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넌 실수야 / 남자는 팔

2013.12.23이충걸

30대의 실수는 이미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뭔가를 시작하기도 끝내기도 이른 나이부터 인생은 시끌벅적해진다. 동시에 부모가 늙어가는 게 아니라 진작에 늙었음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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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실수야 위험 요소 없이 시간을 헤쳐나가는 건 우뢰매도 불가능 한 일. 남성성의 가장 큰 비극은 실수의 비율이다. 남자는 의인화된 실수라서. 신기한 건 옛날 남자들이 겪은 실수들을 요즘 그 나이 남자들도 똑같이 한다는 점이다. 남자는 몇 살이든 항상 실수한다. 기댈 데라곤 실수 없인 지혜를 얻을 수 없다는 지리한 가르침뿐이다.

잘못의 유형도 때를 따른다. 10대에 미녀 바텐더와 도망가진 않는다. 그땐 너무 빨리 뜨거워지거나 식는 것만이 실수였다. 단지 너무 많은 꿈을 꾸었다. 꿈 이상은 안 됐다. 꿈을 멈출 수는 없었다. 중독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진짜 살이나 피를 대체한 어떤 것들도. 하지만 밖에 나가 찬 공기를 마시지도, 진짜 관계를 만들지도 못했다. 한 손을 사타구니에 넣은 채든, 교과서에 코를 박은 채든 남자 가 되지 못한 소년들은 인생이 언제 시작되는지 궁금해하기만 했다. 그리고 다른 꿈을 꾸며 10대에서 진짜 삶으로 넘어갔다.

20대의 실수는 젊음이 영원할 거라는 착각이다. 엄청난 시간이 있으니 방황은 권리였다. 여전히 어리고, 늘 존중받아야 했다. 모든 걱정마다 스크래치 투성이었으나 기회는 늘 있을 거라고 우기며 안주했다. 시시한 추억과 첫 번째 상처를 모두 경험한 뒤에야 그 시기가 얼마나 중요했고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돌아보지만 시 간은 이미 달리기 시작했다.

30대의 실수는 이미 늙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뭔가를 시작하기도 끝내기도 이른 나이부터 인생은 시끌벅적해진다. 동시에 부모가 늙어가는 게 아니라 진작에 늙었음을 깨닫는다. 자신의 첫 아기에게 인사할 때 부모와도 작별한다. 젊음의 광채는 곧 닳고, 이제 결정해야 할 순간이 온다. 포기할 것인지 반발할 것인지.

40대의 실수는 약화된 젊음을 불러오려는 것이다. 오직 머리카락을 꽉 붙들고 아랫도리를 딱딱하게 만드는 방법만으로. 씁쓸함은 50대의 실수. 낙관적 태도와 건강을 잃은 채 실수가 자신을 정의하도록 내버려둔다. 자주 화를 내고, 격분한 상태로 스스로를 방치한다. 남은 건 돈 많고 명성 있는 사람에 대한 묵은 질투. 복수심은 추하고 역겨우니 성찰은 아직 멀었다.

거기서 더 나이든 남자들의 실수는 두려움이다. 죽음과 시간 낭비에 대한 두려움. 살지 않는 것보다 최악은 없으나 사랑한 모든 것, 벌고 쓴 돈, 올랐던 산과 가본 장소, 함께한 진짜 우정, 적절한 시기에 수술한 사실까지 회한이 된다. 그래서 “정말 좋은 날들이었어”, 프랭크 시나트라의 노래를 굳이 꺼내보지만 인생은 망각과 함께 두터워지거나 달콤해지지 않는다. 마지막 위안은 역사 속에서 가장 고생스럽게 태어난 세대라는 원통한 확신뿐.

남자는 팔 따로 배우지 않아도 남자는 의지가 필요한 조직적인 일들을 해낼 수 있다. 비밀병기는, 남자라면 선천적으로 가진 근원적 에너지, 세상을 수리하고 정비하는 본능적 의무감이다.

하지만 크루아상을 꼬아 만드는 법도 모르고, 마당의 감나무를 어떻게 관리하는지도 모르고, 기계식 주차 조작법도 모르고, 이태원에 임대를 준 빌딩도 없는 남자는 어떡하란 말이냐? 곧죽어도 성공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누군가? 그래서 무위無爲를 찾나?

쓸모 있는 남자에 대한 논의는 당장 도덕적 상대성으로 이어진다. 잘났고 못났고의 기준은 어떤 감정 혹은 자기만족이라는 현실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핵심은, 둘 다 착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의 유용성이란 측면에는 알고 있거나 할 수 있는 것과는 다른 원천도 있다. 위축된 남자가 가진 애달픈 도구로서.

나는 유명하지도 않고, 돈도 적고, 엄마와 친구들을 불행하지 않게 만들 수도 없다. 하지만 그들을 터미널까지 바래다 주고, 가끔 그들 차에 기름도 채워주며, 어쩌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한다. 물이 새는 욕실을 고칠 순 없지만 가난한 친구와의 술자리를 아주 특별 하게 여긴다. 매혹적인 세상을 알아보고, 나의 어둠보다 조금 옅은 밝음을 다정히 나누기도 한다. 이런 나는 얼마만큼 유용한 걸까.

내 목소리는 벌꿀처럼 풍부하거나 담요처럼 따뜻하지 않다. 말도 별로 논리적이지 않다. 하지만 데미지를 입은 친구에게 먼저 전화 걸 줄은 안다. 통장 잔고와 연민을 동시에 담고 얼마면 되겠냐고 눈 부라리진 못해도, 뭔가 도울 일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한다. 이때 쓸모 있는 남자로서 나의 도구는 무엇일까.

팔은 남자에게 총만큼 강력한 무기다. 자기 체중의 두 배 이상을 들어올릴 수 있고, 주먹질 한 번으로 재수없는 놈 광대뼈를 주저앉힐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거한 친구는 좋아하는 여자에게 하는 자신만의 인사법을 가졌다. 여자를 가뿐히 들어올려 힘찬 충일감으로 포옹하는 것이다. 팔은 보좌적이면서도 역시 남성적이다!

하지만 언젠가 뇌수술을 한 친구가 견딜 수 없이 무서워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숨 쉬는 것밖에 없었다. 필요한 순간의 토닥거림, 손바닥의 표면적을 다 덮는 악수도 몰랐다. 그때 나는 팔이 없어서 다른 사람을 껴안을 줄 몰랐던 걸까. 한쪽 팔을 내 어깨에 둘러 말할 수 없는 일치감으로 나를 안아준 건 오히려 친구였다. 내 무거운 영혼을 들어올린 게 그렇게 종이처럼 얇은 팔이었다니.

그 후로도 내 팔은 금빛 갑옷을 입지 못하고 이달, 맨 꼴찌로 이 글을 쓰며 고릴라처럼 분노의 자판만 쾅쾅 두들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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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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