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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시대의 OO

2021.09.11김은희

온도는 치솟고 얼음은 내려앉는다. 불이 붙고 물이 쏟아진다. 맞닥뜨린 기후변화 시대 앞에 놓인 백지의 해결서에 우리는 무엇을 채워 넣어야 하는가.

기후 위기를 소재로 한 단편집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을 쓰며 ‘삶의 우선순위’를 조금 조정하려 했다. 다짐이자 각오랄까? 가능한 한 일회용품, 플라스틱 제품을 사용하지 않는다(물티슈가 없으면 종종 불안함을 느꼈다), 대중교통을 더 자주 이용한다(얼마 전 어차피 잘 타지 않던 자동차를 처분했다), 육류를 먹지 않는 요일을 정한다(술이 문제다), 에너지 절약에 힘쓴다(아침 장시간 샤워 중독자였다) 등을 나의 선호와 기호만큼 고려하려 했던 것이다. ‘내가 쓴 글’보다 빛나는 사람까진 못 되더라도 그보다 후진 사람은 되지 말자는, 나보다 항상 앞서 나가는 글을 어떻게든 따라잡아 보자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렇게 올 4월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이 출간됐고, 계절은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집에서는 밤낮 구분 없이 에어컨, 선풍기에 의존해야 했다. 더위는 사람을 미치게 하고, 추위는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일까? 잘 때는 전기장판 위에 누운 느낌이었는데, 조금 과장하면 이러다 몸에 불이 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집 밖에 나가려 해도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다시 늘어난 상황이었고, 햇살은 사정없이 뜨거웠다. 게다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격상으로 도서관에도 오래 머물기 어려웠다. 장거리 이동도 두어 번 해야 했는데, 시간도 시간이지만 비행기 요금이 KTX 요금의 절반 이하라 그 유혹도 정말 참기 어려웠다.
나는 폭염과 팬데믹에 완전히 굴복했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을 쓴 작가입니다, 라고 말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아무튼, 되도록 집 밖으로 나서지 않은 채 양심의 가책 속에서 냉방 장치를 가동하며 (기후 위기를 소재로 하지 않은)다음 소설을 준비하는 동안, 유럽과 남미, 동남아시아는 전에 없는 폭우, 미국과 이란은 살인적인 가뭄, 러시아와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는 감당하기 어려운 폭염과 산불로 기후 재난 상황에 부닥쳤고,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에 수록된 ‘돔시티 3부작’의 내용처럼 냉난방 장치가 설치된 높은 벽으로 사방을 두르지 않는 이상 폭염, 폭우, 해일 등의 위험에서 벗어나기 요원한 미래가 현실이 되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던 차 국제앰네스티에서 한 통의 메일이 왔다. 특정 재판의 판사가 되어서 판결을 한번 내려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이상한 재판’. 세 개의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첫째, 이상 기후로 사과 농사를 망친 농부가 정부에 손해배상금을 청구한 것. 둘째, 끝없는 폭염으로 집이 화재에 휩싸일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느낀 어린 학생이 정부에 대책을 요구한 것. 셋째, 택배 기사가 기상 위험 상황에서는 일을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지금은 기업이 결정한다) 정부에 요청한 것. 이 세 개의 사건과 ‘이상한 재판’의 핵심 쟁점은 기후 위기에 따른 여러 문제 상황에서 정부를 피고의 자리에 둔 채 정부 책임 여부를 가리는 것이었다.
나는 부러 정부 책임이 없다는 쪽으로 재판을 끌고 갔다. 변호사와 원고의 변론이 위 사건들은 개인의 문제라 여기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설득 당했다. 고온 건조한 날씨의 증가로 산불 발생량이 늘어났고, 이상 기후로 농업 재해 피해도 상승 곡선을 그렸다. 모든 시민에게 피해가 되는 일들이고, 충분히 예상 가능한 피해임에도 이를 대비하지 않는 것은 정부의 직무 유기다. 게다가 정부는 기후 위기의 주원인 중 하나인 화석 연료의 사용 중지를 미룸으로써 기후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이들에게 보상하고 후속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땅, 땅, 땅!

나름 명쾌한 판결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재판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피고’의 자리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이 상황이 되기까지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아요?”, “말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잖아요! 관련 소설도 썼다는 양반이···.”
폭염과 팬데믹을 맞닥뜨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나를 이렇게 변호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존경하는 판사, 변호사, 그리고 원고님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은 제가 지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소설가로서 기후 위기에 대한 공감대를 넓히고, 미미하지만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담아 쓴 소설입니다. 그러나 소설 출간 이후에도 기후 위기 상황은 변함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더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혹시, 제 소설이 이 시기의 필독서가 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의미 있는 변화가 조금이라도 일어나지 않았을까요? 그래서 저는 외람되지만 여러분께 따져 묻고 싶습니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이 베스트셀러가 되지 않은 것이 제 잘못인가요?”
설사 베스트셀러가 되었더라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각각의 개인이 기후 위기를 막기 위해 욕망을 절제하고, 에너지를 절약하고, 좀 더 섬세하게 환경을 고려하고, 생각만큼 단단하게 실천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다시 각오를 다지는 동안 ‘정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폭염과 폭우, 가뭄과 산불에 두들겨 맞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를 정치의 제1순위 과제로 삼고, 에너지 전환 정책 같은 거시적 변화를 과감하게 추구하지 않으면, 지구의 미래는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는 개인의 실천에만 의존하는 편향된 상황, 이른바, ‘기후 정글’의 지속 여부에 운명을 맡겨야 한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을 쓸 당시에도 나는 지구의 미래를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편에 가까웠다. 기후 위기를 저지하기 위한 개인의 각개 전투를 의미하는 ‘기후 정글’(제가 만들어본 개념입니다)의 상황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각성과 협력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니다. 구조의 변화는 개인의 변화가 동력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여서는 안 된다. 개인은 약하고 타협하기 쉬운 존재다.(특히 제가 나약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후 정치’가 반드시 함께 작동해야 한다.

정치는 언제나 ‘시대의 필요’보다 늦게 도착했다. 과감한 기후 공약을 제시하는 대권 주자는 없다시피 하고, 정부는 석탄 발전소를 폐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임에도 사회적 합의를 근거로 머뭇거리고 있다. 기성 정치는 그렇다. 그러나 그 외의 정치는 다르다. 스웨덴에서 태어난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의 활동에서 영감을 받아 한국에서도 청소년들이 ‘청소년 기후행동’ 같은 이름 아래 즉각적인 온실가스 감축, 석탄 발전소 폐쇄, 재생 에너지로의 전환, 발 빠른 기후 재난 피해 복구 같은 ‘기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는 이들의 요구에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지구의 평균 온도가 1.5도 이상 올라 다수의 생존이 위협받는 실제 ‘기후의 재판’이 열렸을 때, 기성세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그리고 정부는 피고의 자리에 앉아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여유조차 없이 뜨거운 햇살에 흐물흐물 녹아내릴지도 모른다.
<기후변화 시대의 사랑>의 서문을 쓴 정용준 작가님의 말을 빌리면 “지구도 도서관에서 빌린 책과 같다”. 나는 다시 지구를 소중히 사용할 각오로 냉방 장치를 수시로 끄고 있지만 앞으로 몇 해나 더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점점 더 사나워지는 폭염 때문에 자신이 없다. 그래서 정부에 묻고 싶다. 대안 없이, 앞으로도 계속, 개인의 양심에만 의존할 생각이냐고. 글 / 김기창(소설가)

    피처 에디터
    김은희