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파라다이스를 꿈꾼다. 누군가는 파라다이스를 찾아나선다. 에릭남은 꿋꿋하게 파라다이스를 만든다.
국내 활동은 오랜만이네요. 일주일 전에 미니 앨범을 발표했는데 어때요? 최근 몇 개월 동안 다들 갑갑하게 지냈잖아요. 하고 싶은 일을 다시 할 수 있다는 게 감사해요. 스케줄이 좀 힘들어도 신나요.
그래서일까요? 음악방송에서 댄스 가수처럼 격한 안무를 하며 ‘Paradise’를 부르던데요. 하하.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은 노래라 안무를 넣었어요.
‘Paradise’의 가사는 어떤 상황에서 썼어요? 원래 사랑 노래였어요. 근데 코로나19 사태가 터지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어요. 살다 보면 막막할 정도로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기도 하잖아요.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면서 가사를 다시 쓰게 됐어요.
국내외를 오가며 활동 중인데 그런 고민을 했을 당시 어디에 있었나요? 2월부터 북미 24개 도시를 돌며 공연을 하고 있었어요. 3월 초쯤, 코로나19로 상황이 좋지 않아 LA에서 예정된 마지막 2회 공연을 취소했어요. 이어지는 남미 투어도 중단하기로 결정했고 두 달 정도 LA에 머물렀죠.
유튜브 채널에 올린 브이로그에서 세 달 넘게 머리를 자르지 못한 모습을 봤어요. 누구나 할 것 없이 답답한 일상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보냈어요? 처음에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어요. 짜증도 났고요. 그러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됐는데 지금까지 쉼 없이 달리기만 했음을 깨달았어요. 소중한 사람들을 더 챙겼고, 연락이 뜸해진 이들에게 안부를 물었죠. 또 지금의 갑작스런 변화로 인해 콘텐츠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사람들과 의견을 나누고 고민했어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죠? 비대면, 단절, 고립이 일상화되면서 팟캐스트가 더 힘을 얻지 않을까요? 맞아요. K팝 팟캐스트 ‘대박쇼’와 토크쇼 형식의
‘I Think You’re Dope’라는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거라도 편하게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청취자도 되게 많이 늘었어요. 처음에는 팟캐스트에서까지 힘들다, 짜증난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조심스러웠어요. 근데 생각해보면 전 세계 모든 사람이 똑같이 겪는 상황이고, 대화가 다 그런 내용이잖아요. 오히려 말을 안 꺼내는 게 이상했어요. 제가 느낀 감정이나 생각을 이야기했더니 많은 분이 공감하셨어요.
예전에 토크쇼를 꼭 해보고 싶다는 말을 했었죠? 에릭남 하면 좋은 인터뷰어라는 이미지가 있는데 팟캐스트는 본인에게 어떤 의미의 일인가요? 팟캐스트는 취미 생활이지,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시작한 지 1년 됐는데 부담이 적고 이야기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플랫폼이에요. 게다가 팟캐스트를 명분으로 평소 대화를 하고 싶거나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섭외할 수 있어서 좋아요.
팟캐스트도 그렇고, 유튜브가 지금처럼 영향력을 발휘하기 전부터 유튜브 콘텐츠 제작에 관심을 뒀다고 들었어요. 촉이 빠른 편인가요? 그런 것 같아요. 새로운 뭔가를 빨리 캐치하는 편이에요. 호기심이 커서 남들보다 먼저 경험해봐야 직성이 풀리기도 해요. 제가 알기로 틱톡도 국내 연예인 중 가장 먼저 접했을 거예요. 틱톡 관계자를 LA에서 만나 설명을 듣기도 했어요.
흥미롭네요. 그런 스토리가 있는 줄 몰랐어요. 벤처, 스타트업에 관심이 많아요. 그래서 제가 먼저 찾아가서 새로운 기술과 트렌드에 대한 정보를 얻기도 하고, 이를 참고해서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계획을 세워요. 이제는 새로운 플랫폼에서 테스트를 해달라고 먼저 연락이 오기도 해요.
그런 자리에서 본인을 뭐라고 소개해요? 전에는 싱어송라이터라고 했는데 요즘은 아티스트라고 해요. 이 말이 제가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포괄해요.
그중에서 1순위는 뭔가요? 당연히 음악이죠. 역시 음악이 가장 재미있어요. 그다음은 방송 콘텐츠를 만드는 일인데요, 미국의 네트워크사들과 이야기가 오가고 있어요. 기회가 된다면 프로듀서나 작가, 컨설턴트로서 뭔가를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국에서 활동이 뜸한 사이 나름대로 바쁘게 지냈네요. 어떤 어른들은 왜 방송에 안 보이냐고, 은퇴했냐고 물어보기도 해요.
