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리트 패션이 하이 패션을 점령한 요즘의 흐름을 설명할 때 일본 스트리트 패션의 역할을 빼놓을 순 없다. 그들은 제작 방식과 브랜드 마케팅을 통해 평범했던 일상복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
J.W. 앤더슨의 청바지, 구찌의 티셔츠, 발렌시아가의 패딩 점퍼 등을 보면 알 수 있듯 지금 패션계의 커다란 흐름 중 하나는 스트리트 패션이 하이 패션에 침투했다는 사실이다. 스트리트 패션이 지금과 같은 대접을 받게 된 데는 일본의 패션 산업이 큰 역할을 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평범한 옷을 새로운 세대의 패션으로 만든 게 바로 일본의 패션 산업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전에는 청바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1990년 즈음부터 특정 제작 방식과 디테일에 집중하는 일본의 패션 마니아들이 구형 제조 방식의 리바이스 501을 다시 복각하기 시작했다. 청바지에서 시작된 복각은 킹 루이(King Louie)의 빈티지 볼링 셔츠나 부코(Buco)의 가죽 재킷, 버즈 릭슨(Buzz Rickson’s)이나 리얼 맥코이(Real McCoy’s)의 구형 군복 등등 아메리칸 빈티지 의류 전반으로 확대되었다. 일본의 이런 흐름 덕분에 구형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와 숙련공들은 마치 명품 산업의 장인 같은 존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단순한 복각으로 끝나지 않았다. 빈티지 제작 방식에 현대적인 분위기를 더한 벨라폰테(Belafonte)나 엔지니어드 가먼츠(Engineered Garments), 바튼웨어(Battenwear) 같은 브랜드가 나오기 시작했다. 오사카나 오카야마 등 일본의 서쪽 지역을 중심으로 기존의 미국 옷을 그대로 다시 만드는 레플리카 패션이 만들어질 때 도쿄 쪽에서는 아메리칸 빈티지를 보다 패셔너블하게 재구성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모든 건 사실 1980년대 초반 LA에서 스투시(Stussy)가 했던 것들이다. 스투시 덕분에, 그림이나 문구를 통해 직접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서핑과 스케이트 보드, 펑크나 힙합 등 서브컬처와 폭넓게 결합하며 교류하는 태도, 뜻과 감각이 통하는 사람들의 집단(트라이브)을 만드는 것 등이 스트리트 패션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스투시가 선보인 스트리트 패션 문화를 일본이 좀 더 정교하게 발전시켰다고 보면 된다.
스투시의 트라이브 중 한 명이었던 후지와라 히로시가 런칭한 굿이너프(Goodenough)나 기타무라 노부히코의 히스테릭 글래머(Hysteric Glamour) 같은 브랜드를 시작으로 어 베씽 에이프(A Bathing Ape, 나중에 Bape로 이름을 바꾼다)와 언더커버(Undercover), 네이버후드(Neighborhood), 헥틱(Hectic), 바운티 헌터(Bounty Hunter) 등이 등장했다. 이들을 모두 합쳐 ‘우라 하라주쿠’라는 스트리트 패션 신으로 부른다.
이들 역시 스케이트 보드나 힙합, 서핑이나 펑크 등 하위 문화 전반에서 콘셉트와 이미지를 끌어 왔다. 실제로 브랜드를 이끄는 사람들도 서퍼나 스케이트 보더, 디제이 등이었다. 그들은 시부야 케이의 대표적 뮤지션인 코넬리우스(Cornelius)나 스차다라파 같은 힙합 그룹 멤버들에게 옷을 입혔다. 어 베씽 에이프 창립자 니고처럼 자신이 직접 스타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후지와라 히로시를 비롯해 베이프나 굿이너프의 티셔츠 프린트를 그리던 Sk8thing, 프로 스케이트 보더였던 헥틱의 요피 등에게도 팬이 생겼다. 아이돌 팬덤 문화처럼 그들은 당시 패션에 민감하고 새로운 걸 찾고 있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생산 방식도 달랐다. 그들은 극소량을 생산하고 리테일 샵을 제한했다. 굿이너프를 크게 확장시키고 싶지 않아 했던 후지와라 히로시가 6개월씩 쉬면서 신제품을 내놓고 리테일 샵을 줄이는 방식을 보고 베이프나 언더커버도 비슷한 방식으로 브랜드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신제품 소식이 들리면 팬들은 매장 앞에서 밤새 줄을 섰지만 물건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제품을 구한 사람의 만족도가 높아지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제품의 가격은 몇 배가 뛰었다.
사실 스트리트웨어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옷이다. 스트리트웨어가 하이 패션의 장인 정신, 창조적인 이미지와 희소성을 확보하기는 대단히 어려웠다. 하지만 평범했던 거리의 옷은 이렇게 새로운 제작 방식과 브랜드 이미지 마케팅을 통해 특별한 가치를 얻게 됐다. 꼼데 가르송 같은 하이 패션 브랜드의 옷을 입던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베이프나 바운티 헌터를 구입했고 그 옷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트렌드한 사람인지 보여줄 수 있었다. 또한 면 티셔츠나 나일론 점퍼 같은 옷에 왜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마련되었다.
80년대 말 일본의 데님 헌터들이 미국으로 몰려가 창고에 쌓여있던 옛날 리바이스나 군복 재고를 구입해가는 걸 보고 미국인들은 전혀 이해를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베이프와 엔지니어드 가먼츠 같은 브랜드가 인기를 끌면서 그들의 뿌리인 필슨(Filson)이나 쇼트(Schott), 시에라 디자인(Sierra Designs) 같은 미국 브랜드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프린트 티셔츠와 후디가 가장 최신의 트렌드가 되었다. 패딩과 운동화가 캣워크 위에 서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 에디터
- 글 / 박세진(<패션 vs. 패션 >, <레플리카>, 저자)
- 사진
- Engineered Garments, Neighborhood, Underc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