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를 관통하는 스포츠 워치 트렌드 키워드 3.
1. 폭주하는 스테인리스 스틸 스포츠 워치의 인기
최근 시계 시장에는 비정상적으로 비칠 만큼 지독한 품귀 현상과 이에 따른 세컨드 마켓에서의 가격 폭등이 발생한 시계들이 등장했다. 그 주인공은 롤렉스의 프로페셔널 라인업 스테인리스 스틸 모델들과 파텍 필립 노틸러스 Ref. 5711 스틸 버전이다. 이 두 브랜드에 대해 말하자면 이미 반세기 전부터 애프터 마켓에서 최고가 경신을 주거나 받거니 해 온 쌍두마차다. 그래서 ‘이미 있어 온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불과 4~5년 전만 하더라도 롤렉스 서브마리너와 데이토나 정도만 시계를 구입하기 위해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려놔야 할 정도였지 다른 모델들에까지 해당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또 가격 폭등까지 불러일으킨 모델들은 생산된 지 오래되어 매우 희소성이 높고, 해당 모델을 상징하는 유명 인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모델에 한했다. 하지만 최근의 양상을 매우 달라졌다. 최신 스테인리스 스틸 소재의 스포츠 워치 해당 모델 전량이 애프터 마켓에서 가격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객들의 장기 대기가 더욱 심화된 것은 물론, 중고품의 가격이 신품 가격을 가뿐히 넘어설 정도의 기현상이 발생했다. 덕분에 롤렉스의 서브마리너, 데이토나, GMT-마스터 II, 익스플로러와 파텍 필립의 노틸러스 스틸 버전들은 민트 컨디션의 중고품이 신품 가격의 150% 선에서 거래되는 실정이다. 특히 가장 구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롤렉스 GMT-마스터 II, ‘펩시’의 경우 스틸 버전이 골드 모델의 가격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격이 오르는 바람에 신품 현행 모델임에도 출시 1년 만에 국제적인 대형 경매소에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스포츠 워치의 기본이 스테인리스 스틸 모델이라는 점, 골드 버전에 비해 가격이 낮고, 그 때문에 원래 인기가 높았었다는 점, 최근 롤렉스 스티브 맥퀸의 서브마리너, 폴 뉴먼의 데이토나가 경매에 나와 천문학적인 가격에 낙찰된 점, 인기 모델의 단종, 희귀 모델의 리바이벌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현상이 맞물려 일어난 폭발적인 화학 반응으로 해석된다. 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시계 업계에 활력을 불어넣는 반가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건강치 못한 소비 패턴의 심화로 받아들이는 우려의 목소리도 크다. 결국 모든 건 시장의 흐름을 따라가겠지만, 현재 시계 업계에서 이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키워드는 없다.
2. 사그라들 줄 모르는 리메이크 워치의 인기
‘이미 가치가 보장된 시계의 재생산’이라는 점 때문에 리메이크 워치의 인기를 몇 해가 지나도 식을 줄을 모른다. 올해의 모델들 중 가장 중요한 시계를 단 한 점 꼽는다면 난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 아폴로 11 50주년 기념 문샤인™ 골드 리미티드 에디션을 택하겠다. 1014점 한정 생산한 이 시계는 레이싱 크로노그래프로 태어나 ‘우주 시계’라는 장르의 선구자적 존재가 된 오메가 스피드마스터의 ‘달 착륙 50주년’을 기념한다. 사실 이 시계의 오리지널 모델은 우주인들이 달에 착륙할 때 착용했던 것이 아니라 성공적인 작전 수행을 축하하는 의미로 1969년 휴스턴에서 개최된 공식 디너에서 우주인들에게 증정된 선물로 제작된 것이었다. 그래서 오리지널 모델은 극도의 희소성을 지녔다. 오메가는 올해 이 시계를 원작과 거의 동일한 디자인으로 복원하면서 18K 문샤인™ 골드라는 소재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미 세드나™ 골드라는 독자적인 합금을 보유하고 있는 오메가는 기존의 옐로 골드보다 색이 연하고, 색이 변하지 않는 문샤인™ 골드를 개발해 이 시계에 적용했는데, 이름 덕택에 앞으로도 특별한 스피드마스터에 한해 지속적으로 사용할 것이라는 예감이 든다. 케이스 백을 통해 볼 수 있는 마스터 크로노미터 수동 칼리버 3861의 무브먼트 플레이트에도 골드 컬러를 입혀 특별함을 배가한 이 시계는 살아 있는 전설 버즈 올드린이 직접 착용하고 캠페인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3. 다채로운 컬러의 유행
