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무력과 분쟁이 이는 곳의 기록자, 김상훈의 카메라가 포착하는 것

2026.05.07.신기호

“우리는 평화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어요. 기록하고, 성찰하고, 권력의 폭주와 불의를 계속해서 감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죠.”

김상훈 KIM SANG-HOON kishkim.com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김상훈은 1993년부터 국내외 다양한 매체에서 프리랜서 기자 일을 시작, 디자인과 사진 작업을 병행해왔다. 2006년부터는 레바논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아프가니스탄과 이집트, 홍콩, 우크라이나 등 국제 분쟁 지역을 다니며 현장의 참혹한 진실을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가 기록한 사진들은 <Science>지 표지를 비롯해 <Time>, <Newsweek>, <Der Spiegel>, <Stern>, <Le Figaro> 등의 해외 주요 매체에 게재됐다. 사진집 <가자전쟁, 미로의 벽>의 저자이기도 한 그는 현재,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의 교수로서 학생들에게 사진과 디자인을 가르치고 있다.

2014년 Shuja’iyya, Gaza Strip. 이스라엘-가자 전쟁에서 촬영한 소년과 말.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파괴된 가자지구의 접경지역 마을, 셰자이야에서 우리를 잃은 말과 집을 잃은 소년이 눈을 마주치고 있다.

교수님은 프리랜서 기자이자 종군 사진가, 사진(외 도서)작가 등 많은 타이틀을 가지고 있죠. 이 중 어떤 타이틀이 가장 익숙하신가요?
저는 지금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동시에 분쟁 지역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적 현장을 기록해온 사진가이기도 한데요, 지금은 아무래도 학교에 있다 보니 교수라는 직함이 가장 익숙하긴 합니다.

교수님께서 출연한 방송(인터뷰)을 보며 작업의 시작점이 궁금해졌습니다. 분쟁 지역을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때가 1980년대였어요. 등하굣길로 오갔던 신촌 로터리는 당시 우리나라 민주화 시위의 중심지였죠. 그래서 전경과 시위대가 격렬하게 충돌하는 현장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주 목격하며 자랐어요. 처음에는 그런 비일상적인 모습에 호기심을 느껴 사진을 찍었어요. 단순히 개인적인 흥미로요. 그러다 나중에는 이 기록 행위가 예기치 못한 인식의 변화를 가져오면서 질문하신 그 시작점이 됐습니다.

어떤 변화일까요?
내가 직접 목격하고 촬영한 현장이 다음 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것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면서, 내가 본 현장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건의 중심지였다는 걸 조금씩 깨닫게 됐어요.

내가 있던 그 현장이나 내가 찍은 그 현장의 모습이 신문이나 뉴스에 계속 나오는.
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뉴스의 헤드라인이 모이면 한 국가의 역사가 된다는 것. 그 후로 점차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생겼죠. 또 제 사진도 역사의 한 조각을 기록한다는 생각에 조금씩 책임감까지 느끼게 됐고요.

그럼 본격적으로 카메라를 든 건 언제부터였어요?
뉴욕 유학 중이었어요. 2001년에 발생한 911 테러를 직접 목격했죠. 그리고 뒤로 이어진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제 관심을 ‘국제 분쟁 지역’까지 넓히는 계기가 됐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사적 현장이었던 ‘민주화 시위’를 기록해온 사람으로서, 세계사의 현장인 ‘국제 분쟁 지역’을 기록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어 면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기록의 도구로 ‘사진’을 선택한 이유는요? 꼭 사진이어야만 했던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 같습니다.
‘사진’은 글이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선명함을 보여주는 내시경적 기록입니다. 사진은 어렴풋한 상상을 시각적으로 구체화해주죠. 그러니까 실재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전쟁을 숫자나 글로 접하면 그곳의 참상이 건조한 통계에 매몰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건조한 통계에 사진이 더해지면 비극의 실상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게 되죠. 사진은 가장 사실적인 증언이자 기록인 셈입니다.

