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그 남자는 거기에 있다

2008.09.19GQ

배우 원빈에게는 체화된 기준이 모호한 몇 가지 이미지가 있다. 친구가 아닌 사람에게는 날씨와 계절 얘기 외에는 안 할 것 같은 거리감, 어느 거리에서도 우연히 마주친 적 없는 은둔자적 보행의 고립감, 그리고 꽃 같은 미소가 만든 어쩔 수 없는 유약함.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에도 여전히 독특한 초상이었던 그는 가파른 뺨인 채 5년 만에 카메라 앞에 섰다. 그가 뉴욕의 어느 꼭대기에서 서성이는 동안 꼬박 하루의 아침과 낮, 밤이 지나갔다. 빛이 지난 자리에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인, 또 다른 ‘남자의 표상’이 있었다.

브루클린의 로프트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유리를 통과한 햇빛은 갓 튀긴 크로켓처럼 뜨거웠다. 촬영팀은 틈만 나면 격자 창을 열었고, 그는 열어놓은 창을 몇 번이고 닫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새를 본 건 원빈뿐이었다. 탭칼라 셔츠와 진녹색 타이, 루이 비통 제품.

브루클린의 로프트에는 에어컨이 없었고 유리를 통과한 햇빛은 갓 튀긴 크로켓처럼 뜨거웠다. 촬영팀은 틈만 나면 격자 창을 열었고, 그는 열어놓은 창을 몇 번이고 닫았다. 테이블 위에 있던 작은 새를 본 건 원빈뿐이었다.

탭칼라 셔츠와 진녹색 타이, 루이 비통 제품.

녹슨 철골 위에 눕거나 흙 바닥에 털썩 앉은 탓에 옷은 곧 재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셔터 소리가 멈출 때마다 툭툭, 먼지를 털었다. 위스키 병을 셔츠 깃으로 한 번 쓱 닦고 술을 벌컥 들이켜는 남자처럼. 회색 실크 셔츠와 통이 넓은 팬츠, 가죽 벨트와 분홍색 구두, 스카프처럼 늘어뜨린 타이, 루이 비통 제품.

녹슨 철골 위에 눕거나 흙 바닥에 털썩 앉은 탓에 옷은 곧 재투성이가 되었다. 그는 셔터 소리가 멈출 때마다 툭툭, 먼지를 털었다. 위스키 병을 셔츠 깃으로 한 번 쓱 닦고 술을 벌컥 들이켜는 남자처럼.

회색 실크 셔츠와 통이 넓은 팬츠, 가죽 벨트와 분홍색 구두, 스카프처럼 늘어뜨린 타이, 루이 비통 제품.

자카드 수트와 셔츠, 타이, 루이 비통 제품.

자카드 수트와 셔츠, 타이, 루이 비통 제품.

 

흰색 셔츠와 금 단추가 달린 베스트, 루이 비통 제품. 청바지는 리바이스 빈티지 제품.

흰색 셔츠와 금 단추가 달린 베스트, 루이 비통 제품. 청바지는 리바이스 빈티지 제품.

 

촬영은 오전 열 시에 시작해서 밤 열 시에 끝났다. 햇빛의 정도를 가늠하느라 다같이 창밖을 보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브루클린 다리 위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를 보고 있었다“. 도시 풍경은 어디나 다 비슷해요. 이상할 만큼 닮았죠.”턱시도 재킷과 지퍼 장식이 있는 남색 팬츠, 머플러, 루이 비통 제품.

촬영은 오전 열 시에 시작해서 밤 열 시에 끝났다. 햇빛의 정도를 가늠하느라 다같이 창밖을 보면서 기다리는 시간이 많았다. 그는 브루클린 다리 위로 쏜살같이 지나가는 차를 보고 있었다“. 도시 풍경은 어디나 다 비슷해요. 이상할 만큼 닮았죠.”

턱시도 재킷과 지퍼 장식이 있는 남색 팬츠, 머플러, 루이 비통 제품.

“나이가 들면 아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그게 더 어려운 일이에요.” 검정 저지 톱은 앤 드뮐미스터 제품. 퍼 머플러는 빈티지 제품. 회색 팬츠는 루이 비통 제품

“나이가 들면 아들에게 존경받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유명해지고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그게 더 어려운 일이에요.”

검정 저지 톱은 앤 드뮐미스터 제품. 퍼 머플러는 빈티지 제품. 회색 팬츠는 루이 비통 제품

코트와 회색 바지, 루이 비통 제품.

