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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섹스 신 10

2017.08.04정우영

당신이 아직까지 기억하는 영화 속 섹스 신은 뭔가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이누도 잇신 따뜻한 빛으로 가득 찬 방에서 조제는 이부자리를 깔고 스스로 옷을 벗었다. 남자 앞에서 처음으로 옷을 벗은 것일 텐데 가슴을 다 드러내고 초연하게 츠네오를 쳐다봤다.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츠네오는 “눈물이 날 것 같다”고 했다. 섹스를 하면서 조제가 “무슨 말이라도 해봐, 무섭잖아”라고 하니 츠네오는 “미안, 그럴 여유 없어”라며 조제의 손에 깍지를 꼈다. 츠네오는 굉장히 평범한 남자구나, 다시 한 번 느꼈던 대사다. 평범한 남자와 다리가 불구인 여자의 섹스를 미화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으면서 이렇듯 따뜻하게 그릴 수 있구나.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방을 가득 채운 노란 햇빛이 이누도 잇신의 마음 같아 좋았다. 김현아(데시엠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불한당> 변성현 가장 최근 영화로는 <불한당>. 영화 내내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지만 너무나 절절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한재호(설경구)와 조현수(임시완)의 멜로드라마로서…. 마약 밀매 조직에 위장잠입한 경찰 조현수를 의심하는 조직의 2인자 한재호가 단둘이 타고 가던 엘리베이터를 세우고 조현수의 몸을 수색하기 위해 더듬는 장면이 두 사람의 ‘스킨십’에 가장 가까운 장면이다. 아주 짧은 장면인데 그 순간 두 배우의 호흡이라든가 표정이 거의 섹스 신을 연상케 할 정도로 뜨겁게 스쳐간다. 김용언(<미스테리아> 편집장)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김기영 동굴에서 발견한 뼛조각을 이어 붙이자 2천 년 전의 여인이 환생해 삶의 의지를 잃은 주인공의 생간을 노리다가 사랑에 빠져 섹스를 벌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괴상한데 섹스하는 두 사람 옆에서 뻥튀기 기계가 뻥뻥 뻥튀기를 토한다. 대를 잇기 위해 시체와 섹스를 벌이는 <이어도>의 충격도 잊을 수 없지만, 만화 같이 터무니없는 상황을 척척 만들어내는 감독의 ‘의지’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기영(한스미디어 편집자)

<폭력의 역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킬러의 과거를 숨기고 모범시민으로 살던 톰(비고 모텐슨). 과거의 원수가 나타나면서 그도, 그의 가정도 파괴된다. 금슬 좋았던 아내(마리아 벨로)는 그런 남편이 남보다 더 낯설고 둘은 반목한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에서 서로 주먹질을 하다 서서히 (아내가 주도하는) 격한 섹스로 이어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날 것 같은 그 섹스는 처절한 듯 야하다. 아내에겐 ‘남 같아진 네가 못 견디겠으니 기어이 살을 섞어야겠다’는 선언이고, 남편에겐 피비린내 나는 과거와 착실히 써왔던 모범 시민 마스크 사이의 몸부림처럼 보여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좋았던 시절, 애들을 피해 모텔을 찾은 이 부부의 섹스가 안 그래도 굉장히 동물적이었다. 여고생 코스프레를 하고 침실에 등장한 아내를 본 남편은 모범 시민의 마스크를 벗고 난폭한 육식동물처럼 아내를 포식한다. 육욕과 폭력을 이렇게 야하면서 살벌하게 버무린 다른 영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최세희(번역가)

<가장 따뜻한 색, 블루> 압델라티프 케시시 아델과 엠마의 첫 섹스 신. 강렬할 뿐만 아니라 길고도 길다. 얼마나 더 보여주는 건가 싶다가, 얼마나 사랑하면 저렇게 섹스를 나눌까 생각한다. 아델과 엠마의 사랑이 영화를 보는 사람에게 스크린을 뚫고 전해진다. 프랑스 칸 영화제 첫 상영 현장에 있었는데 한 프랑스 남자 관객이 뭐라고 하는 걸 기억해뒀다가 나중에 물어보니 “그만해 이제” 였다고. 하지만 섹스 신이 끝날 무렵엔 모두 휘파람과 박수로 환호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신. 박혜진(아트나인 팀장)

<남과 여> 이윤기 처음 만난 두 주인공이 정서 장애를 가진 각자의 자녀를 보러 가는 길. 폭설에 갇혀 있다 잠시 눈 덮인 숲을 산책하던 중 오두막 같은 사우나를 발견하고 추위를 녹인다. 거기에서 맥락 없이 끌어안는 신이 가끔 떠오른다. 조용하다가 숨소리로 시끄러운 것, 춥다가 너무 더워지는 것, 그러고 다시 추워지는 것. 그런 것들이 만들어내는 선명함 때문일 것이다. 아주 가끔, 둘만의 얘깃거리도 이렇다 할 긴장도 없으면서 나란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신경 쓰이는 이성을 발견할 때면 나는 이상하게도 되게 더운 나라에서 더운 계절, 더운 곳에서 섹스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남과 여>를 본 이후엔 핀란드 사우나로 배경을 바꿨다. 핀란드엔 사우나 안에서 버릇없는 행동을 하면 작은 요정이 화를 낸다는 전설이 있다던데. 이선주(북 디자이너, 모임별 베이시스트)