기록의 비슷한 도구로 ‘영상’도 있죠. 교수님은 이를 병행하진 않나요?
차이가 있다면, 사진은 영상에 비해 기록자의 관점과 상징성이 훨씬 적극적으로 개입되는 매체예요. 물론 사진이 사건의 전후 맥락을 모두 담기엔 한계가 있지만, 대신 본질적 순간만을 남겨야 하는 작업인 ‘선택과 집중’을 통해 더 묵직하고 강력한 메시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사진이 기록의 도구로써 가진 독보적인 장점라고 생각해요.

1990년 서울. 전경과 학생들이 격렬하게 충돌했던 민주화 시위 현장.

교수님이 프리랜서 기자로서 기록한 첫 번째 분쟁 지역이 ‘911 테러 현장’이었다고요.
네. 저는 당시 뉴욕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동시에 한국과 일본 매체의 뉴욕 특파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테러가 발생하자 바로 카메라를 들고 현장으로 이동했고요. 당연히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먼지 자욱했던 무역센터였습니다. 그곳에서 굉장히 많은 사진을 찍었어요.

현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겠습니다.
그렇죠. 아마 저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비슷한 생각이었을 것 같아요. 갑작스러운 초대형 사건에 몹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죠. 테러 이후 몇 주 동안은 비행기가 조금만 낮게 날아오거나 소리만 나도 길을 걷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볼 정도였어요. 그만큼 뉴욕 시민들에겐 큰 트라우마였죠.

당시 현장을 취재하면서 교수님의 마음에 선명히 남은 ‘무엇’도 분명 있었을 것 같아요. 그 현장은 교수님의 첫 기록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안타깝게도 굉장히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테러 현장이기도 했으니까요.
네. 저는 원래 감정의 기복이 크지 않은 편이에요. 제 일에도 크게 기뻐하거나 깊이 슬퍼하는 성향이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공감 능력이 평균보다 낮은 편일 수도 있어요. 그래서 처음에는 현장을 마주하면서 감정에 동요되기보단 사진의 구도와 노출, 그리고 현장의 동선과 기록에 더 집중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화가 생겼어요.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고, 지금까지 보고 겪은 일들이 축적되면서, 안타까움과 분노 같은 감정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경우가 많아졌어요.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됩니다.
네. 그래도 여전히 기록자로서의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하고는 있지만, 전과는 달리 그 감정들을 완전히 배제한 채 촬영하는 건 이제 어렵더라고요.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스라엘, 우크라이나 등 분쟁이 일고 무력이 충돌하는 지역으로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어요. 사실 분쟁 지역에 가는 건 출국부터 결코 쉽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교수님은 어떤 방법들을 이용해 현장으로 이동했나요?
이건 정말이지 현장마다 상황이 전부 다릅니다. 공항이 파괴되었거나 항로가 막힌 경우에는 차량을 대절해 제3국을 경유해서 육로로 들어가기도 하죠. 당시 아프가니스탄의 경우엔 미군과 함께 장갑차나 헬기, 수송기로 몇 차례 갈아타며 이동하기도 했어요. 이스라엘 가자지구 전쟁 당시에는 ‘이스라엘-가자’의 국경 검문소를 통과해서 도보로 들어갔고요. 특히 2006년 레바논 전쟁 때가 힘들었는데, 요르단 암만에서 SUV를 타고 시리아를 거쳐 레바논 북부로 이동한 뒤에야 겨우 베이루트로 들어갈 수 있었는데 그 시간만 10시간 정도 소요됐습니다. 또 최근에는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 키이우까지 버스로 이동했는데, 검문소 정체까지 포함해 20시간 이상 걸린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현지 주변에서 이동하는 불편함보다 더 큰 어려움은, 2007년부터 시행된 우리나라 여권법상의 ‘여행금지제도’입니다. 분쟁 지역이 여행금지 지역으로 지정되면, 외교부의 심사를 거쳐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절차가 매우 복잡한 데다 심사 기간도 상당히 길거든요. 이게 짧게는 한 달, 길게는 두 달까지 걸리기도 해요. 그런데 현대전에서는 그사이 전황이 크게 바뀌거나 심지어 전쟁이 종료되는 경우도 있거든요. 또 실제로 모든 준비를 마치고도 허가가 나오지 않아 취재를 포기했던 적도 있었고요. 게다가 어렵게 허가를 받았더라도, 체류 기간이 2주로 제한되어 충분한 심층 취재가 어려웠던 경우도 많았습니다.

