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려원은 기다릴 게 있다. 그는 희망을 믿는다.
촬영을 편안하게 즐기면서 하네요. 하고 싶은 걸 해서 그래요. 요즘 화보 촬영은 브랜드 협찬을 받을 때가 많은데, 그러면 마음대로 할 수 없잖아요. 오늘은 정말 자유롭게 했네요. 제 옷도 입고, 거꾸로 입기도 하고.
원래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해요? 예전엔 일이라고 생각해서 좋아하지 않았는데, 친구들과 놀 때 서로 찍어주면서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어떤 친구들이랑요? 오늘 사진 찍은 정재환 사진가, 허남훈 뮤직비디오 감독, 김모아 작가, 소이, 손담비, 한예슬, 임수미 작가…. 보통은 20대 때 많은 사람과 친하다가 30대에 가지치기를 하는데, 저는 30대에 친구를 많이 만났어요. 이 친구들은 ‘노맨’이에요. 제 일은 주위에 ‘예스맨’들이 많기 쉬운 직업인데, “그건 아니었어”, “너무 욕심낸 것 같아”, “언니 답지 않았어”라면서 맞춰주지 않고 제대로 봐줘서 좋죠.
30대 때 새 친구를 사귀는 게 쉽지 않은 일이잖아요. ‘뉴페이스’에게 호기심이 많나요? 물론 ‘not everyone’. 저 친구는 나랑 비슷할 것 같다, 싶은 사람들이 있어요. 그러면 아니나 다를까 비슷해요. “이런 전시가 있대” 하면서 우르르 다녀요. 맛과 멋과 향을 아는 친구들이라 공유할 게 많아요.
‘드리머스’라는 예술가 그룹으로 프로젝트 활동을 하죠? <디스커버리>에 제안서를 내서 지원 받고 파리로 영화를 찾아가기도 했어요. <미드나잇 인 파리>와 <비포 선셋> 속 장소를 찾아가서 누구는 사진을 찍고, 누구는 글을 쓰고, 누구는 영상을 찍었죠. 보실래요? 저희끼리 보려고 찍은 거예요.
드리머스의 가장 최근 활동은 무엇인가요? 어제 다 같이 모여서 <고등래퍼>를 봤네요. 하하. 요즘 애들 생각을 알 수 있거든요. 저는 EBS 교육방송 보듯이 그걸 봐요. 새로운 세대에 희망이 있구나, 하면서요.
새로운 꿍꿍이는 없나요? 아직요. 드라마 끝나면 뭔가 또 꿍꿍이가 생기겠죠? “야, 어딜 가야겠는데” 하면서. <GQ>와 같이해볼까요?
열려 있어요. 진짜요? 저희 사진부터 영상까지 찍고 편집하고 알아서 다 할 수 있어요. 하하.
드리머스에서 정려원의 역할은 뭔가요? 시안 찾기. 저, 레퍼런스의 신이에요. 인스타그램, 구글, 핀터레스트, 이베이를 뒤져서 사진과 영상들을 계속 전달하죠. 일러스트, 문장도 수집해요. 카테고리 폴더가 1백 개가 넘어요. 제 핀터레스트 계정 보실래요? dress, s/s, f/w, hair, flower, house, 캣타워 카테고리도 있어요. 요즘 관심사는 인테리어인데 여기서도 섹션을 나눴어요. bathroom, floor, living room, kitchen, basement…. 각종 디자인의 거울들도 스크랩해놨어요.
이렇게 수집한 시안들은 어떻게 활용해요? 담비가 타투할 때 도안을 안 찾아보고 온 거예요. 당연하다는 듯 “언니가 찾아줄 거잖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하고 싶었던 타투 시안을 줬죠. 담비 생일엔 80년대 스타일 시안을 돌리고, 머리에 ‘구르프’ 말고 화장도 진하게 하고 와서 놀았어요.
아카이브에서 제일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진가는 누구예요? 마크 보스윅이요. 빛을 잘 쓰는 사진가예요. 보고 있으면 평화로워져요.
화가는 사이 톰블리 좋아하죠? 색을 쓰는 게 초기의 사이 톰블리와 비슷한 느낌이기도 하고요. 그런 따뜻하고 온화해지는 느낌이 너무 좋아요. 색을 아시는 분 같아요. 그쵸?
