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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이별

2021.09.05전희란

잘 끝난 관계가 있긴 있나? 이별은 항상 인간의 성품이 어디까지 처박힐 수 있는지 똑똑히 확인시키는 사건이었다. 요즘 그 회의가 뒤집히고 있다.

헤어진 연인과 한 집에서 살 수 있을까?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머리와 몸에 남은 잔여 감정에 따라 로맨스 혹은 욕정 활극이 펼쳐지지 않을까? 그런데 단둘이 아니라고? 남자 넷, 여자 넷. 전부 각자의 이별을 혹독히 겪었거나 겪고 있는 ‘ex 한 쌍’들을 한 집에 몰아넣은, 발칙한 판을 짠 건 소설가도, 시나리오 작가도 아니다. 방송국 ‘놈’들이 리얼리티 쇼로 만들었다. <환승 연애> 얘기다. 그 안에서 이별한 지 10년, 2년, 6개월, 3개월 된 커플이 각자의 감정과 정면 충돌하며 울고 웃는다.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첫 문장을 들었을 때, 난무하는 질투와 혼란스러운 감정, 치열한 눈치 게임, 아찔한 배신과 치정 같은 것을 떠올렸다. 한 방을 쓰며 가까워진 새 친구가 헤어진 지 반년밖에 안 된 내 ex와 손을 잡고 들어오는 신, 이별 후 처음 다시 만난 자리에서 “난 너밖에 없다”고 눈물을 글썽이던 이가 새로운 이성들 앞에서 눈이 돌아가 끼를 떨치는 모습 같은 것을 예고편 혹은 편집된 짧은 영상으로 봤을 땐, 필시 개싸움(사전적 정의, ‘옳지 못한 방법으로 욕망을 채우려고 하는 추잡한 싸움’에 충실하게 쓴 표현이다)이 일어날 것이라고 직감했다. 관전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출연자도, 나도, 뜻밖의 상황들과 마주했다. 이들은 새로운 만남으로 인한 간지러운 설렘보다, ‘다 끝난 줄 알았던’ 이전의 관계가 던지는 낯선 질문, 그 안에서 혼란과 당혹을 느끼는 자신과 마주한다.

사실 연애를 너와 나 모두 만족스럽게, 잘 끝내는 일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고 확신했다. 보고 겪은 것에서 도출한 결론이다. 순진했던 시절엔 이별이란 ‘얼굴 마주 보고 그간 고마웠던 것을 나눈 후 어른답게, 성숙하게 서로의 안녕을 기원해주는 마지막 만남’을 의식처럼 치러야 한다고 믿었다. “엄마가 너랑 만나보고 싶대. 괜찮아?” 묻더니 사흘 후 갑자기 잠수 타고 사라진 X, 출장 간 사이 휴대 전화 번호를 바꾼 X, 애와 배우자가 딸려 있는 X라는 사실이 발각됐는데도 헤어질 수 없다고 생떼 쓴 X… 앞에서 눈을 질끈 감으며 ‘아, 이별이란 원래 X같은 거구나…’를 깊이, 깊이, 깨달았다.
그 사건들에서 감정이 꽤 멀어졌을 때, 이런 판단을 내렸다. 둘 모두 흡족해하는 원만한 끝은 없다. 사랑을 주고받은 관계의 끝이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의기 투합해 프로젝트를 잘 끝낸 이 팀과 저 팀이 아니라, 너는 다 정리했는데 나는 안 끝났거나 나는 혼자 있고 싶은데 너는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욕망이 격돌했을 때 발생하는 갈등이니까. 그 불변(이라고 믿는) 진리는 그래서 이별이라는 과정을 치르고 받아들이는 일을 소홀히 하게 한다.
<환승 연애>엔 상실의 고통을 다양한 방식으로 회피한 이들이 애써 외면했던 이별의 민낯 앞에서 몸부림치는 모습이 나온다. 사랑을 제대로 끝내지 않은 죄, 프로이트가 말하는 애도 작업(Mourning Work, 대상 상실로 초래된 슬픔과 괴로움을 직접 겪으며 회복하는 과정)에 소홀했던 이들은 심리학 전문가들이 무수한 ‘관련 서적’에 흩뿌려놓은 ‘이별의 단계’를 마치 예언이라도 실행하듯, 한 치의 오차 없이 겪는다. 그것도 헤어진 지 한참 지나서. 슬픔이라는 원초적 반응이 지나간 자리에 찾아오는 상실 이후의 감정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다. 떠난 상대를 끊임없이 기억 속에서 재생시키는 ‘집착’, 그녀 혹은 그가 여전히 나를 좋아하거나 돌아올 거라고 착각하는 ‘부인’, 상대를 미워하고 욕하고 저주하는 ‘보복’, 전 연인이 정말 좋은 사람이거나 아주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치부하는 이상화와 비하, 후회, 죄책감, 알코올, 섹스, 맘에 없는 이성과의 관계에 탐닉….
당신이 자신과 남을 속이며 태연을 가장하는 동안 지나가야 할 감정들이 입구에서부터 막히고 쌓이면 결국 후폭풍이라는 공격을 받게 된다. 3개월 전에 잘 끝난 줄 알았던 이별을 뒤늦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부짖는 여자, 그런 ex 앞에서 ‘나라도 마음 잘 부여잡고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고 단호히 선을 긋다 결국 혼자 계단에 주저앉아 흐느끼는 남자에게 감정을 잔뜩 이입해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마음이 서늘해졌다. 잘 맺은 끝이 단 한 번도 없는 내 지난 이별들이 어느 날 저렇게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닐까? 그때마다 찾아왔던 고통스러운 감정을 회피한 것이 나의 냉소를 만든 걸까?
뒤늦게 고릿적 연애 얘기를 꺼내니 친구가 핀잔을 날린다. “야, 다 끝난 걸 뭐 하러 끄집어내? 니가 그러니까 새로운 사람을 못 만나는 거야.” 시대를 막론하고, 지난 관계를 되짚는 일은 쿨하지 못한 일로 치부돼 왔다. 언젠가 연애 칼럼을 쓰다가 닳도록 읽었던 책을 꺼내 들었다. 피드백이 필요했다. 사랑은 끝났으니 미련은 아니라고 믿으면서. 반추는 미련과 다르니까.