2014년 Gaza City, Gaza Strip. 이스라엘-가자 전쟁 중, 가자 지구에서 난민 대피소 역할을 했던 성 포르피리우스 교회 벽에 걸린 예수님 얼굴 그림 밑으로 무슬림인 팔레스타인 난민 소년이 웃으면서 뛰어간다.

아무래도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니 그런 거겠죠?
그렇죠. 물론 국민의 안전을 고려한 조치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지금 자유민주주의 국가 가운데 언론인의 국제 분쟁 지역 취재에 이처럼 사전 심사와 허가 제도를 둔 나라는 우리나라가 유일한 걸로 알고 있어요. 우리나라에 경험 많은 분쟁 지역 전문 기자가 부족한 이유 중에는 이러한 제도적 환경도 분명 영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겠습니다. 현장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싶은데요, ‘전장’이라는 곳에서 교수님이 느꼈을 두려움과 공포는 제가 감히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혹 이보다 더 크게 느낀 다른 감정도 있었을까요? 있었다면 그건 어떤 감정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볼수록, 알수록, 겪을수록 남는 감정은 결국 ‘안타까움’과 ‘분노’ 같아요. 물론 이 감정은 두려움과도 맞닿아 있죠. 분쟁 지역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두려움과 슬픔 속에서 고통받는 모습을 볼 때마다 느끼는 깊은 안타까움, 그리고 예고 없이 날아드는 폭탄이나 총알에 사람이 다치고 목숨을 잃는 상황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마주할 때, 그때의 감정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분노로 이어지거든요. 현장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통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에 이런 감정들이 오히려 더 크게 다가오는 순간이 많습니다.

교수님은 어떠하신가요? 현장의 참상이 그대로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걱정이 됩니다.
잊을 수 없고 잊지 않겠지만, 그 기억에 깊이 빠져 있거나 스스로 확대하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합니다. 첫 전쟁 지역 취재가 2006년 레바논에서 벌어진 ‘이스라엘-헤즈볼라 전쟁’이었는데, 당시 최전방이었던 레바논 남부에 머무르는 동안 이스라엘의 전투기 공습이 매일, 그리고 하루 종일 이어졌어요. 그런데 그때 이스라엘 F-15 전투기는 공습 전에 일정한 패턴이 있었어요. 꼭 목표 지역 상공에서 기수를 급격히 내리꽂아 하강하며 폭탄을 떨군 다음 다시 급상승해서 빠져나가는 패턴이었죠. 그래서 전투기 소리가 가까워진다는 건 곧 근처에 폭격이 있을 거라는 신호였어요. 그런 현장인 레바논에 한 달 정도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어느 날 학교 연구실에 앉아 있는데 전투기 소리가 가까워지니까 신기하게도 제 몸이 바로 반응을 하더라고요. 손에서 땀이 다 났었고요. 머리에서는 ‘아, 여긴 한국이야. 그냥 훈련하는 우리 공군 전투기야’라고 금방 인지했지만, 순간 레바논에서의 기억이 떠올랐어요.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듯이 저는 거기서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어요. 곧바로 제가 하고 있던 일, 제가 할 일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화제를 돌렸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네. 저는 평소에도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에 더 집중하는 편이에요.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다, 그럼 이제 뭘 해야 되지?’ 이렇게요. 눈앞에서 폭발로 다리가 날아간 사람을 보면 지혈부터 하고, 공포에 빠져 있기보다는 지혈대를 더 철저히 준비해서 다니자고 다짐하는, 그런 스타일이랄까요. 제게 기억은 과거에 머무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쪽에 가까워요. 그리고 그것이 제가 계속해서 기록을 이어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현장을 취재하며 교수님의 기억에 가장 선명히 남아 있는 순간들에 대해 물으면 언제를 이야기해 주실 수 있나요?
음, ‘가장’이라는 질문이 사실 정말 어렵습니다. 그만큼 저는 많은 일을 겪었고, 또렷하게 남아 있는 장면도 많으니까요.