온화한 색과 빛을 왜 좋아해요? 예전엔 어두운 게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여러 일을 겪어보니 가장 아름다운 건 밝은데 깊은 거더라고요. 밝고 얕거나 어둡고 깊은 건 많은데 밝되 깊은 건 드물어요. 양면을 다 아는 거. 저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좋아요.
밝은데 깊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살면서 위기를 겪을 때, 그 힘듦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지를 보면 보여요. 진짜 밝은 앤지, 어두운 앤지, 얕은 앤지, 깊은 앤지. 좋은 일이 있을 땐 잘 몰라요. 그런데 어려움이 있을 때 이겨내는 걸 보면 그 사람의 캐릭터가 나오죠.
‘마음밭이 깨끗한 남자’가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런 사람인가요? 맞아요. 이를테면 누가 나에게 실수를 했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해서라도 복수하는 사람은 날 위해 싸워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적이 되면 정말 불편한 사람이 되죠. 그런데 그걸 덮어줄 수 있는 성정의 사람은 마음의 밭이 깨끗하다고 생각해요.
선하고 밝은 것들, 낙관적인 태도를 사랑하네요.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이면 미세 먼지 낀 흐린 세상에 사는 것 같을 거예요.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어’, ‘기다릴 게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요.
지금 정려원에게 기다릴 게 있다면 어떤 건가요? 제가 어릴 때 괜히 호주를 갔던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영어를 써먹을 수 있는 일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미국 드라마 오디션을 많이 보는데 계속 떨어지거든요. 본 오디션들은 다 피드백을 받아서 소식을 기다리는 건 없지만, 앞으로 기다리게 되는 오디션은 많겠죠. ‘난 아직 기다릴 게 남았구나’라고 생각하는 게 힘이 돼요.
하고 싶은 게 할리우드에서 전형적으로 그려지는 타입의 동양인은 아닐 것 같은데요. 정답이에요. 인종의 틀에 박히지 않은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그래도 요즘엔 다양한 인종이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하는 시도도 있어요. 변화를 계속 보고 있죠.
직접 그림을 그리잖아요. 어떤 그림을 그려요? 좋아하는 그림과 그리는 그림은 달라요. 보여드릴까요? 이건 최근에 담비 생일 선물로 준 그림이에요. 담비를 위해서 기도문을 썼고, 페인팅을 겹겹이 올려서 2주간 그렸어요.
색이 예쁘네요. 이건 바스키아 같은 느낌도 들고요. 낙서 형식의 페인팅과 펜화를 좋아하거든요. 이 위에 글씨를 덧쓸 거예요.
그림을 그릴 땐 어디서 영감을 받나요? 작품을 하면서 많이 받아요. <메디컬 탑팀> 땐 참관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간의 장기들을 봤어요. 다 붉은 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피를 다 석션하면 깜짝 놀라요. 색 배치가 너무 아름답거든요. 잿빛, 개나리 노랑, 베이비 핑크. 저는 신을 믿는데, 신이 아름답게 우리를 만들었구나 싶었죠. 그 인상이 강렬해서 그 색들로 그림을 그렸어요. 살면서 접할 수 없는 많은 전문 분야를 연기로서 접할 수 있는 건 행운이에요.
검사로 나온 <마녀의 법정>에서는 어떤 영감을 받았어요? 그땐 예술적 영감이 아닌 사회적 영감이었어요. 마이듬을 맡으면서 젠더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죠. ‘내가 이게 보이는 거야, 아님 요즘이 그런 거야?’ 할 정도로 제 안의 관심과 사회의 관심이 일치한 때였던 것 같아요.
여성, 아동 성폭력 전담반 마이듬 검사의 시의적절한 대사가 떠오르네요. “법은 언제 심판을 내릴 것인가! 바로 지금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아요, 지금이에요. 바뀌어야 해요. 촬영 현장에서 남자들이 신인 여자 배우에게 짓궂은 농담을 할 때 불쾌한 적이 많았지만 너무 비일비재해서 “어, 지금 그거 성희롱이에요”라고 하면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될 때가 많았어요. 하지만 <마녀의 법정>을 찍으면서 내가 오버하는 게 아니란 걸 새삼 깨닫게 됐고, 내가 불편하다며 피한다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란 걸 알게 됐어요.
