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석은 어떻게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었나 | 지큐 코리아 (GQ Korea)

김윤석은 어떻게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었나

2019-04-24T15:59:54+09:00 |ENTERTAINMENT, movie|

김윤석이 연출한 <미성년>은 수작이다. 연기 잘하는 배우였던 김윤석은 어떻게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었을까.

배우 김윤석은 쉰하나에 ‘신인 감독’이 됐다. 놀랄 만한 일은 아니다. 극단 학전의 김민기 대표를 ‘사부’라 부르는 그는 희곡 집필과 연극 연출 경험을 갖고 있고, 영화 촬영현장에서는 감독과 연기뿐 아니라 연출에 대한 의견 역시 가감 없이 나누기로 유명하다. 그런 점에서 첫 영화 연출작이 한 소극장의 창작 연극에서 출발했다는 건 흥미롭다. <미성년>은 어딘가 낯선 곳에서 툭 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김윤석이 오래 몸담아 온 세상에서 자연스레 빚어진 세계다. 놀라운 건, 그곳에 ‘여자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1. 스스로 가장 한심한 역할을 자처했다
짓궂게도 평단과 관객은 배우가 연출한 영화를 종종 더 엄한 눈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김윤석은 <미성년>으로 이 독한 기준을 넘어섰다. 재밌는 건 <미성년>에 대한 이들의 후한 평가가 상당 부분 김윤석이 배우로서 그간 쌓아온 이미지를 허무는 데서 온다는 점이다. <미성년>은 대원(김윤석)과 미희(김소진)의 불륜 관계를 아는 각각의 딸, 주리(김혜준)와 윤아(박세진)가 옥신각신하면서 주리 엄마인 영주(염정아)가 불륜을 눈치채는 것으로 얘기가 시작된다. 언뜻 보면 흔한 소재, 낯익은 전개다. 하지만 이 익숙함을 부수는 건 김윤석 자신이다. 김윤석이 연기한 대원은 영화에서 부인과 딸에게 제대로 된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등장하는데, 이것이 대중에게 앞뒤 재지 않는 열혈 형사(<추격자> <암수살인>)나 물불 가리지 않는 조폭(<황해> <도둑들>), 혹은 존재 자체로 ‘절대 악’(<1987>)에 가까운 얼굴로 각인돼 있던 배우 김윤석의 이미지와 만나며 묘한 아이러니와 유머를 낳는다. <미성년>은 대원이 사건의 중심에 있을 뿐 실은 그를 둘러싼 네 여성의 불화와 화해가 핵심인 영화다. 긴 기간 한국영화 속 ‘거친 남성’을 대표해온 김윤석은 그간 한국영화가 외면한 여성의 목소리에 집중하기로 결심하고 영화에서 자신의 볼륨을 낮추는데, 이러한 의도적인 사라짐이 영화의 주제를 더욱 선명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2. 여성의 목소리를 열심히 들었다
그간 배우로 감독과 작품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나눠온 김윤석은 본인이 감독 자리에 서자 주변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특히 <미성년>이 여성 서사인 만큼 배우들과 원작 연극을 쓴 이보람 작가, 현장 편집기사와 편집감독 등 주위 여성 스태프에게 부지런히 의견을 구했다. 열일곱 소녀의 ‘입말’을 살리기 위해 김혜준과 박세진의 ‘지도’에 따라 대사를 바꿔 쓰기도 했다. 중년 남성인 김윤석이 여성의 목소리를 세밀하게 담아낼 수 있었던 비결이다. 물론 감독으로서의 김윤석의 최대 장점은 역시 연기와 맞닿아 있었다. 영주와 미희는 불륜 묘사에서 흔히 나오는 드잡이 하나 없이 말간 얼굴로 서로를 경계하는데,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염정아와 김소진이라 하더라도 이 속을 알 길 없는 캐릭터들을 끌어가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다. 염정아는 한 인터뷰에서 김윤석이 “표현하는 게 많지 않은 인물의 감정을 엿볼 수 있도록 디테일을 세세하게 전부 만들어줬다”고 했다. 또 연기 경험이 많지 않던 김혜준과 박세진은 김윤석과 한 달간의 ‘특훈’을 통해 안정적인 연기 호흡을 선보인다. 개성 넘치는 연기로 뚜렷한 인상을 남긴 조연 이정은, 김희원, 이희준, 염혜란 모두는 김윤석이 극단 시절부터 20여 년을 이어온 인연이기도 하다.

3. 배우 김윤석이기에 가능했다
감독 김윤석이 오랜 배우 생활로 얻은 자산은 또 있다. 연간 열 편 내외에만 투자하고, 특히 중·저예산영화는 좀처럼 라인업에 두지 않는 쇼박스는 김윤석과 함께하는 열한 번째 영화로 순제작비 20억 원대의 <미성년>을 택했다. 김윤석은 영화가 공개된 뒤, 후반작업을 원하는 만큼 충분히 한 것이 가장 만족스럽다고 했다. 사실 이는 여느 신인 감독에겐 쉽게 허락되지 않는 일이다. 그는 물론 70억 원 규모의 상업영화를 했다면 이런 자율권을 얻지 못했을 것이란 것도 자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김윤석은 영민한 감독이다. 자신의 장기가 “드라마와 캐릭터를 짜는” 데 있다는 걸 알고, 잘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찾아낼 줄 안다. 애초 예상보단 예산 규모가 커졌지만 그 이상의 욕심은 담지 않았기에 네 명의 여성 배우를 앞세워, 불륜과 여성 연대라는 낯선 이야기를, 본인이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조차도 모두에게 허락되는 일은 아니다. 현재의 한국 영화판에서 과연 어떤 신인 감독이 네 명의 여성 주연으로 이토록 호기롭고 매섭게, 그리고 자유롭게 첫 영화를 만들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미성년>은 또 한번 연기 관록과 영화계 내 인맥이 단단한 김윤석이 아니었다면 나오기 힘든 영화다. <미성년>의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건 열일곱 두 소녀다. 영화 속 대원은 두 소녀에게 ‘어른이 아닌 자’로 남지만, 스크린 밖 현실에선 영화계의 ‘어른’인 김윤석만이 소녀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 물론 이것이 감독 김윤석의 성취를 바래게 하는 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