코트와 회색 바지, 루이 비통 제품.

 

자카드 수트와 탭칼라 셔츠, 끝단에 로고 장식이 있는 타이, 루이 비통 제품.

자카드 수트와 탭칼라 셔츠, 끝단에 로고 장식이 있는 타이, 루이 비통 제품.

우리가 만나기로 한 날 오전, 그는 센트럴 파크에서 자전거를 한참 타다가 왔다. 그 탓에 콧잔등이 약간 그을렸고 뺨은 붉었다. 고든 램지의 레스토랑은 열 한시에도 붐볐고 포크와 나이프가 부딪히는 마찰음, 에그 베네딕트의 맛을 품평하는 수다에 섞여 주방에서 막 나온 커피가 어느 테이블에서 주문한 건지 웨이터들끼리 소곤대는 소리도 들렸다. 그들 중 누군가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그 커피는 저쪽에 고오저스 가이에게 가야 해.” 커피는 한순간의 주저도 없이 냉큼 원빈 앞에 놓였다. 차려 입고 온 뉴욕 사람들 사이에 면 티셔츠 바람으로 앉아서도 ‘고저스’란 수식어로 불리는 남자. 조약돌처럼 단단한 얼굴에 잉여 지방 없이 가파른 뺨과 턱. 티셔츠 소매 자국을 따라 두서없이 탄 젊은 팔뚝으로 의자를 바짝 당겨 앉는 모습에서, 어쩐지 이백 미터를 전속력으로 헤엄치고 뭍으로 막 나온 돌고래가 생각났다. 그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건 선글라스도 아니고 네모난 테의 평범한 안경이었는데 그걸 쥔 손은 생각보다 많이 컸다.

뉴욕에서 웬 자전거예요. 그게 제일 하고 싶었어요?
서울에서라고 자전거를 왜 못 타겠어요. 그냥 시간이 잘 안 나서 탈 생각을 못했는데 오늘은 인터뷰 전에 몇 시간 있다니까 공원에 가고 싶었어요.

바니스의 나무 선반엔 보석처럼 예쁜 커프링크스가 있고 버그도프 굿맨에는 그저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까무라칠 직물들로 만든 타이가 있어요. 그런데 그걸 다 놔두고 공원에 가고 싶었다는 건, 서울에선 답답했다는 얘긴가요?
도시는 원래 다 그렇잖아요. 서울이건 뉴욕이건. 어제 차를 타고 타임스퀘어 앞을 지나갔는데 전광판 불빛도 화려하고 사람도 많고. 북적북적한 게 뉴욕하면 딱 떠오를 이미지 컷 같았어요. 그런데 그걸 보니까 쓸쓸하더라고요.

왜요?
거기 있는 사람들 다 각자 따로인 것 같아 보였어요.

보이는 건 마음을 따라가요. 외롭다고 느끼나 보죠.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그 순간에 뭘 느끼냐는 다 다를 거예요. 전 외로움을 느끼는 감각 기관이 유별나요. 종종 외롭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침부터 종일 혼자인 날은 별 생각 없는데 친구들이 몰려와서 왁자지껄 떠들고 모처럼 재밌게 논 날. 그런 날 밤이 더 외롭죠.

조용한 사람들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내가 지금 여기 있는 게 저 사람한테 방해가 되는 건 아닌가 걱정하게 만들어요. 그런 얘기 꽤 들을 것 같아요. 친구나 애인한테. 혼자 놔둬야 될 것 같단 생각이 들게 하죠.
혼자 있는 거 안 좋아해요. 특별히 뭐 안 하고 조용히 있어도 주변에 사람이 많은 게 좋아요. 어려서부터 가족이 많은 집에서 자랐고, 형이랑 누나들, 마당에는 개하고 소에 닭까지 뛰어다녔어요.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말수가 적어지고 불편한 건 다들 그럴 테고. 저도 그 정도예요. 혼자 있어야 자유롭다거나 곁에 있는 사람들을 눈치 보게 만들진 않아요.