스포츠 워치를 중심으로 점차 시계에 사용하는 제한적인 색상의 경계가 파괴되고 있다. 하이엔드 메이커 중에서 이러한 움직임을 선도하는 브랜드는 리차드 밀이다. 리차드 밀은 올해 ‘봉봉(Bonbon: 사탕)’이라는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억대의 가격으로 선보이는 시계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장난스럽고, 키치적인 디자인이 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마시멜로라는 이름이 붙은 RM 07-03은 거친 표면의 에나멜링으로 마시멜로 모양의 다이얼을 완성했고, RM 16-01 레글레즈 역시 둥글게 말린 레글레즈(Réglisse: 딱딱한 감초맛 젤리)를 표현한 블랙 크롬 도금 다이얼이 인상적이다. RM 37-01 키위는 작은 과일과 막대사탕 등을 잘라서 흩뿌려 놓은 듯한 스켈레톤 다이얼을 아크릴 페인트와 래커로 표현했고, RM 16-01 프레이즈 역시 극도의 미니어처 페인팅과 공예적인 요소를 결합해 키덜트적 감성의 다이얼을 만들었다. 총 10개의 베리에이션을 가진 ‘봉봉’ 컬렉션은 복잡한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탑재한 하이엔드 워치여도 얼마든지 팝적인 요소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데다가, 여성을 위한 하이 컴플리케이션 스포츠 워치 컬렉션을 론칭했다는 점에서 완전히 새롭다.
미들레인지 워치메이커 중 이 분야의 절대 고수는 라도다. 라도는 실험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소재를 최초로 시계에 도입해 온 유구한 역사의 브랜드로 시계사에 큰 족적을 남겨왔다. 최근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꼽히는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헌사의 의미로 트루 씬라인 레 컬러즈™ 르 코르뷔지에 컬렉션을 발표했다. 이 시계는 언뜻 스포츠 워치로 보기 어려운 디자인이지만, 캐주얼한 인상을 추구한 여성용 데일리 워치라는 점에서 스포티한 느낌을 주고 있다. 실제로 이 시계를 착용한 채 자전거를 타는 여성을 생각하면 참 근사하다. 르 코르뷔지에는 생전 백색의 건물을 가장 많이 지었고 ‘백색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로 건축에는 다채로운 컬러가 필요하다’는 의미로 ‘건축 다채색(Architectural Polychromy)’ 이론을 주창했다. 그래서 이 시계의 9가지 베리에이션을 하나로 모은 세트의 박스는 흰색이다. 시계의 케이스와 브레이슬릿은 모두 세라믹 소재인데 팔 시에나(채도가 높은 샌드 베이지), 루미너스 핑크, 슬라이틀리 그레이드 잉글리시 그린(밝은 청록색), 그레이 브라운 내추럴 엄버(밝은 흑갈색), 아이언 그레이, 선샤인 옐로, 파워풀 오렌지, 스펙태큘러 울트라마린, 크림 화이트로 구성되어 있다. 각 모델별로 색상을 뜻하는 품번이 붙어있는데, 이는 ‘건축 다채색’이 규정한 컬러의 고유 번호다. 세라믹 워치 업계를 리드하는 소수의 브랜드들이 자신들이 보유한 4~5가지 컬러에 대해 대대적인 홍보를 해왔는데, 라도의 트루 씬라인 레 컬러즈™ 르 코르뷔지에 컬렉션 하나로 인해 졸지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는 꼴’이 되고 말았다. 확실히 34년전부터 세라믹 시계에 집중해 온 브랜드의 역량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 에디터
- 김창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