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이희준은 서른 살 청년 ‘김창만’을 연기한다. 도시의 주름살 같은 골목길 다세대주택에 세 들어 사는 그는 주변 모든 인물로부터 ‘좋은 사람’ 소릴 듣는, 말하자면 슈퍼맨이다. 다정하고, 분별 있고, 책임진다. 그리고 유나를 좋아한다. 유나와 창만이 거리에 있을 때, 이희준을 어떤 방에서 만났다. 창만과는 전혀 딴판인 옷을 입고서.
<유나의 거리>, 요즘 안팎으로 칭찬이 자자하죠? <해무> VIP 시사회를 갔는데, 봉준호 감독님, 설경구 선배님, 김윤석 선배님… 우리가 ‘선수’라고 하는 사람들은 다 <유나의 거리>를 보고 있더라고요. 너무 좋았어요. 시청률은 비록 2퍼센트지만…. 그런데 JTBC에서 2퍼센트는 엄청나긴 하죠.
‘선수’라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배우 이희준의 어떤 꿈도 그 말에 닿아 있나요? 선수들요?
이를테면 김윤석이나 송강호나 최민식 같은, 소위 연기를 잘한다,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벽하다는 남자 배우들이 있잖아요. 황정민까지?
얼추 그렇겠죠. 근데 저는 어떤 배우의 매력이라면 ‘미스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 사람이 궁금한 거요. ‘선수’들에게선 그 미스터리가 좀 아쉬워요. 음, 배우는 말을 좀 아끼는 게 좋은 것 같긴 해요.
아낄 수 있는 스타일인가요? 아뇨. 가벼워요.(웃음) 하지만 쉽게 가벼워지지 않아야 될 부분에 대해 생각해요. 배우들끼리 연기 얘기를 하는 건 대개 술 마실 때거든요.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말하지 않는 게 더 좋겠다는 느낌. 배우마다 다 있죠.
지금 외우고 있는 대본 앞장엔 뭐라고 써놓은 거예요? 다음 주에도 어떻게 연기하자고 메모했는데.
보여줘요. 안 돼요, 안 돼. 그냥 어떤 부분을 살리자, 이런 거예요. 이걸 제 미스터리로 남기겠습니다.
이런. 혹시 드라마 결말은 알아요? 소문만 많아요. 유나가 죽는다, 나는 다영이(신소율)랑 결혼한다.
‘창만이’가 아니라 그냥 ‘나’라고 말하네요. 확실히 한 인물을 오래 연기하다 보면 물드는 것 같아요. 안 떨쳐져요. 요즘은 집에 가면 자꾸 뭘 고치려 들어요.
근데 굳이 비교하자면 이희준은 여배우와 연기할 때 더 좋아 보여요. 여배우들이 편안해하는 게 보여요. 제가 얼굴도 크고 이러니까?
연인이 아니라 남편처럼 대한달까요? 맞아요. 평소에도 여자들이 저를 좀 만만하게 대해요.
그거, 연애에 잘 이용할 수도 있잖아요. 하하, 한예종 다닐 때도 미인 급우가 많았어요. 저는 미인으로 보는데 걔들은 저를 그냥 열심히 하는 오빠로만.
연애 상담하려 들고. 맞아요. 근데 또 상담 잘해줘요. 나중에서야 문득 짜증이 나죠. 연기할 때는 글쎄요, 남자냐 여자냐 당연히 그런 구분은 안 두죠. 상대를 배려하자. 소위 말하는 ‘따먹는’ 연기 하지 말자. 근데 확실히 여배우들이 저를 되게 편하게 생각하는 건 있어요. 막 설레어 하지도 않고.
유나(김옥빈)도 창만에게 설레어 하진 않죠. 대신 마구 펼쳐놓는달까요? 옥빈이는 너무 좋은 배우인 것 같아요. 잘 받아주면 돼요. 제가 더할 필요가 없어요.
딱히 예쁘게 보이려는 것도 없죠. 그러니까 더 예쁜 것 같아요. 여배우들은 이미 예쁘기 때문에 예뻐 보이려고 안 할수록 더 예뻐요.
유나와 창만은 곧장 김옥빈과 이희준 같기도 해요. 광양에서 한창 잘나가던 김옥빈과 대구에서 공대 다니던 이희준. 맞아요. 저도 알바 진짜 많이 했거든요? 연극하겠다고 서울 왔을 때 진짜 많이 했어요. 닮은 점이 있죠. 그런데 이렇게 저 자신에 대해 말하면 배우로서 제 미스터리가 사라지는 게 되나요? 사실 아까 얘기한 ‘배우의 미스터리’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를 못하겠어요. 왜 황정민, 최민식, 설경구 같은 배우에게 미스터리가 부족해 아쉽다고 하시는지.
어디까지나 제 취향이자 편견이긴 한데요, 예를 들어 그의 이름이 걸린 영화가 나와요. 근데 벌써 알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죠. 잘하겠지, 보면 역시 잘해요. 그게 다예요. 다음에도 잘하겠지. 지겹다는 말과는 다르고요. 뭔가 덜 보여줘야 하는 걸까요? ‘배우의 미스터리’라는 말이 제게 굉장히 특이하게 들려요. <해무>를 보면 저에 대한 미스터리가 생기실지도.