그 관심은 드라마에서 끝나지 않고, KBS 연기대상 때의 인상적인 수상 소감과 ‘미투’ 운동을 지지하는 ‘위드 미’ 홍보대사로 이어졌죠. 원래 전 겁이 많아서 직책 맡는 걸 싫어해요. 그런데 겁이 많은 제가 더 싫은 게 있단 걸 느낀 거예요. 부당하게 대우 받는 신인들 얘길 들어보면, 제겐 그러지 않는 감독도 전혀 다른 모습을 가졌다는 걸 알게 돼요. 나에게 그러지 않았다고 그런 일이 없다는 건 아니란 거죠. 그래서 상을 타고 싶었어요. 그 자리에 올라가서 이 문제에 대해 검사답게, 멋있게 말하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엄마 역의 이일화 선배님이랑 눈 딱 마주치니, 갑자기 목소리가 떨리더라고요.
요즘 체감되는 변화가 있나요? 이젠 드라마 대본 앞에 성희롱 예방 수칙이 실려 있어요! 어찌나 뿌듯하던지. 다들 경각심을 가지고 조심하는 분위기예요. 스태프끼리 서로 존칭하고, 상하 관계가 아닌 파트너로 대하려는 분위기도 점점 생기고 있는 것 같고요. 이런 일이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잖아요. 상하 관계에서의 약자가 겪는 일인데, 문제는 그게 여자일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거지만요.
그게 젠더 권력이라는 거죠. 그렇죠. 예전엔 “남자는 힘이지”, “남자는 블랙이지”란 말이 굉장히 편파적이란 것도 몰랐어요. 이젠 “남자는 핑크지”라고 농담해요. 이런 말도 성차별이 될까 봐 경계하지만요.
16년 차 배우지만 <마녀의 법정>에서처럼 원톱 주연을 맡은 건 처음이죠? 너무 기분 좋았죠. 항상 남자가 서사를 풀어나가는 데 있어 조력자였는데 그 롤이 바뀐 거잖아요. 다행인 건 같이 연기한 (윤)현민이 그런 이해가 깊은 친구였어요. 대본에 ‘낚아챈다’는 지문이 있었는데 남자가 여자한테 그러는 것도 폭력이라고 잡지 않고 막아서기만 했죠. 자기는 그런 역할을 해보고 싶었는데 맡아서 너무 신나고 행복했다고 하면서요. 운이 좋았어요.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히 이끌어나가는 건 어떤 경험이었나요? 처음엔 부담이 엄청났어요. “삼십 대 후반 여배우를 주연으로 쓰니까 곤조도 있고 힘들더라”는 소리 나올까 봐 악착같이 버텼죠. 옷도 빨리 갈아입고 현장에 제일 먼저 가서 앉아 있고. 그런데 마이듬에 푹 빠지면서 그런 것도 잊었어요. 가해자를 심문하는 신에선 악에 받쳐서 대본에도 없는 서류철을 쾅 내려치고 미친 듯 심문했죠. 배우가 “누나 저 진짜 가해자 아니에요”라고 할 정도로. 하하. 무거웠지만 충만하고 행복한 경험이었어요.
여자가 서사 전면에 나서는 작품이 이제 조금씩 많아지는 중인데, 여자들과 해보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미스티>의 김남주 선배님, <품위 있는 그녀>의 김희선, 김선아 언니 얼마나 멋있어요. 전 한예슬, 손담비, 공효진 언니랑 한국판 <섹스 앤 더 시티> 같은 거 찍어보고 싶어요. 골 때리는 캐스팅이죠? 웃길 것 같아. 다 쎄!
마이듬을 맡으면서 인간 정려원에게도 변화가 있었나요? 사실 제가 그렇게 대차지 못해요. 해야 하는 말은 항상 집에 가는 길에 생각나죠. 그런데 마이듬을 하고 나선 일단 제 목소리가 커졌대요. 몸도 많이 쓰고. 뭔가를 싫다고 말하는 것도 늘었죠.