그런데 왜 어디도 안 나와요? 파티건 행사장이건. 패션 브랜드에서 행사를 할 때 원빈의 이름은 늘 초대 목록에 있어요. 그렇지만 누구도 전화하지 않아요. 안올걸아니까. <어디에도 없는 영화> 는 그렉 아라키 감독이 만들었지만 ‘어디에도 없는 남자’는 원빈이 만들었죠. 전 스크린에 있잖아요, 같은 대답을 할 건 아니죠?
어디건 거기 있는 게 즐겁고 내 역할이 확실하면 가겠죠. 그런데 패션 행사에 초대되고 낯선 사람들과 인사 나누고 유행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그런 쪽으로는 재주가 없어요. 잘 모르기도 하고 거기서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이 딱히 없으니까. 그런 자리에 있을 때 멋지고 빛이 나는 배우들도 분명 있어요. 그런 덴 절대 안 간다, 그런 마음은 아니죠. 다만, 무슨 일이든 명분이 분명하지 않으면 잘 안 해요.

명분이 없어서 청담동에도 안 나오는 건가요? 요즘은 카페며 식당에서 배우나 가수를 안 만나는 날이 없어요. 배우에게도 일상이란 게 있는 거고, 그 동네는 배우를 배우 대하듯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더 편할 테니까. 당신도 젊은 남자니까 좋다는 식당에는 가보고 싶고 걷고 싶은 거리도 있을 거 아니에요.
저도 거기서 미팅도 하고 사람도 만나요.

봤다는 사람이 없어요. 은둔자라고 불리는 거 알아요?
이상하다. 왜 못 봤지.

차 타고 와서 미팅만 하고 다시 차 타고 가죠?
그렇죠.

다른 사람은 친구도 만나고 걸어도 다니고 스파게티가 짜네 다네 그런 말도 하고 그러죠. 그렇게 총총히 사라지진 않아요. 개츠비는 호화로운 파티를 열어놓고 정작 그 파티에 자긴 안 나타나요. 그건 호기심을 목표로 한 작전이었어요.
그런 거 없어요. 그 동네가 별로 편하지 않은 건 있지만, 일부러 계획을 세우고 하진 않죠. 그런데 어디를 잘 안 다니는 게 무슨 전략이 되나요.

요즘은 배우들이 워낙 쓸데없는 쪽으로 소비되니까. 탤런트며 영화배우들이 정작 연기는 안하고 모두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 몰리잖아요. 패션 행사장의 포토 월에는 늘 나오는 사람이 또 나와요. 지난달에는 이 브랜드가 너무 좋아요, 웃다가 다음 달에는 이게 최고라고 다른 옷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서잖아요. 취향이란 게 있나 모르겠어요. 대중들은 영리해요. 자주 보는 얼굴엔 곧 식상해지죠. 배우는 그래도, 배우여야 해요. 친근감보다는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의 사람 같은 것.
그런 것까지 생각하진 않았지만, 예전엔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하고 싶은 일, 그렇지 않은 일의 경계를 칼같이 나눴었어요. 마음이 가지 않는 건 쳐다보지도 않았단 게 맞을 거예요.

지금은요?
안 그런다고는 못 하겠고, 덜 그러죠.

그럼 이제부터 덜 그러겠다는 마음은 어쩌다 생긴 거예요?
그러지 말아야지 생각한 적은 없어요. 다만 궁금한 게 많아졌어요. 예를 들면 옛날엔 배우들이 어떤 감독이 좋고 어떤 영화가 좋다, 그런 얘기하는 것. 별로 듣기 싫었어요. 어떤 장면에서 눈물이 났다던가 하는 말도 진지하게 안 들었죠. 일종의 자기 과시 같았거든요. 영화 일을 한다고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 싫었어요. 누가 그런 질문을 하면 난 모른다고 대답했어요. 요즘은 옛날에 안 보이던 것들이 많이 보여요. 저 사람 영화 참 좋다, 저 장면 너무 좋다. 그런 마음이 진심으로 드는 거예요. 이건 아주 단편적인 얘기고, 다른 경우도 비슷해요. 모든 일에 더 진지해진 것 같아요.

사진 찍는 걸 싫어한단 얘길 들었죠. 패션 화보도 이번이 처음이었고. 어젠 너무 열심이어서 놀랐어요. 그 더운데 털 코트 벗을 생각은 안 하고, 촬영장에 온 개 물부터 챙긴 것도 그렇고.
이번엔 좋은 의도가 있으니까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었어요. 난 배우인데 왜 옷을 갈아 입고 사진을 찍어야 하나, 그런 생각은 안 했어요. 하기로 한 거니까 열심히 하자 싶었고, 연습도 많이 했어요. 개들은 가엾잖아요. 더운데 사람이면 물 달라고 말이라도 할텐데. 어려서부터 집에 강아지가 많아서 그런지 동물에 대한 애착이 커요. 강아지가 새끼 낳고 걔가 자라서 또 강아지 낳고. 그런 걸 다 보고 컸어요. 가족 같아요.