정말 그렇겠습니다. 그럼 질문을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좁혀서 다시 드리면, 어떨까요?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떠올리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미군 장병들이 후송 헬기 안에서 서로를 붙잡고 전우애를 나누던 장면이 가장 먼저 생각나요. 동시에 IED(급조 폭발물)로 사망한 시신을 헬기로 이송하던 기억도 떠오르고요. 또 절단된 두 다리에서 흐르던 피가 비행 내내 제 얼굴에 튀었던 그 감각은 지금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2011년 Kandahar, Afghanistan. 부상을 입은 미군 장병들이 후송 헬기에 탑승해 있다.

교수님께서 최근에 찾아간 현장은 ‘러-우 전쟁’ 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네. 우크라이나는 전쟁 초기부터 ‘여행금지국’으로 지정됐어요. 저는 외교부의 허가를 받아 총 세 차례 다녀왔습니다. 처음 두 번은 <다큐 앤드 뉴스 코리아(Docu and News Korea)>의 지원으로 전쟁 상황과 피해를 취재했어요. 결과물은 <경향신문>에도 사진과 글이 실렸고, 국회를 비롯한 몇몇 곳에서 <우크라이나 1년, 금지된 현장을 가다>라는 이름의 사진전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방문은 작년이었는데, EBS 다큐프라임 <예술하는 인간> 1부, ‘전쟁과 예술’ 편에 프리젠터로 참여해 촬영에 동행했습니다. 이후 관련 사진전도 열었고요. ‘전쟁과 예술’이라는 구체적인 주제로 분쟁 지역을 기록한 것은 처음이었는데요,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도, 다시 회복시키는 것도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로 깨닫게 됐습니다.

전쟁과 예술, 어쩌면 상반되는 두 단어인데, 그 사이에는 역시 사람이 있군요.
맞습니다. 전쟁이라는 극심한 비극의 한가운데에서도 예술에 몰두하는 이들을 기록하면서 저 역시 잠시나마 현장의 공포와 피로에서 벗어날 수 있었어요. 그동안 제가 마주해온 전쟁터는 사상자와 유가족의 슬픔이 겹겹이 쌓인, 삭막하고 우울한 공간이었어요. 그런데 이곳에서 만난 예술은 단순한 감정적 위안을 넘어, 파괴된 일상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어떤 치열한 의지이자 태도로 다가왔습니다.

분쟁 현장의 모습을 짐작해보면 많은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만큼 기록해야 하는 내용도 많을 텐데, 현장에서 교수님의 카메라는 주로 어떤 장면을 포착하려고 하는지 궁금해요. 나름의 ‘기록 기준’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우선하는 것은 역시 ‘진실’입니다. 현장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 그리고 이미 벌어진 일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죠. 예를 들어 모두가 슬퍼하는 상황 속에서도 혼자 웃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불편하더라도 이 역시 진실이기에 그도 그대로 담습니다. 다음으로는 현장의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을 찾아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그 상황을 하나의 이미지로 전달할 수 있는 지점을 포착하려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분쟁이 언제, 어디서, 왜, 누구에게,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를 사진 안에 담기 위해 고민합니다. 이 사진이 기록으로서 제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죠. 결국 제 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기록’이라고 생각합니다. 상황과 현상은 물론 그 안에 담긴 감정까지도 가능한 한 온전히 남기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럼 반대로 기록하지 않는 내용들도 있을까요?
너무 당연한 얘기긴 한데, 사진이나 상황을 조작하지 않습니다. 취재를 하다 보면 현지인이나 현지 매체가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서 프로파간다에 이용하려는 경우를 가끔 봅니다. 하지만 이렇게 조작이나 왜곡된 사진은 기록으로서의 의미가 없죠. 그리고 피사체에 실질적인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정보도 담지 않거나 엠바고를 지킵니다. 제 사진 한 장이 누군가의 위치를 노출시켜 공격의 빌미가 되거나, 취재원 신변에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단독이나 특종의 유혹을 뿌리칩니다. 기록보다 중요한 것은 결국 그곳에 살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카메라는 생명을 기록하기 위한 ‘도구’이지, 누군가를 위태롭게 만드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저의 확고한 철칙입니다.