스트라이프 셔츠는 보기, 넥타이는 던힐, 조끼는 브루넬로 쿠치넬리.
가죽 칼라가 달린 코트와 터틀넥 스웨터와 팬츠와 구두는 모두 구찌.
혹시 거울은 자주 보는 편인가요? 잘 안 봐요.
지금도 사실, 희준 씨가 창만이로 보여요. <유나의 거리>에 나오는 모든 배우가 그렇죠. 작가가 얼마나 캐릭터를 아끼는지 알겠어요. 절대 악역이 없어요.
그래도 조금 덜 아낀다고 할 만한 캐릭터가 두 명 있어요. 그게 창만과 민규(김민기) 같아요. 민규는 아예 ‘나쁜 놈’으로 낙인 찍은 느낌이랄까? 하하, 그렇찮아도 얼마 전에 윤다훈 형이 밥 먹다 말고 민규한테 그런 얘길 했어요. 걱정하지 말라고, 작가님이 너를 절대 악역으로는 만들지 않는다, 언젠가 너에 대한 애정을 보여주실 거다, 그랬는데 아직 민규가 다시 나온다는 소식은 없네요.
창만의 경우는 또 달라요. 창만은 절대 비뚤어질 수 없는 인물로 고정시켜 놓았죠. 뭔가 리얼리티를 벗어날 수도 있는 선을 왔다 갔다 하는 거 같아요. 실제로 사람이 저래?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저렇게까지 할 수 있어? 작가님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이 있을 것도 같다, 이걸 원하시더라고요. 그러니 보는 사람이 “에이, 저런 사람이 어디 있어”라는 느낌을 받으면 제 연기가 실패한 거겠죠. 창만이는 희망이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희망이라는 말이 참 허망하게도 들리는 요즘이라서요. 지난봄에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촬영장으로 가다가 광화문 앞에서 세월호 희생자 조문객들을 봤어요. 그렇게 비가 오는데, 아빠 엄마 손을 잡고 조문을 기다리는 아이도 있더라고요. 저도 정말 마음이 아프다지만, 과연 저기 저렇게 서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쩌면 창만이는 저기 서 있는 사람이겠구나, 내가 저 마음으로 연기해야겠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짜증나지만 그래도 이게 옳은 일이니 하자! 이런 인물을 연기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날.
50부작이니까 아직 좀 남았죠? 봄에 시작했는데, 지금이 몇 월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배우로서 늦깎이 소리도 듣는다지만, 이제 10년쯤 됐어요. 네, 저라는 배우를 어떻게들 보시는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어떻게 보이고 싶은 건 있어요. 연기를 진지하게 사랑하고, 즐거워하는 작품을 하나하나 고르고 있구나, 평생 그러면 좋을 것 같아요.
직접 평가하자면요?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좀 더 연기를 잘했으면 좋겠어요.
제 생각은 좀 달라요. 연기를 더 잘할 필요는 없을 것도 같아요. 그보다는 묘하게 궁금한 배우였으면 싶은데. 그건 제 맘대로 안 되는 거잖아요.
모르죠. 기자님 얘기하는 게 재미있어요. ‘배우의 미스터리’에 대해 한번 잘 고민해볼게요.
멋이라면 어때요? 오늘 사진은 창만이와는 전혀 딴판인 사람이었죠. 사실 이희준이라는 배우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부터 이런 분위기를 떠올리기도 했어요. 극단적으로 섬세하게 멋부릴 줄 아는 남자. 늘 좋은 선배들과 지내면서, 어떤 배우가 좋은 배우고, 어떤 남자가 멋진 남자인지, 저만의 기준이 생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강신일 선배님을 보면 전혀 멋을 안 내는데 참 멋있어요. 잠깐 구찌 재킷을 입고 멋있는 척하는 것과는 다른 멋이겠죠.
하지만 구찌 재킷을 입고 가장 구찌답게 멋있어 보이는 것도 좋은 배우만이 풍길 수 있는 멋 아닐까요? 제가 좋아하는 배우가 맷 데이먼이에요. 일단은 담백한 느낌인데, 그러면서도 사려 깊고, 액션도 좀 지적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번은 술 먹다가, 한국의 맷 데이먼이 되면 좋겠다! 싶었어요. 저 혼자만의 방에서 하는 생각으로요. 근데 지금도 비슷하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더러 있어요.
그런데 창만이 사는 방 말이에요. 꽤 좋아 보여요. 붙박이장도 예쁘고요. 다들 그 방을 좋아하더라고요.
반지하에서 평창동 전세 8천으로 옮겼다는 방은 요즘 어때요? 그 방 사기 당했어요. 저당이 많이 잡힌 집이더라고요. 저한테 사기 치신 분들 다 잡혀가고….
저런, <유나의 거리> 에 나올 것 같은 얘기네요. 네, 한 인물을 오래 연기하다 보니.(웃음)
셔츠는 브루넬로 쿠치넬리, 포켓치프는 톰 포드.
- 에디터
- 장우철
- 포토그래퍼
- 목정욱
- 스타일리스트
- 최희진
- 헤어&메이크업
- 동호(작은 차이)
- 어시스턴트
- 류솔, 최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