고집이 센 편인가요?
보통 남자들만큼은요.

약간 오타쿠 기질 같은 게 보여요. 좋아하는 건 끝내주게 몰입할 것 같은 분위기가 있어요. 플라모델 조립하는 걸 좋아할 줄 알았는데 축구를 잘 한다면서요?
예전엔 뛰는 게 좋았는데 요즘은 자주 못해요.

욕심은요?
많아요.

없어 보여요. 오늘만 해도 톰 브라운과 밴드 오브 아웃사이더스와 팀 해밀턴을 다 버리고 센트럴 파크에 갔잖아요.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어느 옷 가게에서 원빈을 봤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요. 혼자 와서 두 번도 안 보고 재킷을 단번에 사서 나갔다고. 오리털 파카에 추리닝 입고 와서. 실망했나 보네요.
그분이. 그런데 옷에 관해서는 별로 욕심이 없어요. 주변에서들 그래요. 겨울에도 왜 슬리퍼를 신냐, 옷좀잘입고다니라고. 그 얘기가 틀린 건 아니에요. 배우니까, 평소에도 멋지면 좋죠. 그런데 그것도 다 자기가 좋아야 신나서 하는 거죠. 즐겁게 옷도 사고 구두도 사고. 재킷을 산 날은 아마 그게 꼭 필요해서 산 걸 거예요.

그럼 소비에 대한 욕구가 없는 거예요? 어쩐 쪽으로든? 단단한 옥스퍼드 구두나 다이얼이 큰 시계나 좋은 감으로 만든 코트 같은 걸 봐도? 아니면 별장이나 자동차는요?
좋은 걸 보면 좋다는 생각은 들어요. 갖고 싶은 마음도 물론 있죠. 옷이나 구두나 시계 같은 거, 좋단 생각이 들면 사요. 하지만 그게 절실하지 않아요. 갖고 싶을 때 언제든 그걸 살 자신이 있어요. 돈이 있고 없고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젊으니까 기회가 많다고 믿는 거죠. 그런데, 욕심이란 게 꼭 물건에 대한 얘기는 아닐 거 같아요.

어떤 배우는 전성기 때 영화 크레딧에 이름 올라가는 순서를 두고도 싸웠다고 해요. 그런 식의 욕심은 어때요. 자존심에 관한 거랄까.
눈에 뻔히 보이는 걸 놓고 욕심 내고 싶진 않아요.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일에 자존심을 걸진 않아요. 세상에는 진실이 있고 순리도 있으니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거죠. 목소리를 높이지 않아도.

강물이 흐르는 게 순리라면 연어는 그걸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요. 젊은 남자한테는 그런 것도 있어야죠. 치기일지라도 젊은 날엔 그게 ‘파이팅’이니까.
파이팅은 스스로를 향해 하는 거죠. 제일 어려운 게 내가 만족하는 거예요. 이만하면 됐다 싶은 거요. 전 그걸 잘 못해요. 대신에 사소한 일에는 힘쓰지 말자는 주의예요. 도로에서 끼어들기 같은 걸로 경쟁하는 거나 친구끼리 소리 지르고 싸우는 건 잘 안 하죠. 다혈질 기질이 있어서 욱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때마다, 조용한 곳에서 한숨 돌려요. 몇 분만 지나도 아까 그 마음이 아니니까. 감정에 밀려서 벌컥 화내는 상황이 싫어요.

분하거나 마음이 크게 상한 일이 있어도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있어요?
네.

아무도 안 만나요? 위로 받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만나요. 화도 풀리고 속상한 것도 없어진 다음에.

그러니까 외로운 거예요.
그런 걸까요. 전 그냥 누구에게든 폐를 끼치는 게 싫어요.

폐를 끼친다고 생각하는 건, 배타적인 성격에서 나오는 걸지도 몰라요. 친구고 가족이고 동료인데 폐가 어디 있어요.
어렸을 때는 다른 사람을 못 믿었어요. 저 사람이 나를 함부로 보지 않았으면 좋겠고 쉽게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 방법으로 택한 게 다른 사람과 벽을 쌓는 거였어요. 그땐 방법도 몰랐고 어쩔 줄을 몰랐으니까. 그게 나를 지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내 행동이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단 걸 알았어요. 상처받지 않으려고 한 행동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구나, 그러고 나서는 좀 달라졌죠. 요즘은 그래도 많이 편안해졌어요. 다들 성격 좋아졌다고 하니까. 폐 끼치기 싫단 얘긴, 책임감 같은 걸 거예요.

