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지만 없는 것, 가상이면서 현실인 것. 구정아가 만든 무한한 세계.
삼청동에 위치한 PKM 갤러리 정원에 거대한 조각이 착륙했다. 해가 지면 야광으로 변한 분화구 위에서 볼캡을 쓴 남자가 리드미컬하게 미끄러지며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지금 PKM 갤러리에서 구정아 작가의 개인전 <2020>이 열리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대규모 야외 설치 작업을 비롯해 회화, 드로잉, 조각 등 미공개 최신작 30여 점이 공개된다. 공명, 울림이란 뜻의 스케이트파크 조각 작품 ‘resonance’는 2012년 프랑스 바시비에르섬에서 처음 선보인 후 작가의 트레이트마크가 되었다. 2015 리버풀 비엔날레, 2019 밀라노 트리엔날레 등 국제 무대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은 설치 연작이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안광 페인트는 작가의 회화 시리즈 ‘Seven Stars’로도 연결된다. 갤러리 본관으로 들어가면 미니멀한 연두색 회화와 마주하게 된다. 어느 순간 불이 꺼지고 암흑에 잠기면 그림은 밤하늘의 별처럼 3차원적인 느낌으로 변화한다. 3분간 감상할 수 있는 고요하고 깊은 적막의 순간이다. 구정아의 기묘한 작품은 서로 고립된 채 무한히 존재하는 평행우주를 연상케 한다. 작가는 1990년대 후반부터 ‘그저 평범한 것은 없다 Nothing is merely ordinary’는 태도로 평범한 일상 가운데 시적인 측면을 일깨우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그의 작품은 비가시적이지만 가시적인 것, 가상이면서 현실인 것, 있지만 없는 것 등 서로 상반되는 지점을 양립시키고 그 경계 너머의 열린 가능성을 제시한다.
갤러리 별관으로 이동하면 작가의 2020년 작 ‘88’, ‘518’, ‘625’, ‘911’ 등 암호같은 이름이 붙은 마그넷 조각 4점을 만날 수 있다. 자석 유닛의 개수와 동일한 제목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의 날짜를 의미한다. 작가는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개방형 건축을 자석이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속성에 비유한 세드릭 프라이스의 마그넷 이론에 관심을 가지고 이 작업을 계속해왔다. 작가가 이동하는 공간 속에서 한지에 그린 나무 드로잉 작업도 흥미롭다. 낮과 밤, 빛과 어둠 등 다채롭게 변화하는 시공간 속에서 작품을 마주해보길. 정오부터 저녁 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전시는 11월 28일까지.
- 피쳐 에디터
- 김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