<감각의 제국> 오시마 나기사 사다가 키치 위에 올라앉아 악기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는 섹스 장면. 둘이서 쾌락을 잘게 찢어 촘촘히 나눠 갖는 것처럼 보여 이상하게 좋다. 핑계와 구실이란 얼마나 달콤한가. 왜 늘 안 되는 건 더 좋을까. 사다의 절제된 음성과 더는 노래를 못 부르겠다며 애원하는 말투와 목소리까지 전부 아낀다. 이승연(사진가)

<붉은 다리 아래 따뜻한 물> 이마무라 쇼헤이 이 영화는 한 장면이 아닌 영화 전체가 섹스다. 강과 바다, 여자의 몸에 차오르는 물을 모티브로, 섹스라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본능적 삶의 즐거움과 환희를 이야기하는 동화다. 몸이 달아오르고 물이 차오르면 거울의 반짝임을 신호 삼아 서로를 애타게 찾고 부르면서 달려가는 두 주인공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부둣가 삼바리돌 틈새에서 이루어지는 섹스다. 카메라는 삼바리돌 무더기 너머 바다를 비추고 관객에게는 환희에 찬 신음 소리만 들린다. 절정에 다다른 순간 돌 무더기 사이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폭발하면서 무지개가 드리워지는 장면을 기억한다. 이병재(공간 신도시 대표)

데비 다이아몬드 주연작, < Daughter of Darkness > 해리 퀴멜, <크래쉬>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첫 번째는 데비 다이아몬드라는, 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활동 중인 포르노 배우의 80년대 초반 작품. 상대 배우가 알렉스 샌더스였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그녀의 출연작이 7백 편이 넘다 보니 어떤 작품이었는지 도대체 못 찾겠다. 80년대 초라면 곤조물(곤조 저널리즘에서 온, 배우의 시각으로 촬영한 포르노물을 일컫는 말)이 유행하기 직전인데, 섹스 행위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그래서 엄청 열심히 즐기고 있다는 게 분명히 보였다. ‘피지컬’ 섹스 신에서 그만한 배우와 영화가 없었다. 원초적 감각의 섹스는 이런 것이라는 느낌? 두 번째는 71년에 나온 뱀파이어 영화 < Daughter of Darkness >. 그중에서도 델핀 쉐리그가 자신의 성을 찾은 신혼부부를 유혹하는 모든 장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섹시한 뱀파이어 영화로 꼽는 작품인데, 처음 봤을 때 성적으로 엄청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지금 다시 보니 상당히 격조 있는 성애영화기도 하다. 세 번째는 <크래시>에서 데보라 카라 웅거와 엘리어스 코티즈가 벌이는 세차장 섹스 신. 첫 번째와 두 번째로 꼽은 작품을 절충한 것 같달까. 실제와 상상의 조합으로 만든 다른 차원의 섹스 신이랄까. 이봉수(비트볼레코드 대표)

<맨헌터> 마이클 만 섹스 신 연출을 못하는 감독의 영화에 나오는 극 중 인물들은 얼마나 곤란할까. 마이클 만의 <맨헌터>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과한 감정 이입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도저히 감정 이입을 할 수 없는 수준의 섹스 신이라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맨헌터>는 섹스신이 중요한 영화도 아니고 섹스 신이라고 할 만한 장면도 두어 번이다. 보통 <양들의 침묵>보다 먼저 한니발 렉터를 다룬 영화로 회자된다. 하지만 섹스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남이 만든 섹스 신을 참고해 만들어도 그보다 몇 배는 잘 만들 것 같은 수준이라 몇십 초 안 되는 섹스 신이 실제보다 훨씬 길게 느껴졌다. 혼자 보는데도 얼굴이 빨개졌고 이후 장면들은 보는 둥 마는 둥 했다. 이후 마이클 만 영화를 볼 때마다 새로운 종류의 서스펜스가 생겼다. ‘또 섹스 신이 나오면 어쩌지.’ 다행히 <히트>, <인사이더>, <콜래트럴> 모두 섹스 신이 없었다. 좋았다. 그러다 <마이애미 바이스>에는 마치 <맨헌터> 20주년 기념처럼 섹스 신이 나온다. 얼른 끝나길 바랄 정도로 못 찍은 건 매한가지지만 <맨헌터>만큼은 아니었다. 다행이긴 한데 역시 그런 생각을 하느라 영화에 집중하지 못했다. 마이클 만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런 점에서 나는 누군가에게 마이클 만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조심스럽다. 섹스 신을 못 찍는 감독을 좋아하는 건…, 이상하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라서. 이면수(대학원생)

    에디터
    정우영
    일러스트레이터
    KIMIAND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