거나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라는 사실이다.

흑인 히어로를 앞세운 <블랙 팬서>, 여성판 <오션스 일레븐>인 <오션스 에이트>가 한창 제작 중인 할리우드에서 ‘다양성’은 주요 화두 중 하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대표로 한 여러 할리우드 영화가 여성과 흑인, 동양인을 이야기의 중심으로 끌어안고 있다. 하지만 이들을 묘사하는 문법은 여전히 ‘백인 중심주의적 시선’ 아래 있고, 몇 개의 전형에 갇혀 있다는 비판도 많다. 흑인 캐릭터는 주먹을 앞세우는 덩치뿐이고, 동양계는 연약하거나 그게 아니면 한결같이 무예에 특출난 것으로 그려진다는 소리다. 혹은 똑똑하기만 하거나. 명석한 두뇌와 빠른 상황 판단력을 겸비한 엔터프라이즈호의 일등 항해사 ‘술루’(존 조)가 동양인 캐릭터의 진화를 보여주긴 했지만, 현실은 대부분 이렇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 치루트 임웨 1970년대 이소룡의 ‘발차기’가 할리우드를 놀래킨 이후 동양인과 무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됐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맨손으로든 단검으로든, 혹은 장검으로든 맞붙을 준비가 된 이들을 당해낼 자란 세상 어디에도 없어 보인다.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의 ‘치루트’(견자단) 역시 무술로 단련된 자다. 물론 여느 무술 고수 부럽지 않은 ‘영적 능력’도 지녔다. 맹인인데도 유일하게 ‘포스’를 보는 존재인 치루트는 마술사의 주문처럼, 혹은 염불처럼 “나는 포스와, 포스는 나와 함께한다 (I am one with the force. And the force is with me.)” 는 말을 외우고 다닌다. 그게 어느 정도냐면, 치루트가 내뱉는 대사의 8할이 저 한마디다. 실제 포스를 보는 것인지, 자기암시 중인 건지 헷갈릴 정도. 할리우드 제작자들은, 동양인은 무예와 염력 정도는 간단히 DNA에 새기고 태어난다고 믿는 것 같다.

 

<수어사이드 스쿼드>, 카타나 중국에 이소룡의 발차기가 있다면 일본엔 검과 검술이 있음을 <킬빌>이 일찍부터 설파한 바 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카타나’(카렌 후쿠하라)는 이름 자체가 ‘일본도’를 뜻하는데, 그 때문인지 신분증이라도 되는 듯 긴 칼을 항상 옆에 차고 다닌다. 시대극도 아니건만 카타나는 더 이상 아무도 하지 않는 ‘장검 승부’를 신주쿠 뒷골목에서 벌이는 존재다. 물론 일장기가 또렷이 새겨진, ‘각시탈’ 같은 걸 이 시대에도 쓰고 다니는 여인이니 그녀에게 시대 감각을 논해 무엇하나 싶긴 하지만. 할리우드가 동양 캐릭터에 원하는 ‘무술 잘하는 영적 존재’의 아우라는 카타나에게도 드리워 있다. 그녀의 칼엔 죽은 남편과 자식의 혼이 담겨 있다. 원작 만화에선 ‘죽은 이의 영혼을 담은 검’으로 나오지만 영화로 옮겨오며 남편과 자식의 영혼만으로 압축됐다. 설마 일본 여성은 순종적이며 가정적이란 통념에 따른 결정은 아니었길 바란다.

 

<센스 8>, 중국, 일본 무술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한국 무도인이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센스 8>의 ‘선’(배두나)이다. 넷플릭스의 대표 오리지널 콘텐츠 중 하나인 <센스 8>은 미국과 아이슬란드, 독일 등지에 흩어져 있으나 텔레파시로 한 몸처럼 연결된 8명의 이야기를 그린다. 그중 한국인인 선이 불교를 뜻하는 ‘선(禪)’과 같은 이름인 건 의도인지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그녀 역시 오랜 수련을 거친 ‘내공 백단’의 무도인이다. 앞선 두 무도인과의 차별점이 있다면 한국인답게 태권도로 단련돼 있다는 정도? 7명의 ‘솔메이트’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달려가는 (실제론 텔레파시로 시공간을 건너지만) 선에겐 싸움꾼의 인증 마크와도 같은 ‘17대 1의 전설’ 따윈 가소롭다. 그나저나 다들 총으로 싸울 때 선은 언제까지 태권도 기술만을 뽐낼 것인가. 총기 소지가 힘든 나라에 살고 있다는 건 잘 알고 있긴 하지만.

 

<콩: 스컬 아일랜드>, 샌 린 동양 무예를 경이롭게 느끼는 것 못지않게 할리우드는 동양인의 지적인 면모를 높이 사왔다. 그리고 ‘동양인은 똑똑하다’는 할리우드의 믿음은 여성 과학자가 흔치않던 1973년이 배경인 영화에 아시안 여성 과학자를 등장시킬 만큼 확고하다. <콩: 스컬 아일랜드>의 ‘샌 린’(경첨)은 예일대 출신의 지질학자로 미지의 땅 해골섬 탐험에 동행한다. 그러나 이 여정에서 샌 린의 지적인 면모가 발휘되는 순간은 거의 없다. 특별한 면모를 보여주기엔 비중이 턱없이 적은 탓. 중국 박스오피스 규모가 매해 30% 이상 성장하고, 중국 거대 기업이 할리우드에 직간접적으로 투자하기 시작하면서 ‘할리우드의 중국 눈치 보기’가 일상이 됐다. 미국 우주인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를 화성에서 구출하는 데 중국정부가 발 벗고 나서고(<마션>), 에단 헌트(톰 크루즈)가 추격전을 벌이는 극장에서 마침 오페라 <투란도트>가 상연 중(<미션 임파서블: 로그네이션>)인 덴 다 이유가 있다는 말씀. 샌 린 역시 ‘중국 자본’으로 탄생한 캐릭터란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루머의 루머의 루머>, 코트니 크림슨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루머의 루머의 루머> 속 ‘코트니’(미셸 셀린 앙)는 학교 일에 앞장서고 매사 솔선수범하는 학생회 대표의 표본이다. 여기서 꺼림칙한 건 코트니가 동양계라는 것,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는 사실이다. ‘아시아계 고등학생 학생 간부는 스펙 쌓는 데 혈안이 된 이들이다.’ 코트니 역시 이 공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게다가 그녀의 예의 바른 패션 센스는 또 어떤가. 고등학생인데 블라우스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그 위에 캐릭터 패턴 카디건을 걸쳐 단정함을 뽐낸다. 심지어 진주 머리띠까지 하고 있다. 패션 센스가 좋은 게이 커플을 부모로 둔 걸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든 취향이지만, ‘동양계는 보수적’이란 이미지를 전하는 게 목적이라면 성공했다. 하지만 드라마 밖의 배우 미셸 셀린 앙은 인종차별에 반대한다. 대만계인 그녀는 최근 스칼렛 요한슨, 맷 데이먼, 틸다 스윈튼 등의 이름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는데, 동양계 배역에 백인을 캐스팅하는 할리우드의 오랜 관행인 ‘화이트워싱’을 비난하는 퍼포먼스였다.

    에디터
    글 / 박아녜스(월간 '한국영화' 책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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