남자다운 걸까요?
글쎄요.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가장 먼저 하는 얘기가 남자답다, 는 말이에요. 스스로 남자답다고 생각하나요. 원빈의 기준에서 진짜 남자는 어떤 사람이에요?
남자다운 척하지 않는 남자.

군사를 끌고 전쟁터로 나가고 빙벽을 안전 도구 없이 타는 게 남자다운 건 아니죠. <대부>를 봐도 말론 브란도는 목소리부터 남자잖아요. 하지만 알 파치노가 더 남자다운 캐릭터였다고 생각해요. 조용하고 신중하고 남을 배려하죠. 소리나 꽥꽥 지르는 게 남자면 오리와 왜가리는 다 수컷이게요.
남자는 말에 힘이 실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 사람이 하는 말은 믿을 수 있고 따라야만 하는 것. 일종의 영향력인데 그게 말 한마디에도 있어야 한다고 믿어요. 그러려면 자기가 한 말에는 꼭 책임을 져야 하는 거고.

배우에게는 공익을 위한 책임이 있단 말을 한 적이 있죠. 유니세프 친선 대사로도 일하고 있고, 이번에 적지 않은 돈을 유니세프 어린이 구호 기금으로 낸 것도 그 이유인가요?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옛날부터 쭉 그랬죠. 마음은 있었지만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 편도 아니고 정보도 별로 없다 보니까 실천하는 걸 미뤘어요. 서른이 넘으니까 이걸 언제까지 생각만 하고 있을 건가 답답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결심을 하니까 할 수 있는 일들이 눈에 보였어요. 쓰촨성에 지진 났을 때 저 애들을 다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고, 뭐든 하고 싶었어요. 우리나라에도 굶는 아이들도 많고 하니까. 좋은 일 하시는 데 참여하고 싶어서 친선 대사를 했는데 그동안 한 게 별로 없어요.

배우들이 요즘 환경 운동도 많이 하죠. 그런데 어떨 땐 그게 너무 먼 얘기란 생각이 들어요. 물론 궁극적으로는 중요한 일이죠. 하지만 땅이며 나무며 공기 이전에 당장 주변에 있는 힘 없는 사람들을 먼저 돌봐야 하는 게 아닌가, 그 마음이 먼저 들어요.
맞아요. 공인이니까 우리가 하는 일이 상징적인 힘이 있잖아요. 당장 많은 사람을 돕거나 큰 돈을 못 내더라도 얘기를 꺼내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게 뿌듯하죠. 유니세프는 차별 없는 구호가 이념이에요. 아이들도 그렇지만 노인들도 먼저 생각해야 해요. 돌보지 않으면 무기력하게 버려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요.

가족 얘기를 자주 하는 것도 그렇고, 노인과 아이에 대해 각별한 마음이 있는 것도 그렇고. 다정한 면이 있네요.
다정해서는 아니에요. 그저 가족들, 고향, 조카들. 그런 데 애착이 커요.

부모님은 아직도 정선에 사시죠?
그럼요. 거길 떠날 마음이 전혀 없으세요. 저도 정선에 있는 시간이 많아요. 어디 여행 다니는 거 별로 안 좋아해서 틈날 때마다 정선 집에 가요. 외국의 휴양지보다 거기가 좋아요. 서울에서는 뭘 할 시간도 없을 것 같은데 막상 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일을 하지 않을 때의 배우는 사실 한가하거든요. 그런데도 선뜻 이걸 해볼까, 하는 마음이 안 생겨요. 정선에선 달라요. 할 일이 많죠.

가면 뭘 해요?
걸어 다녀요. 동네 어른들한테 인사도 다니고 어릴 때 놀던 골목에도 가고 학교 운동장도 자전거 타고 빙빙 돌고. 그러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아무 생각도 안 들어요. 워낙 자주 가니까 동네 어른들도 으레 왔겠거니 하세요. 평상에 누워 있으면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그런데 죄송하죠. 마음의 짐을 덜러 가는 거니까.

힘든 일이 많나요. 집에 가서 짐을 덜어두고 와야 할 만큼.
아니에요. 집이니까 부모님이니까 믿고 그러는 거죠. 괜찮아요.

<마더>는 언제부터 찍어요?
9월 중순부터 촬영 일정이 잡혔어요.