‘토론토 대학의 영문과 교수이자 하버드에서 사랑과 성 역할에 대한 강의를 하는’ 이라고 소개해야 하는 마리 루티는 책 에서 나도 알고 너도 아는 당연한 얘기로 ‘이별’ 챕터의 시작을 연다. “관계가 끝났을 때 자신의 감정을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프로이트’까지 끌고 와서 설명한, 그래야 하는 까닭은 이렇다. 사랑할 때 우리의 에너지는 당연히 연인을 향하며, 프로이트는 이를 대상에 쏟는 심리적 에너지, ‘카섹시스 Cathexis’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사랑은 카섹시스가 가장 강한 애착의 형태다. “사랑의 끝이 괴로운 이유는 우리가 쏟았던 에너지를 거둬들이도록 요청받기 때문입니다. 연인에게 투자한 것을 철회하도록, 그 대신 삶의 다른 소소한 일들에 에너지를 투자하도록 우리에게 요청하는 것이죠. 애도는 관심을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때 우리는 슬픔 그 자체가 카섹시스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 한다. 장기적인 애도는 우울증으로 연결될 우려가 있다. 이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애쓰는 슬픔과 감정에 심취한 슬픔을 분별하라는 얘기다.
루티는 이어서 “잘 끝내지 못한 사람은 철통 같은 벽을 치고, 고독한 성을 평생의 거주지로 만들며, 접근로를 차단하고 벽을 세운다.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 유별나게 차갑고 딱딱한 사람은 다치기 쉬운 내면을 보호하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페르난다 가라이(브라질 여자 배구 16번 선수 말이다)에게 싸대기를 후려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고, 아팠다. 얼핏 수월하게 잘 넘어갔다고 착각했던 이별이 사실은 전형적인 회피였다는 사실, 그런 이별이 가져오는 최악의 결과가 바로 나(aka 사랑을 믿지 않음. 남자도)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지난 관계를 소꼬리 뼈처럼 푹 고아 우리다가 친해진 정신의학과 전문의에게 물었다. 구로 연세봄정신의학과 원장 박종석은 이렇게 말한다. “연애란 자신의 방어기전을 완성시켜 나가는 과정이에요. 서로 다른 성격과 장단점을 가진 두 사람이 갈등을 참고, 감정을 억누르고 다른 사람에게 맞춰 가는 과정은 무척 어렵고, 대단히 큰 인내심이 요구되죠. 그 과정들은 언뜻 상대방을 알아 나가는 일처럼 보이지만, 결국 나 자신에 대해 깨닫는 여정이 됩니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수용하기 위해 건강하고 사려 깊은 마무리는 어쩌면 연애의 시작보다 훨씬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이에요.”
“우리의 인성은 상실을 거듭 겪으며 축적한 인물들의 보고”라는 말을 경구처럼 간직하고 있다. 물론 루티가 한 말이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남기고 간 것들의 총체다. 미워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던 X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니 그들이 내게 남긴 아름다운 면들이 하나씩 떠오른다. 좋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야 할 이유가 생겼다. 글 / 류진(프리랜스 에디터)

    피처 에디터
    전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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