하고 싶은 말을 못 할 땐 어떻게 해요? 좋아하는 건 티를 잘 내요. 사랑은 감추지 못하죠. 하지만 싫어하는 건 남이 상처받을까 봐 말을 잘 못 하는 거예요. 친구들은 총으로 그때그때 “기분 나빠” 하고 쏘는 스타일인데, 저는 쌓아두다가 바주카포 한 방에 쏘듯 빵! 터져요. 건강한 방법은 아녜요.
스스로에 대해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소심한 사람’이라고 평한 적이 있어요. 되게 웃기죠? 호기심이 정말 많은데, 겁이 조금 더 많아요. 브레이크가 1센티미터 더 긴 거죠. 가려다가도 흠칫 물러서는 거. 브레이크가 없었으면 여기 없었을걸요.
그럼 어디에 있었을까요? 암스테르담이요. 그림을 그리고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것 같아요. 엄청 게으르게 살면서 피폐해졌을 수도 있고.
1센티미터 적지만 호기심도 만만치 않게 많고요? 정말 많아요. 어쩜 그렇게 많은지. 영화만 봐도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해서 다 찾아봐요. “야 이런 일이 있었대”, “감독이 이런 거래” 등등.
자극을 잘 받아들이고, 감각을 열어놓고 있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어요. 이런 건 예술가로서 미덕인 동시에 꽤 지치는 일인데요. ‘아우 저런 건 안 보였으면 좋겠다, 안 들렸으면 좋겠다’ 하는 것들도 다 보이고 들리니까 피곤하지만, 그것도 결국 내가 연기를 하고 그림을 그릴 때 쓰게 될 재료들이에요. 양날의 검이죠.
잘 무뎌지지 않는 편인가요? 전 왜 이렇게 안 무뎌지는지 모르겠어요. 평생 말미잘이야. 옆에 뭐만 지나가면 깜짝 놀라고.
민달팽이, 쫄보라는 귀여운 별명이 있다면서요? 더듬이를 앞세워서 천천히 가고 있는데 뭐가 나타나면 화들짝. 집이 없어서 숨을 데도 없어요. 주변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다른 이의 마음도 잘 읽잖아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몰입을 잘해요. 상담하는 걸 좋아하죠. 가수 생활이 끝나고 배우를 시작하고 가수 친구, 후배들이 작업실에 찾아와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기도 했어요. 들어주면 마음이 풀렸나 봐요. 내가 이게 적성에 맞나보다 했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 화내고, 아프고. 어렸을 땐 상담가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어요.
배우들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에 더 익숙한 경우가 많은데 반대인 점이 흥미롭네요. 어느 새벽에 한 스크립터가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땅바닥에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이야기 나누고, “내가 나중에 너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역할을 맡을 때 네가 공감할 수 있는 연기를 할게”라고 했더니, 언니가 바닥에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바로 알아볼 거라고, 위로가 된다고 했죠. 남의 이야기를 듣는 건 나에게도 좋은 일이에요. 사례들이 쌓이면서 저도 많이 배워요.
중앙이 아닌 주변부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기울이는 편인가요? 전 어릴 때부터 항상 그랬어요. 스스로 메이저가 아닌 마이너라고 느끼거든요. 예전 소속사에선 <김씨 표류기>의 히키코모리 김씨 역할을 두고 싸웠어요. 광고도 안 들어올 거다, 취향이 왜 이렇게 마이너하냐 했는데, 전 그 역할을 제 영화 중 제일 좋아해요.
매 작품 스태프들에게 손편지를 쓰기로 유명하고요. 막내들한테도 애정이 많다면서요? 제일 많이 고생하는데 제일 적은 크레딧을 가져가는 친구들이잖아요. 생일 챙겨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려고 하고, 할 수 있는 한 잘해주려고 해요. 막내들이 풀이 죽지 않아야 일도 잘돼요.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은 윤리의 시작이기도 해요. 그렇죠? 전 사람의 마음이 궁금해서 심리학도 기웃거렸어요. 프로이트보다 아들러를 더 좋아해요.