봉준호 감독이 특별히 주문 한 건 없나요? 봉테일이 별명이잖아요. 디테일하게 요구하는 걸로 유명하고.
감독님이랑 얘기를 많이 했어요. 어렸을 때 기억들이나 처음 서울에 와서 겪은 감정 같은 것들. 주로 얘기를 들어주고 그런 경험들이 도움이 될 거라고 했죠. 아직시나리오도 정확하게 다 정리된 게 아니니까 계속 고쳐나가는 중이라고만 들었어요.

아들이 살인 사건에 휘말리고, 엄마는 아들을 구명하러 나서는 게 줄거리인 와중에 어머니 역할이 김혜자잖아요. 보통 일이 아니겠어요.
부담이 많이 되죠. 김혜자 선생님. 연기인지 실제인지 구분도 안 가는 엄청난 기를 갖고 계시잖아요. 너무 존경하는 분이라서 함께 작업하는 게 좋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고 그래요. 몇 번 뵈었는데 눈빛이 너무 맑아요. 놀랐죠.

<마더>의 스토리를 이끈 사진이 있는데 그게 헬렌 반 미네의 사진들이란 얘길 들었어요. 사진을 보면 참, 기묘해요. 텅 빈 방에 소년이 앉아 있는데 그게 외롭고 쓸쓸한 데서 끝나는 게 아니고 뭔가 불안하고 무슨 일이 불쑥 닥칠 것 같아요.
그런 느낌이 필요할 거예요. 맞아요. 캐릭터에 불안한 게 있어요.

영화는 오랜만이죠?
<우리 형> 끝나고 처음이니까 햇수로는 5년만이에요.

뭘 기다린 거예요, 5년 동안?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다행인 건 그 시간들이 꽤 유용했다는 거예요. 내가 하던 일을 내가 참 좋아했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고 더 맹렬하게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죠. 일하면서 짜증 부리고 나만 생각하고 했던 게 너무 많이 미안했어요.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드니까 요즘은 에너지가 생겨요.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원빈의 영화엔 왜 여자가 없을까. 장진과 그의 친구들이거나, 장동건의 애지중지하는 동생이었다가 신하균의 사고뭉치 동생이었다가. 줄곧, 남자들 사이의 드라마라거나 형제 간의 스토리가 대부분이었죠. 이번에는 여자인가 했더니, 엄마잖아요.
그러네요.

남자와 여자. 단둘이 전부인 영화는 별로예요?
왜요. 정말 하고 싶죠.

그런데 왜 안 해요?
아직 못 만났어요.

애인 기다리듯 기다리나봐요.
정말 하고 싶은데, 시나리오를 보고 아, 너무 하고 싶다. 그런 마음이 드는 작품을 못 만났어요. 남녀 사이의 감정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눈빛이나 호흡, 옆모습만으로도 둘 사이의 대화가 오가는 영화를 언젠간 하고 싶어요. 통속이라고 하더라도, 영화에는 로맨스가 필요해요. 그걸 신파처럼 안 보이게 하는 게 배우의 몫이기도 한 거겠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저돌적이에요. 꽃처럼 웃던 원빈이 아닌데요.
꽃처럼 웃긴요. 그냥 무뚝뚝해요.

원빈도 누군가의 팬인가요?
모든 배우의 팬이죠. 얼마나 힘든지 아니까 무명이건 이름이 났건 그런 거에 상관없이 존경해요. 배우로 사는 게 쉬운 각오로 되는 게 아니거든요.

그래도 특별히 좋아하는 누군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살다 보면 질투가 나서 저걸 내가 했어야 하는데 그런 배역도 있을 거고, 저만큼은 못했겠지 자책하는 마음도 들고 할 테니까.
숀 펜하고 톰 행크스, 덴젤 워싱턴.

스타라기보다는, 그러니까 배우들의 이름이네요.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지만, 각자 자기 영역이 확실한 배우들이긴 하죠.

당신은 어떤 부분에서 확실한 자기 영역을 갖고 싶나요? 일 얘긴 좀 빼놓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 화려한 것, 말로 가늠할 수 있는 건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 안 해요. 스스로 만족할 수 있으면 되고. 아, 연애가 있겠구나. 누군가를 택했으면 그 관계에 완전히 몰입해요. 제일 좋은 애인이 되고 싶죠.

    에디터
    강지영
    포토그래퍼
    권영호
    스탭
    헤어/임철우(아우라 헤어)
    브랜드
    루이비통, 리바이스, 앤 드뮐미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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