현장에서 피사체와의 거리는 어떻게 두고 촬영하시나요. 이는 찍히는 대상을 존중하거나 보호하려는 심리적 거리일 수도 있겠고요.
이건 현장에 따라 다른데요, 가능하다면 대체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접근하려고 하는 편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 그때 천천히 촬영을 시작하죠. 제가 그들의 삶과 슬픔을 진심으로 존중할 때, 상대방 역시 저의 기록 행위를 취재가 아닌 ‘공감’으로 받아들여 줍니다.

2023년 Hostomel, Ukraine.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격전지였던 호스토멜에서 공습경보가 울리자 창고로 대피한 11세 소년의 모습.

조금은 조심스러운 질문입니다만, 그럼 기록과 도움의 순간이 겹칠 경우엔 어떤가요?
본격적으로 분쟁 지역을 촬영하기 전에는, 그런 상황에서 사진을 먼저 찍을지, 아니면 도움을 먼저 줄지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몇 차례 실제 상황을 겪으면서 저는 사진보다 도움을 먼저 선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한 예로, 어떤 시위 현장이었는데 제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화염병을 맞아 머리에 불이 붙었어요. 순간 ‘사진을 찍고 불을 끌까?’ 하는 생각이 아주 짧게 스쳤던 것 같은데, 주변 사람 모두가 뒷걸음질치며 아무도 나서지 않는 모습을 보곤 제가 바로 불을 껐습니다. 누군가 이미 나서고 있었다면 저는 사진을 찍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순간에는 제가 아니면 아무도 할 사람이 없었고, 단 1초도 지체해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네. 지금 돌아봐도 그때의 선택은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전혀 후회하지 않습니다.

교수님께서 이토록 위험한 지역에서의 취재와 기록을 이어오고 있는 이유는 결국 무엇일까요?
밝고 안전한 곳은 충분히 많은 기록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하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때로는 외면하고 싶은 현장은 카메라가 많지 않아요. 무력 분쟁은 우리 시대와 역사의 일부입니다. 불편한 진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은 폭력을 휘두른 자를 부끄럽게 하고, 무력 분쟁의 의미를 다시 묻게 만드는 ‘증거의 힘’을 가집니다. 결국 무력 분쟁 지역의 기록은 진실을 남기기 위해, 또 잊지 않기 위해, 그리고 그 일에 대한 책임을 남기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의 사진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건 어디에서 어떤 장면을 촬영한 것이었나요?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격전지였던 호스토멜에서 공습 경보가 울리자 창고로 대피한 열한 살짜리 소년이 카메라를 응시하는 모습을 촬영했습니다. 전쟁이 1년여간 지속되던 즈음 찍었는데, 그동안 겪어온 전쟁의 끔찍한 경험들이 소년의 눈빛에 누적된 공포로 담겨 있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비슷한 질문입니다만, (어떤 의미에서든) 교수님께서 가장 아끼는 사진은 어떤 걸까요?
2014년 ‘이스라엘-가자 전쟁’에서 ‘소년과 말’을 찍은 사진입니다. 제게도 초현실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장면인데,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쑥대밭이 된 가자지구의 접경지역 마을, 셰자이야 한복판에서 우리를 잃었지만 살아남은 말과, 집을 잃었지만 살아남은 소년이 잠시 눈을 마주친 순간을 포착했습니다. 저는 이 말과 소년이 비슷한 감정을 공유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2001년 New York, USA. 당시 촬영된 사진은 일본 &amp;amp;lt;COMBAT&amp;amp;gt;지의 표지로 게재됐다.