그럴 만하네요. 한국에서 꾸준히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큰데, 솔직히 뭐가 맞는지 헷갈려요. 음악방송이 아니면 제가 나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 많지 않은 데다 유튜브처럼 새로운 플랫폼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어요. 또 대중은 새로운 걸 원하잖요. 앨범마다 새로운 콘셉트를 만들어야 하는데 어느 순간 힘에 부치기 시작했어요. 지금까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무엇을 더 보여줘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럼 이번 앨범을 준비하면서 뭘 기대했어요? 예전에는 제 음악을 대중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기대가 됐다면, 지금은 스스로의 만족에 무게를 둬요. 제 마음에 쏙 드는 창작물을 만들었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해요. 평가를 의식하거나 어떤 기준에 얽매이고 싶지 않거든요. 그랬다가는 남들과 비슷해질 수밖에 없어요. 만약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새로운 작업을 시작하면 돼요. 그게 바로 크리에이터의 본분이라고 생각해요.
에릭남의 인터뷰를 보면 얽매이지 않으려는 태도와 남들과 다른 것을 볼 줄 아는 시선이 느껴져요. 데뷔하고 나서 누구누구 같은 음악을 하라는 얘기를 진짜 많이 들었어요. 근데 잘하는 사람을 따라 하는 것밖에 안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에릭남이 잘하는 것을 하자, 해외에서 언어가 통하고 팝적인 성향이 강하니까 이걸 활용하자고 말했지만 다들 안 된다고 했어요. 설득하고 좌절하길 반복하면서 스스로 제가 원하는 틀을 다졌어요.
기존 방식이나 관성에 부딪히고 깨지면서 마음고생이 심했군요. 오늘 컨트리 뮤지션의 이야기를 그린 미드 <내쉬빌>을 봤는데 주인공의 대사가 크게 와 닿았어요. “이곳에는 나를 위한 사람은 아무도 없고 혼자서 다 해내야 한다.” 여기에 공감한다는 사실이 슬펐어요.
결국에는 에릭남의 이름과 글로벌이란 수식어는 뗄 수 없고, 케이팝 솔로 아티스트 중에서 최다 도시 투어라는 기록에도 도달했어요. 처음에는 눈앞이 캄캄했지만 조금씩 길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좀 더 새로운 시도와 도전을 하게 됐어요. 지금은 작업이나 투어에 대해 물어보는 후배가 많아요. 제가 했던 방식대로 해외 진출을 이룬 동료도 있고요. 같이 잘되는 게 보이니까 뿌듯해요.
언젠가 잘될 거라는 믿음이나 확실한 비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 같은데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가수의 길을 택했을 때 딱 두 가지만 생각했어요. 성공해서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자, 무조건 외국에서 성공해야 한다. 당시만 해도 팝 시장에서 동양인을 찾아보기 힘들었어요. 미디어에 묘사되는 동양인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대학교에서 관련 수업도 들었거든요. 관심을 갖고 있던 이슈라 그 자리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계속 문을 두드려야 기회나 변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외국에서는 어떤 말을 주로 들어요? 스태프들이 제가 너무 착해서 부담스럽다고, 마냥 착하기만 하면 무시당할 수 있으니 조금은 못되게 굴어야 한대요. 그래서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고 의사 표현을 확실히 하려고 해요.
이달 의 이슈는 ‘Change Is Good’이에요. 전 세계에서 발행되는 에서 동시에 진행하는 글로벌 이슈인데 에릭남이 여기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을 돌아보면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변화의 순간이 참 많았어요. 백인 중심의 사립학교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고, 회사를 쉬고 인도에서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어요. 그 다음에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 연락을 받아 계획에도 없던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고 결국 가수를 하게 됐어요. 사실 변화라는 건 불확실성을 안고 있어 두렵게 느껴질 수 있어요.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고 열심히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따라와요.
요즘은요? 인생에서 변화가 가장 많은 시기라고 생각해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원하는 일을 벌이고 있거든요. 과거에도 잘 헤쳐왔으니 앞으로도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어요.
지금 자신에게 꼭 필요한 변화는 뭔가요? 여전히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없잖아요. 이참에 다음 행보는 신중히 결정하면서 여유를 가지려고요. 10년 가까이 활동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지냈어요. 올해는 되도록 부모님과 시간을 보낼 생각이에요. 이것도 저한테는 의미 있는 변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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