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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 아침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히 있다.

2021.01.22GQ

낮이 가면 밤이 온다. 인류의 앞날을 근심하는 학자들은 언젠가 지구가 모든 균형을 잃어 한쪽은 내내 밤만 계속되고 반대편은 낮만 있을 거란 불길한 예언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가설이 그렇듯 현실성이 별로 없으니(지금으로써는), 모르는 행성에서 낯선 언어로 무형의 광물에 관해 말하는 것 같을 뿐, 낮이 밤으로 이어지는 평범하지만 가슴 뛰는 루틴이 없어진단 건 믿을 수 없다. 하긴, 트롬쇠와 함메르페스트의 백야는 서정의 끝일 테니 거기서라면 밤뿐이어도 좋겠지? 그렇더라도 노르웨이는 너무 멀다. 한때 지독한 불면증 탓에 밤을 증오하고, 기어코 다시 오는 아침도 원망했다. 그때의 밤은 쓸데없는 생각, 난데없는 생각, 부질없는 생각의 향연, 화내고 후회하고 다시 화내고 더욱 후회하는 일의 연속이었다. 호두와 생양파, 라벤더와 구절초 베개는 어쩌면 그렇게 몽땅 무용지물. 불면의 밤은 크레이프처럼 겹겹이 쌓인 채 낮을 더럽히고 생활을 망쳤다. 그러던 어느 날, 왜 이러고 사나 의문이 생겼다. 끝까지 가면 리버 피닉스처럼 길바닥이든 어디서든 꼬꾸라져 잠들겠지, 자려고 무진장 애를 쓰는 스스로가 병신 같았다. 자려고 안달하지 않기로 했다. 비트가 약한 오래된 가요를 듣고 오스카 와일드 단편이나 안데르센 동화집처럼 쉽고 짧은 글을 읽었다. 우유와 캐모마일티 대신 버번과 땅콩 크래커도 왕창 먹었고. 여전히 잠은 제대로 못 잤지만 억울하고 비통한 심정은 없어졌고, 깊이 잠들지 못하고 꿈을 많이 꾸긴 해도 점점 더 많이 잘 수 있었다. 이상한 얘기지만 그토록 괴롭던 불면의 밤들, 검지 않은 흰밤을 정면으로 들여다본 후 밤을 끔찍이도 좋아하게 됐다. 운전을 하거나 영화를 보는 일상도 배경이 밤이어야 비로소 완벽했다. 아주 추운 밤 캐시미어 코트를 입고 아랫자락을 휘날리며 오렌지색 장갑을 낀 채 조용한 도로를 운전했다. 코트는 역시 껴입듯이 말고 걸치듯 입어야 폼이 난다. 찬바람이 뼛속까지 왈칵 들이쳐 팔꿈치가 깨질 것 같아서 뚱뚱하고 미련한 패딩이 곧 그리워졌지만, “아름답지만 무용한 이 코트에 대한 증오가 내 룩의 포인트” 라고 새침하게 말하고 싶었다.(누군가 물어줘야 말이지만.) 차갑고 고요한 차 안에서 익숙한 음악을 틀면, 즉각적으로 너무 많은 생각이 났다. 몇 곡의 음악, 그 짧은 순간에 셀 수 없이 많은 ‘길’이 있었다. 멜로디와 함께 도시와 계절과 감정과 옆 얼굴이 느리게 지나갔다. 날개뼈 아래 있던 엉망진창 스미스 앤 웨슨 리볼버 타투가 생각났다. 웨하스처럼 쉽게 부서지던 마음도. 요즘은 너무 추워서 한밤의 드라이브보다는 거실 조도를 낮추고 고전이나 시리즈물을 보거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한다. 안부를 묻고 날씨를 탓하는 짧은 메일을 쓰고 주말에 올리브와 초콜릿을 보낼 사람의 목록을 추린다. 필립 시먼스의 <소멸의 아름다움>에 나온 “누구든 벨벳 재킷 이나 도마뱀 구두를 사는 순간 와일드해진다”는 문장을 봤을 땐 평생 돌다리만 두드리다 돌만 박살내고 끝낼 그에게 리저드 로퍼를 하나 선물할까 시시한 계획도 세웠다. 동틀 때까지 옛날 영화를 몰아 보는 것도 밤의 즐거움 중 하나. 최근엔 샘 셰퍼드와 잭 니콜슨, 미키 루크 중 누가 가장 매력적인지 생각해봤다. 샘 셰퍼드는 워커 에번스의 세피아 사진 속 고독한 남자 같다. 나긋나긋한 헤어와 매섭고도 슬픈 눈, 바랜 청바지에 특유의 방랑자 같은 분위기. 그가 40편이 넘는 연극의 작가이며 그중 <매장된 아이>는 퓰리처상까지 받았다는 건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젊은 미키 루크는 영화 안에서 걸핏 하면 섹스하고 키스하고 담배 피우고 멋을 많이 부렸다. 인터뷰 때는 깔짝깔짝한 수염과 상처가 함께 있는 턱을 쓰다듬으면서 “섹스 심벌이 뭐 하는 직업입니까?” 되물었다. 그런 말을 할 때면 씹고 있던 풍선껌을 훅하고 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남자들의 경계와 여자들의 숭배는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늘 미키 루크의 몫이었다. 젊고 아름답고 놀랍도록 거만했지만 무엇보다도 세련되었던 남자. 가끔 머뭇거리거나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단칼에 사라진(이제는 흡사 물소 같은) 미키 루크의 아름다움이 현실이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한 편, 잭 니콜슨이 맨해튼의 고급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간 다면? 괴상한 트랙 수트에 뻣뻣한 양키스 캡, 검정 선글라스 차림이겠지. 식당을 가로질러 걸으면서 늑대처럼 웃겠지. 그러고는 거칠고 느긋한 목소리로 “레이디들, 안녕하신가?” 능글맞지만 느끼하진 않은 인사를 하겠지. 뿜어내는 자신감, 으스대는 분위기, 괴상한 유머. 그러고 보니 잭 니콜슨이 최고다. 자신감과 유머를 이길 수 있는 게 뭐 있지? 내친김에 말론 브란도와 장 폴 벨몽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까 싶었다. 어차피 아침까지는 아직 시간이 충분하니까.

    편집장
    강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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