주로 전장과 분쟁 지역을 포착하는 교수님의 카메라지만, 반대로 아름다움을 발견한 적도 있었을까요? 뷰파인더 너머 잠시나마 ‘평화’를 떠올렸던 장면이 있었다면요?
이것도 2014년 ‘이스라엘-가자 전쟁’이었는데요, 가자 지구 안에서 난민 대피소 역할을 한 성 포르피리우스 교회 벽에 걸린 예수님 얼굴 그림 밑으로, 무슬림인 팔레스타인 난민 소년이 웃으면서 뛰어가던 장면입니다. 아시다시피 중동 분쟁에서 종교를 빼놓을 수가 없죠. 그런데 이슬람교인 팔레스타인과 유대교인 이스라엘의 전쟁 속에서 기독교가 이슬람교 난민들을 보호하고 있다는 게 굉장히 묘하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종교가 없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이렇듯 종교나 인종, 민족을 초월한 박애 정신을 바라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참고로 이 교회는 지난 2023년, ‘이스라엘-가자 전쟁’ 때도 또 무슬림 피난민 대피소 역할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폭격을 받아, 대피했던 피난민 20여 명이 사망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지금 이곳에서 만나는 매일의 보통 날이 기적 혹은 행운처럼 느껴집니다.
같은 마음으로, 현재 중동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인류가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겪은 뒤 어렵게 쌓아온 ‘국제법’과 ‘인권’이라는 최소한의 장치들이 다시 무너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있으니까요. 그동안 세계 시민의식이 조금씩 성숙해지고 있다고 믿어왔지만, 갈등을 해결하는 방식은 여전히 폭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 깊은 실망을 안겨줍니다.

맞습니다. 지금의 전쟁을 지켜보며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이 많죠.
전쟁의 이면에는 결국 소수 권력의 정치적 이해와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 결과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고, 다치며, 범국민적으로 평생 지워지지 않는 정신적 피해를 남기고요.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결정을 너무 쉽게 내리고, 마치 게임하듯 전과를 과시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정말 분노가 치밀 수밖에요. 고의적이고 계획적인 살인이 가장 무거운 범죄로 여겨지는 것처럼, 전쟁 역시 그 본질을 생각하면 어떤 경우에서 건 정당화되긴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전쟁은 마땅히 멈춰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어려운 질문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교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평화’는 어떤 모습인가요? 지금 곳곳에서 일어나는 전쟁들을 보면, 우리가 말하는 ‘평화’란 존재하는 건지, 결국 분쟁과 분쟁 사이의 아주 짧은 공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닌지, 혼란스럽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 역시 순진한 이상주의자는 아닙니다. 폭력에 반대하지만, 어쩌면 폭력은 인간, 더 나아가 자연의 일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지금까지 본 전쟁은 대부분 힘의 불균형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강한 쪽이 무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이익을 취하려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제가 생각하는 현실적인 평화는, 아이러니하게도 ‘힘’에 의해 유지되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강대국이 성숙하고 절제된 태도로 평화를 통제하거나, 국가 간 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상황 같은.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나라가 균형을 이루는 것도, 강대국의 성숙함에 기대는 것도 쉽지 않죠. 그런데 그럼에도 ‘기록’하는 일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현장의 참상을 기록하고 알리는 것은, 힘을 가진 이들에게 그 결과가 얼마나 참혹한지를 보여주는 일이기 때문이에요. 그것이 결국 그들로 하여금 힘을 절제하도록 압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에디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비록 우리가 말하는 평화가 분쟁과 분쟁 사이의 짧은 공백일지라도, 우리는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늘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믿어요. 기록하고, 성찰하고, 권력의 폭주와 불의를 계속해서 감시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