인간 심리와 행동 발달엔 의지도 중요하다고 주장한 사람 말이죠? 아들러의 어떤 점이 마음을 끄나요? 프로이트는 모든 사람의 심리적인 상태는 영유아 때 결정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아들러는 목적론에 입각한 사람이에요. 어떻게 타고났든, 뭐가 없고 부족하고 어떤 나쁜 경험을 겪었든, 그걸 대물림할 수도 있지만 네가 생각을 바꿀 수도 있어. ‘원래 이래’라는 건 없어. 이런 걸 제시해준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우리에겐 희망이 있어’라고 생각하려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네요. 그렇죠. 타고난 게 전부면 삶이 얼마나 싫을 거야. 안 그래요? 물론 인종이나 출생연도처럼 타고나는 것도 있어요. 하지만 바꿀 수 있는 것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으면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고, 거대한 힘이 항상 나를 가리고 있을 것 같고, 얼마나 슬퍼요. 나는 싫어.
개인의 주체성을 믿는군요? 네. 주체적인 건 이기적인 게 아녜요.
심리 검사 MBTI에도 관심이 많죠? 스스로는 내향적, 직관적, 감정적, 인지적인 INFP라고 말하고요. 매니저 중에서도 일을 해결하는 방식을 보고 얜 이렇겠다, 쟤는 영락없이 ISTJ다, 하면 열에 일곱은 맞아요. 여행 갈 때는 목표지향형 J, 목표발견형 P와 함께 가면 편해요. J가 스케줄을 짜면, P가 그때그때 “오늘은 여기서 재미있는 파티가 열린다는데 여기 가자”고 하는 거죠. 저는 P지만 친구들이 다 P라 여행 가면 스케줄러 J가 되죠. 극중 캐릭터 분석할 때도 유용해요. 마이듬은 ISTJ죠.
사람들을 특징 지어 캐릭터화하는 건 늘 재미있어요. 정말요. 친구들과 “올해의 나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올해 나의 색깔은?” 이런 질문을 돌리는 것도 좋아하죠.
그 질문 그대로 “올해의 나”와 “올해의 색”은 뭐예요? 올해의 저는 아직이에요. 그건 연말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는 질문이거든요. 작년의 저는 ‘또라이’였어요. ‘또라이듬’이라고 누가 별명을 붙여주셨는데 그게 마음에 들었어요. 마이듬의 괴짜 같은 느낌이 좋았거든요. 색은 빨강이요. ‘페라리 레드’. 제가 제일 좋아하는 미친 빨강으로요!
관계를 중시하는데 연애할 땐 어때요? 누군가에게 목을 맬 때 어머니가 “사랑은 구걸이 아니다”라고 하셔서 많이 울었던 적이 있다고 말했어요. 그 사태 이후로 연애를 잘 못 해요. 그게 가시밭길이란 걸 알고 있고, 불나방처럼 제가 타서 죽을 거라는 걸 알았지만 뛰어든 연애가 있었죠. 태어나서 처음으로 일이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었어요. 그렇게 하얗게 불태우고 보니 하얀 재만 남은 거 있죠. 그 후론 연애에 올인하지 않아요. 일이 더 중요하죠.
지금은 어떤 연애를 추구하나요? 자기 일을 잘 하고 제 일도 존중하는 사람과 만나게 될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아프면 알아서 해결해요. “아프니까 빨리 와” 이런 거 너무 싫어요. 제가 아프다고 일 때려치고 온다? 엄청 깨요. “왜? 일이나 열심히 해”라고 해줄 거예요. 자기 일에 프로페셔널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도 책임감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상형이 ‘잃을 게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할까요? 잃을 게 없다는 건 책임질 게 없다는 뜻이잖아요. 저는 세상이 무서운 것을 아는 사람이 좋아요. 사실, 그런 사람에게 영감을 받을 수 없을 거란 건 알아요. 하지만 제겐 영감을 주는 친구들이 있는데 굳이 연인까지 그럴 필요는 없어요. 그런 사람이 제발 저를 설득해줬으면 좋겠네요.
동하는 상대가 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런 거죠. 그런 남자 찾기 쉽지 않아요.
임수미 작가와 출연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살아보니 어때>에서 여성이 관습적이지 않은 행동을 할 때 ‘상여자’라고 하는 게 인상적이었는데, 풍자의 의미죠? 그럼요.
얼마 전 첫 촬영 들어간 새 드라마 <기름진 멜로>는 요리 드라마인데, 요리는 잘하나요? 전혀요. 요리엔 관심도 없어요.
상여자네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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